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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예전에 지방회에서 연합집회를 하는데 그 분이 서울의 어떤 교회 권사님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권사님은 그 교회에서 기도를 많이 하기로 또 오래도록 기도하고 방언으로 기도하기로 소문이 나 있는 분이었습니다.
실은 오래 남아 기도하니 담임목사님도 그 분과 비례해서 오래도록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거기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그 권사님이 사는 동네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면 고함치고 소리치는 것으로도 유명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무슨 말다툼이 벌어지면 큰 소리 나기로 널리 알려진 분이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런 분이 방언을 유창하게 한다면 과연 교회에 덕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방언을 받고 방언으로 기도하면 오래도록 하나님과 깊이 있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방언을 자기 강화의 수단으로 삼거나 자기 자랑거리로 삼는다면 교회에 유익이 될 수 없는 것이죠.
교회의 유익은 고사하고 그 동네에서 결코 존중받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에 반감을 가져다주는 분이 될 수 있는 것이죠.
그만큼 방언이나 다른 은사는 모두가 성령님이 주신 것으로서 교회에 기쁨이요 유익이 되는 수단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방언이나 은사가 목적 자체가 되면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가 없고 교회의 덕을 세울 수가 없는 것이죠.
그만큼 방언이든 은사든 성도를 사랑하는 도구로 사용해야 교회에 유익이 되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고린도 전서 13장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문헌 중 가장 아름다운 찬가입니다.
그 어떤 대문호도 바울이 쓴 고린도 전서 13장에는 필적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3장을 통해 사랑의 필수성, 사랑의 특성, 사랑의 영원성을 간결하고도 완벽하게 표현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고린도 전서 13장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교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13장을 왜 썼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동기와 배경을 간과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고린도전서 13장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쓴 편지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서로 받은 은사로 싸우고 경쟁하고 대립하고 분열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서 사랑해야 될 사람들이 사랑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한 개인을 향해 쓴 편지가 아니라 고린도교회 공동체를 위해 쓴 것입니다.
그렇기에 고린도전서 13장을 시작하기 전에 12장 마지막 절인 31절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거기에 큰 은사라고 말한 뜻이 무엇일까요?
성령님의 은사 가운데 우열이 있다는 것을 말한 게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교회 공동체에 더 큰 유익이 되는 길을 추구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게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교회 공동체에 가장 유익이 되는 결과를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깨달음)그렇기에 고린도전서 13장을 볼 때 교회 공동체든 가정 공동체든 국가 공동체든 공동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중요합니다.
그만큼 고린도전서 13장을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적용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할 가장이 알 콜 중독자라면 어떻겠습니까?
날마다 술을 마시고 폭행을 한다면 말입니다.
그때 아내가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하면서 오래 참으면 능사겠습니까?
아니죠.
그것은 그 남편을 향한 직무 유기입니다.
알콜 중독자인 남편 앞에서 그 아내는 오래 참을 것이 아니라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지키고 내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는 알콜 중독자인 남편을 치료시켜야 하는 것이죠.
그것은 알콜중독자나 도박중독자나 마약중독자나 그 어떤 중독자도 마찬가지죠.
그들을 향한 사랑은 그냥 오래 참는 게 아니라 치료시켜 주는 것입니다.
(적용)갑자기 내가 일하는 곳에 불한당이 찾아와서 기물을 파기하고 난리를 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때 고린도 전서 13장을 펴놓고서 사랑은 온유합니다 하고 말하면 될까요?
경찰에 신고를 하든 같이 힘을 합쳐 몰아내든 내 일터라는 공동체를 지켜야 하는 것이죠.
적군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오고 여자들을 유린하고 폭행하고 재산을 빼앗아 갈 때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하면 되는 것일까요?
국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함께 몸을 던져야 하는 것이죠.
바로 그런 관점으로 공동체의 유익을 생각할 때 고린도전서 13장을 오해하거나 잘못 적용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제 본문을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본문)본문 1절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원해)여기에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은 헬라어로 ‘글로사’(γλῶσσα)로 ‘혀’(the tongue)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도 혀로 하는 것이고 천사의 말도 혀로 하는 것이죠.
다만 사람의 방언은 인간이 자기 언어로 알아듣는 방언이고 천사의 말은 통역이 필요한 말이죠.
물론 사도행전에 나오는 오순절날 임한 방언은 세계 16개국에서 온 사람들이 다 자기네 말로 알아듣는 인간의 언어였습니다.
(깨달음)그래서 오순절날 임한 방언은 성령의 능력 속에서 행한 외국어였습니다.
그것을 통해 세계 사람들과 소통하고 그 관계를 넓히며 확장하도록 하라는 성령님의 뜻과 인도하심이 있었던 것이죠.
그것으로 자기 과시를 삼지 말고 오직 관계 지평을 넓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임한 방언은 서로들 알아듣지 못한 말이었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통역의 은사를 받은 분이 필요한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 방언을 받은 분들은 그 방언으로 자기 과시를 나타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천사의 방언을 한다 하지라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꾕꽈리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원해2)그렇다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는 또 무엇이겠습니까?
소리나는 ‘구리’는 헬라어로 ‘칼코스’(χαλκός)로 브라스를 말하는 것입니다.
울리는 ‘꽹과리’는 ‘큄발론’(κύμβαλον)으로 심벌을 말하는 것입니다.
(깨달음)바로 그 악기들이 아프로디테 신전과 같은 이방 신전에 쓰였던 제기였습니다.
사람들이 그 우상에게 제사할 때 금속 악기를 치면서 소리를 지르고 열광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남을 배려하는 사랑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없었죠.
오직 신에게만 몰두하기 위해 브라스를 부르고 심벌을 치는 것이죠.
거기에서 제사하고 기도할 때 광란적으로 소리치는 것이죠.
그래야 우상을 통해 자기 소원이 성취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믿고 소리치고 열광했던 신들은 쇠붙이나 나무 조각에 불과할 뿐이죠.
그러니까 그런 신 앞에서 브라스를 부르고 심벌을 치면서 열광하고 괴성을 지른다 한들 아무 의미 없는 소음이 되고 마는 것이죠.
사도 바울은 너희들이 방언이나 천사의 말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이방 신전에서 악기를 두드리고 소리치는 소음과 똑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고린도 교회에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가 방언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은 방언이 세다 네 방언은 약하다, 서로 자랑하고 다퉜던 것입니다.
그만큼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방언, 사랑하지 않는 방언은, 단순한 공기의 진동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적용)그렇기에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할 부분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가족간에 찬송을 불러도 가족간에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꽹과리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지만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이방 신전에서 두르는 소리와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령 유창한 방언을 하지 못한다 해도 상대방을 배려하고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최고이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그 심령 속에 함께 거하시고 그런 자들의 예배와 기도를 기쁨으로 받으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예화)미국 뉴저지주에 털이 거의 다 빠지고 얼굴에 흉터까지 있어 꼭 괴물같이 보였던 개가 있었습니다.
거리를 어슬렁거리던 개는 수용소에 갇혔고 거기서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육사가 그 못생긴 개로부터 특이한 행동을 발견했습니다.
그 개는 기러기만 보면 짖어대고 사정없이 쫓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신문에서 기러기 떼 때문에 비행장이 큰 골치를 앓고 있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사육사는 그 개가 도움이 될까 싶어 그 개를 데리고 비행장을 찾아갔습니다.
비행장 측에선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그 말을 믿고 1년에 300만 달러나 되는 손해를 생각하고 시험 삼아 개를 인수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개가 기러기를 쫓는데 정말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었습니다.
비행장 측은 ‘터빈’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주며 그 기러기 주인에게 표창장을 줬습니다.
(깨달음)어떻습니까?
그 못생긴 개가 1년에 36억원을 번 셈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병들고 못생긴 개에게도 기러기를 쫓는 은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도 그런 은사를 선물로 주신 분입니다.
그 은사를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사랑으로 사용할 때 주님께서는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방언과 같은 은사로 공동체의 유익을 끼치는 통로가 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서울의 그 권사님이 아무리 유창한 방언으로 세련되게 기도한다 해도 동네에 가서 소리치고 싸운다면 무슨 덕이 되겠느냐?”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자신이 방언이 최고라면서 으스대고 소리치는데 과연 교회 공동체에 유익이 되겠느냐?”
“그 모습은 주님을 믿기 전에 아프로디테 이방 신전에서 제사하고 기도할 때 광란에 빠져 소리치는 모습이지 않겠느냐?”
“그만큼 사랑이 없는 방언은 소리나는 브라스와 울리는 심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터빈이라는 볼품없는 개도 기러기를 쫓아내는 은사가 있지 않았더냐?”
“아무리 보잘 것 없이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고유한 은사를 주신 것이 있으니 그것으로 교회공동체의 유익이 되는 것을 너도 찾아봐야 하지 않겠느냐?”
“그 은사를 상대방을 허물기보다 묵묵히 섬기고 사랑으로 세울 때 주님은 가장 기뻐하실테니 말이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은사보다도 사랑을 강조한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더냐?”
(찬양)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자매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우리의 모임 중에 임하신 하나님 영광 아름다워라
존귀한 왕이 여기 계시니 사랑하며 섬기리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각자 성품에 맞는 다양한 은사를 주신 분입니다.
더욱이 방언의 은사를 통해 주님과 더 깊이 기도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방언을 한다 할지라도 사랑으로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다면 단순한 공기의 진동에 불과할 뿐입니다.
내가 어떤 은사를 받았든지 그 은사로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존중하는 그 도구로 사용할 때 주님은 기쁨의 은사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든 다른 모든 은사든 모두가 교회 공동체를 사랑하고 살리는 도구요 통로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그런 은사를 받은 자답게 주님께 기쁨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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