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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엊그제 목포시연합 목회자 체육대회가 실내체육관에서 있었습니다.
각 교단별로 풋살 족구 배구 등의 경기를 했습니다.
성결교단은 동지방과 서지방으로 두 팀이 나갔습니다.
우리 지방회 목사님들도 많이 와서 대부분 한 경기씩은 뛸 수 있었습니다.
성적도 좋아서 2등을 한 것 같습니다.
상금도 30만원을 탔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깨달음)그런데 그 경기를 하면서 경기에 뛰지 못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다리가 아픈 목사님들도 있었고 또 먹을 것을 실어나르는 목사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기장 안에서 끝까지 응원하면서 자기 자리를 지키는 목사님들도 있었죠.
뭐든지 하나의 조직체는 한 몸을 이루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머리 따로 몸 따로 손과 발 따로 놀게 되면 온전한 몸이 될 수 없는 것이죠.
풋살도 두 팀이 나갔는데 한 팀에 경기에 나갈때마다 모든 목사님들이 한 몸이 되어 뛰는 듯 응원하고 지지했습니다.
(적용)교회도 그렇게 해서 세워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위해, 성도들이 한 몸 한 뜻으로 받드는 것 말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받은 은사는 저마다 인격에 따라 성품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은사는 주님의 몸을 세우도록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기이에 다양한 은사를 자기 자랑으로만 여기지 말고 오직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데 협력하고 헌신하는 게 아름다운 모습이죠.
그것이 진정으로 한 몸을 이루는 교회 공동체의 진정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그런 자들에 의해 세워지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부터 성령의 은사에 대한 목회적 답변을 제시해주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영적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가 더욱 크다고 경쟁하고 으시댔습니다.
특히 방언에 관해서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경쟁하듯이 이야기를 했죠.
사로 방언을 통해 큰 자임을 과시하기 위해서 마치 이방인들이 우상 신전에서 술먹고 춤추며 괴성을 발하는 듯한 그 모습을 교회 안에서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신령한 것에 대해 반드시 알기를 바랐고 방언이 성령께서 선물로 주신 것임을 아는 신령한 사람은 함부로 자랑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자신이 자랑하고 싶거나 내키는 말만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말을 하는 자이기 때문이죠.
그와 같은 방언에 관한 분쟁이 얼마나 컸던지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전체를 방언에 관해 다루기도 햐죠.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성령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여러 가지’인데 헬라어 ‘디아이레시스’(διαίρεσις)는 은사의 다양성(diversty)을 말하는 게 아니었죠.
성령이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열매와 같은 은사의 다양성(distribution)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님을 한 뿌리로 그 뿌리로부터 여려 열매가 맺히기 때문에 그 은사를 성령님께서 분할해 주신 격입니다.
그만큼 성령님께서 선물로 주신 은사는 인간의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성령님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는 것든 각 사람에게 유익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 유익은 개인적인 유익만을 염두에 둔 게 아니라 교히 공동체의 유익을 위함이라고 했죠.
그만큼 개인이 받은 은사를 교회 공동체의 질서와 평강과 상대방의 덕을 위해 사용하고 헌신하길 원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진정으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라면 타인에게 유익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깨달음)지난 시간에 살펴 본 11절은 성령님께서 은사를 주실 때 당신의 뜻가운데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말 성경에 빠져 있는 게 있었는데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나눠주신다”는 말씀이 그것이었죠.
하나님께서는 100명 200명 다 모아 놓고 단체로 은사를 주시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인격적으로 대하시고 그 신앙 경륜과 자질을 보시고 그에게 필요한 은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은사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결코 나의 자랑거리가 될 수 없고 남의 은사를 경시할 수도 없는 것이죠.
(본문)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교회의 유기체적인 다양성과 통일성에 관한 부분입니다.
지난 시간 봤던 내용과 전혀 다른 내용이 아닙니다.
성령의 은사에 관한 연장선상에서 바울이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2-1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원해)헬라어 원문에는 맨 앞에 헬라어 ‘가르’(γάρ) 곧 ‘왜냐하면’(for)가 기록돼 있습니다.
그만큼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11절까지 말한 내용의 보충설명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우리에게는 몸이 하나입니다.
내게 몸이 하나라고 해서 지체가 손과 발 하나 밖에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이 지체들 모두 개별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고 그 역할과 기능도 다 다르죠.
그렇다면 지체가 많이 있기 때문에 몸이 다 다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몸은 하나이기 때문에 다양한 지체들이 하나의 몸 속에서 통일성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몸된 교회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 가운데에는 똑같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 다릅니다.
그렇지만 개개인은 다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돼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신 지체 안에 통일성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3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다 다 한 성령의 세례를 받아 한 몸의 지체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철저한 선민의식을 지닌 사람들로 이방인들을 짐승취급하던 사람들입니다.
또 당시에 주인과 노예는 결코 한 자리에 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지만 상극일 수밖에 없는 유대인과 헬라인, 자유인과 노예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주님의 한 몸이 됐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세례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하여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렇기에 우리가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연합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원해2)13절에 ‘마시다’는 헬라어 ‘포티조’(ποτίζω)인데 우리말로 ‘마시다’(drink)인데 비유적으로는 ‘젖어들다’(to imbue)는 뜻입니다.
‘마시다’는 의미는 성령세례를 받는 걸 말합니다.
성령에 의해 젖어들고 스며드는 것을 말하죠.
(원성)요한복음 7장 37절에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여기에서 ‘마시다’는 헬라어는 ‘피노’(πίνω)를 사용했지만 ‘포티조’와 대동소이합니다.
성령을 마시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칠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깨달음)뭐든 스며들게 되면 거기에 점점 잠기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성령에 스며들게 되고 성령에 잠기게 되면 온전한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을 마시는 자는 성령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죠.
그런 사람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받드는데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 안에서 다양성과 통일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본문2)오늘 본문 14-27절까지는 읽어보면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몸과 지체가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몸은 하나이고 지체는 여러 가지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몸이란 주님의 몸된 교회를 말하는 것이고 자체는 몸을 이루는 머리와 눈과 귀와 손과 발을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어느 것이 더 귀하고 어느 것이 덜 귀한 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눈이 보배이긴 하지만 손 더러 쓸모 없다고 말할 수 없고, 머리가 중요하긴 하지만 발더라 쓸모 없다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더욱이 한 몸의 지체는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부위가 불편하거나 아프면 다른 지체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 지체가 고통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아파하고 어느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다른 모든 지체도 즐거워하는 것이죠.
그래서 27절에 결론적으로 말하는데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원해)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헬라어 원문은 ‘소마’(σῶμα) 곧 ‘몸’(body)입니다.
일반적으로 소마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는 없습니다.
정관사가 없을 경우에는 ‘한 몸’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두 몸이 아니라 한 몸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절대로 두 몸이나 세 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만큼 교회도 주님의 한 몸처럼 모든 지체가 주님의 뜻을 받들고 순종하는 지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달음)그래서 어떤 지체는 귀하거나 어떤 지체는 하찮거나 하는 지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눈이나 비가 온 뒤에 자동차 창문이 더럽게 됩니다.
그런데 와이퍼 물구멍은 0.1m도 안 된다고 하죠.
그것 없이는 자동차를 운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처럼 우리 가운데 불필요한 지체는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다 필요한 지체들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어떤 사람은 남 앞에서 드러나는 봉사자도 있지만 전혀 드러나지 않는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한 몸의 봉사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교회에 영광이 되는 것이죠.
그 모든 것이 합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적용)바울이 왜 지금까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방언의 은사만 최고로 여기는 자들을 향해 유창한 방언을 못하는 사람도 성령의 사람임을 잊지 말고 존귀한 지체로 여기라는 뜻이죠.
예언을 담당하는 설교자만 유능한 지체가 아니라 주차장을 안내하고 설거지를 담당하는 봉사자들도 모두가 주님의 몸된 교회의 귀중한 지체라는 것입니다.
그 모두가 한 성령의 뿌리에서 나온 은사의 다양성이요 그 다양한 은사를 통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는 지체가 되라는 것이죠.
그런 다양성을 존중하고 또 주님의 몸을 받드는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는 온전한 교회가 되라는 격려의 말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양한 은사를 받은 자로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주님의 지체로 부르신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목포시연합 목회자 체육대회를 통해 경기에 출전한 분들과 물품을 실어나르는 분들과 응원하는 분들이 실은 한 몸이지 않겠느냐?”
“경기에 뛰는 목회자나 관중석에서 응원하고 지지하는 목회자가 모두가 한 팀이지 않더냐?”
“지금 바울도 그런 심정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응원하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
“누군가 신비로운 방언을 받았다고 자랑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드러나지 않는 은사를 주님께서 주셨으니 말이다.”
“개별적으로 그에게 맞는 은사를 주신 목적은 자기 자랑을 삼도록 함이 아니라 한 몸인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서로가 세우도록 하기 위함이지 않더냐?”
“성령세례를 통해 성령을 마신 자들은 성령님께 스며들도 성령님의 뜻을 좇아 살 듯이 서로 서로 지체를 존중하고 오직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도록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풋살 선수요 족구 선수로 두각을 나타낼지라도 응원석에서 응원하는 분들도 존중해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운동하는 동안 누군가는 밥과 반찬을 준비하면서 함께 운동회를 빛낸 것 아니겠느냐”
“네가 두드러진 실력을 지녔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은사로 여기고 드러나지 않는 분들도 존중하는 걸 주님께서 원하지 않겠느냐?”
“그만큼 너는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요 너와 함께 신앙생활하는 모든 성도들도 같은 지체로 존중해야 하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런 다양성과 통일성을 잘 받들 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교회는 잡음이나 다툼 없이 아름답게 세워질 수 있으니 말이다.”
(찬양)너 어디 가든지 순종하라 너 어디 있든지 충성하라 주 너의 하나님 왕 되신 주 영원히 주님만 찬양하라
너 무엇하든지 진실하라 너 무엇하든지 성실하라 주 너의 하나님 도우시리 어디를 가든지 정직하라
너 어느 때든지 기도하라 너 어느 때든지 감사하라 주 너의 하나님 돌보시리 너 어느 때든지 기뻐하라
너 고난 속에서 평화하라 너 핍박 속에서 감사하라 주 너의 하나님 함께하리 승리의 주님을 찬양하라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체육대회든 운동회든 가을나들이든 그 모든 모임에는 앞에서 이끌고 눈에 띄는 분들도 있지만 조용히 뒷자리를 살피는 분들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나서야 하고 또 누군가는 조용히 처리하는 성격을 지닌 분들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경기에 나서서 뛰는 은사가 있고 또 누군가는 음식준비의 은사가 있고 누군가는 뒷정리를 잘 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주님의 몸을 받들고 세우는 각각의 지체들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받은 은사가 각각 다양하고 그 은사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데 헌신할 때 그 은사가 아름답고 빛이 날 줄 믿습니다.
그토록 다양한 은사를 주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유가 그것이요 그런 은사를 더욱더 아름답게 헌신할 때 주님께서는 더욱더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총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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