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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대령으로 갓 진급한 장교가 새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자기 어깨의 대령 계급장을 보면서 자랑스레 웃고 있어습니다.
그때 이등병 하나가 그의 사무실로 들어와 경례를 한 후 무슨 말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대령은 그 사병의 말을 막으면서 먼저 말을 했습니다.
“잠깐만, 사병. 내가 지금 중요한 전화를 해야 하는데 거기서 기다려!”
그리고는 전화번호를 돌리고 전화통에 대고 말을 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박장군님, 장군님께서 다른 세 분의 장군님과 함께 저를 만나기 원하신다고요?”
“네, 오늘 오후 2시에요? 좋습니다. 장군님 물론이지요. 제가 거기로 가겠습니다”
그는 곧 수화기를 내려놓고 잘난 체하는 표정으로 이등병에게 근엄하게 말했습니다.
“자, 사병. 무슨 일로 왔는지 이제 말해봐라.”
이등병은 그때서야 이렇게 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대령님. 사무실에 전화선을 연결해드리라고 해서 왔습니다!”
(깨달음)잘 난 체하던 신임 대령은 이등병 앞에서 큰 창피를 당하고 말았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스스로 잘난 체하면 언제 부끄러움을 당할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교만함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적용)‘20세기 인도의 성자’라고 추앙받는 선다 싱은 사도 바울만큼이나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많은 은사를 받았는데 사람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의 은사와 병고치는 은사였습니다.
어느 날 선다는 중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윌리엄이라는 소년으로부터 기도부탁을 받았습니다.
썬다는 윌리엄을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밤새도록 윌리엄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 병원 의사들과 윌리엄이 다니는 교회 성도들은 윌리엄이 완쾌된 모습 앞에 놀랐습니다.
이 소식은 온 마을로 퍼졌고 여기저기서 선다는를 초청해 그가 한 일을 칭찬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선다는 그런 찬사와 명성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 후에는 어떤 사람이 오든지 병을 고쳐달라는 청을 거절했습니다.
선다가 병을 고쳐주면 그 능력의 근원이신 하나님보다도 선다를 신격화하고 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다면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교회와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는 게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고린도전서 7-15장까지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질문에 대한 사도 바울의 목회적 답변입니다.
제일 먼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질문했던 것은 그리스도인의 결혼문제였습니다.
바울은 결혼했다가 이혼했거나 혹은 사별한 자이기 때문에 임박한 종말론 앞에서는 자신처럼 그냥 지내는 게 좋다고 했죠.
그 후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서 대답했습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해 먹는 것은 우상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자유할 수 있다고 했죠.
하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가 보기에 내가 우상의 음식을 먹는다면 바울과 같은 사람도 먹는다고 생각하면서 실족할 수 있다고 했죠.
바울도 우상을 인정하는 자인가, 바울도 우상에 대해 두려워하는 자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 착가이나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면 자신은 평생토록 우상의 제물에 대해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자기 자신을 위해서 먹지 않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먹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뒤 공적인 예배시간에 여자들이 예배포를 착용하는 문제에 대해서 바울이 답변했습니다.
그 당시 여성들이 공적 모임에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는 경우는 창녀가 그랬지만 대부분은 썼죠.
성을 존중하는 차원이었는데 바울은 공적예배 때 여성이 예배포를 쓰는 건 하나님의 창조질서 차원이라고 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등된 분이지만 성부가 성자의 머리라고 하는 것도 질서의 차원에서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가톨릭에서는 미사포를 쓰고 개신교단 중에도 쓰는 곳도 있지만 그걸 쓰냐 안 쓰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죠.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순종하며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사느냐가 더욱 중요한 일이죠.
그리고 지난 시간까지 살펴 본 말씀은 성찬식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변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성찬식을 가르쳐 줄 때 주님께서 제정하신 그대로를 전해줬다고 했죠.
자신이 더하거나 빼거나 한 것 없이 말입니다.
그만큼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찬의 참된 의미는 ‘떼어주는 것’ ‘나눠주는 것’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고린도교회가 애찬을 하고 곧이어 성천을 할 때 나중에 온 일꾼들과 노예들도 그것을 나눠 먹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배려 없이 누군가 소외된다면 어찌 주님의 성찬을 나누는 교회일 수 있겠냐는 것이었습ㄴ다.
(본문)오늘부터 우리가 살펴볼 고린도전서 12장은 영적 은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13장은 사랑의 은사에 대한 부분이고, 14장은 특별히 방언과 예언의 은사에 관한 바울의 답변입니다.
12장 1-11절 말씀은 그 주제가 영적은사에 관한 부분이고 12-31절까지는 영적 은사 속에서 교회의 몸이요 지체인 우리 자신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역사가 긴 고등종교는 불교입니다.
그런 불교가 타락할 때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는 스님들이 서로 자기 도가 깊다고 경쟁하는 것입니다.
불자 세계라는 한정된 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내 도가 높다, 네 도는 낮다, 하는데 불교 바깥의 사람들이 보면 대단히 웃기는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들 스스로 부처의 법대로 산다면서 부처의 법을 이용해 자신들을 내세우려 하는 교만에 빠진 모습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은 비단 불교계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타락할 때 보이는 똑같은 현상입니다.
기독교도 예외일 수 없겠죠.
모든 종교가 타락할 때는 신앙의 교만으로 나타나는데 기독교도 영적 교만과 정비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영적으로 가장 큰 사람이다, 내가 지닌 영적 은사가 가장 큰 은사다 한다면 영적 교만에 빠진 모습입니다.
그 순간부터 하나님도 사람도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죠.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깨달음)영적으로 교만함에 빠지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 앞에서 나를 부인해야 할 말씀이 아니라 나를 더 높이는 도구가 됩니다.
그렇기에 영적 교만은 패망의 앞잡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닌 영적 은사가 제일 크고 깊다면서 서로가 영적인 교만 속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네들끼리 그 다툼을 해결할 길이 없어서 바울에게 편지를 쓴 것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변이 오늘부터 살펴볼 12장 말씀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본문)본문 1-2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원해)‘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한다’는 헬라어는 ‘오우 델로 휘마스 아기노에인’(οὐ θέλω ὑμᾶς ἀγνοεῖν)입니다.
바울은 이중 부정표현을 써서 반드시 말아야 한다고 역설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신령한 것’ 곧 성령에 대해 확실하게 모르고 있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를 혼란에 빠트렸는데 그렇기 때문에 분명히 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신경한 것 곧 영적인 것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까?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기 전에 헬라인으로 살던 때를 말한 것이죠.
헬라인으로 살던 그때 우상에게 끌려다녔는데, 지금은 성령에 대해 확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때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우상에 대해 ‘말 못하는 우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하지 못하니까 들을 수도 없겠죠.
그런데도 말하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쇠붙이에 불과한 그 우상이 끄는 대로 끌려갔다는 것입니다.
사제가 끄는 대로, 신전 분위기에 끌려, 더 소리를 지르고 더 열광하듯 하는 모습으로 살았다는 거죠.
(깨달음)사도 바울이 성령의 은사를 이야기하면서 왜 말 못하는 우상에게 끌려다닌 옛 삶을 말한 것입니까?
성령의 은사를 받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성령의 관점으로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인데도 마치 우상에게 끌려다니듯 열광하고 서로들 크다면서 경쟁하는 모습이 우상을 섬길 때와 똑같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나타난 방언도 그런 모습이었죠.
마치 예전에 이방 신전에서 열광적으로 하듯이 고린도교회 내에서 방언을 할때도 괴성을 지르는 듯한 소리를 질러대는 것과 똑같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그 모습과 말못하는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적인 열광적인 모습을 대비시켜서 깨닫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2)본문 3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원해)여기에 ‘알리노니’는 헬라어로 ‘그노리조’(γνωρίζω)인데 ‘알리다’ ‘드러내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생명의 길’(행2:28)이나 ‘과거와 미래의 모든 것’(엡6:21,골4:7)과 관련해 사용된 단어죠.
그만큼 바울은 1절에서도 이중 부정을 통해 반드시 알도록 해고 3절에서도 현재진행형으로 앞으로 반드시 알아야 할 바를 알리겠다는 뜻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과연 무엇을 알리고자 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님을 주시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깨달음)그렇다면 목석인 우상을 섬기는 자와 인격적인 영이신 하나님을 믿는 자와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가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성령님은 스스로 곧 ‘자의로’, 다시 말해 ‘함부로’ 말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영이 아니겠죠.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도 성령님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진리만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그런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죠.
더욱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 말하는 자는 예수님에 대해 저주받은 자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님께서 나무에 못 박힌 까닭에 예수님은 부정한 자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고 부정을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성령님에 의해 깨어 있는 자는 십자가를 보고 저주받은 자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저주받을 나를 대신해 저주받은 구세주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의해 말하는 자는 그 사실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저주받은 자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님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혜를 중시하는 헬라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무능하고 무지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관점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나를 대신해 죽으신 메시아인 것이죠.
그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내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겠냐 하는 것입니다.
(적용)그러면 바울이 왜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입니까?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서로 자기 은사가 크고 자신이 영적으로 깊다고 자랑하고 있으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너희들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메시아요 성자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지혜를 주신 증거이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너희들은 성령님의 관점에서 생각지 않고 성령님보다 위에 서려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자라면 자의대로 함부로 말해선 안된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 하는 뜻이죠.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자라면 우상의 신전에서 열광하듯이 뽐내고 소리치듯 할 수 있겠냐, 하는 거죠.
그만큼 너희들이 진정으로 성령을 받은 자라면 자기 은사나 자기 지혜만 좇는 자가 아니라 성령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말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냐 하는 뜻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성령을 받은 자라면 말입니다.
우리도 내가 받은 영적인 것을 강조하거나 더 높고 깊다고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되는 것이죠.
내가 받은 지혜가 더 신령하다고 뽐내거나 으스대지 못하는 것이죠.
오직 나의 나된 것은 주님의 은혜로 여기면서 겸손하게 주님의 화평을 좇고 서로에게 덕을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성령의 은사를 통해 예수님을 높이고 교회와 성도들의 덕을 세우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대령으로 진급한 장교가 사병 앞에서 자기 진급을 자랑하다가 무슨 망신을 당했는지 너는 알 수 있지 않느냐?”
“인도의 성자라 불리는 선다 싱도 주님의 은혜로 병자를 고친 통로였지만 자신이 칭찬받고 높아질 때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라 그만 두지 않았더냐?”
“영적인 교만에 사로잡히면 자신이 제일이고 남은 안하무인격이 된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지 않느냐?”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자신이 받은 은사를 제일로 여긴 채 다른 성도를 무시했는데 성령님께서는 그런 무질서와 불협화음을 기뻐하시는 분이시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진정으로 성령의 사람이라면 네가 원하는 말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원하는 말로 화평과 덕을 세워가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라면 은사를 행한 후에도 너를 자랑하거나 교만에 빠질 게 아니라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데 집중해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진정으로 예수님의 구원받은 자라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매사에 겸손하게 주님의 은혜를 높이는 자가 돼야 하지 않겠느냐?”
“비록 네가 남다른 은사를 받지 못했어도 무묵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에 순종하고 교회와 다른 성도들의 덕을 세우는데 헌신하고 있다면 주님께서 너를 최고로 여기지 않겠느냐?”
(찬양)너 어디 가든지 순종하라 너 어디 있든지 충성하라
주 너의 하나님 왕 되신 주 영원히 주님만 찬양하라
너 무엇하든지 진실하라 너 무엇하든지 성실하라
주 너의 하나님 도우시리 어디를 가든지 정직하라
너 어느 때든지 기도하라 어느 때든지 감사하라
주 너의 하나님 돌보시리 너 어느 때든지 기뻐하라
너 고난 속에서 평화하라 너 핍박 속에서 감사하라
주 너의 하나님 함께하리 승리의 주님을 찬양하라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성령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런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그 은사를 내 것인양 착가에 빠져 교만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내가 받은 은사가 전부인양 남을 무시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면 진정으로 성령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내가 받은 방언이 전부라면서 무질서하게 소리를 지른다면 우상의 신전에서 괴성을 지르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선물로 베풀어주신 그 은사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고 교회와 성도들에게 덕을 세우는 도구로 삼는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총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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