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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고린도전서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고전11:17-19)

by 똑똑이채널 2024.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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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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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희랍신화에 나오는 한 토막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헤라클레스가 길을 가다 괴물의 기습공격을 받았습니다.

헤라클레스는 그 괴물을 두들겨 쓰러뜨린 후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 4배나 더 큰 괴물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더 센 힘으로 때려눕혔는데 이번에는 더 큰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때리면 때릴수록 더 커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자 헤라클레스는 아테네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그때 아테네는 이렇게 대답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괴물의 이름은 ‘다툼’인데 때릴 게 아니라 못 본 척 놔두면 저절로 작아져 힘을 못쓴다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입니까?

다툼은 더 큰 다툼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누군가를 비난하고 그걸로 다투기보다 차라리 감싸주고 덮어주는 게 낫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주일날 나눈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도 같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말씀을 잘 전하고 영적인 비밀을 깨닫게 산을 옮길만한 큰 믿음이 있어도 실은 아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설령 유창한 방언을 못해도 상대방을 배려하고 섬기기는 사랑이 최고인 것이죠.

설령 말씀을 잘 전하지 못해도 영적인 비밀을 깨닫지 못해도 큰 믿음이 없어도 타인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사랑이 최고 아니겠습니까?

 

(적용)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는 완벽한 공동체가 아니라 불완전한 공동체입니다.

교회 안에 허물과 실수도 존재할 수 있고 나와 다른 견해를 제시하는 이들로 인해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상대의 오점과 허물을 드러내고 공격하기보다 덮어주고 감싸줘서 조화와 질서를 세워나가는 사랑이 필요한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아닌 다른 이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 좇는다고 할 때 그렇게 말씀하셨죠.

나와 함께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12:39)

예수님은 당신과 제자들을 반대하지 않는 자는 실은 진리와 생명을 함께 세워나가는 자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래서 파당이나 파벌이 일어날 때 무조건 상대를 비난하고 정죄하기보다 진리와 생명을 더 깊이 깨닫는 계기로 삼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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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고린도전서 11장 2절부터 14장 마지막 절까지는 공적예배에 대한 바울의 목회적인 답변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11장 2-16절은 예배 때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에 대한 답변이었죠.

당시의 여성들은 공적인 모임에 나갈 때 머리를 수건을 쓰고 나갔는데 남편에 대한 순종의 표시였습니다.

그것을 교회 예배 때도 예배포를 쓰고 나갔습니다.

그것은 남편이 우월하거나 월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시고 그리스도의 머리는 성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성부성자성령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동등된 분이지만 성자의 머리를 성부라고 밝힌 것입니다.

그 역시 성부가 우월하거나 월등한 차원이 아니라 질서 차원에서 말한 것이었습니다.

 

(깨달음)오늘날 교회 예배 때 예배포를 쓰는 게 합당할까요?

가톨릭에서는 미사포를 사용하고 있고 어떤 교단에서도 예배포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것을 쓰더라도 영적인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겠죠.

하지만 내가 예배포를 쓰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의 영적 질서를 받아들인다면 예배포를 쓰는 것과 똑같은 의미가 있는 것이죠.

 

그렇듯 아내는 남편을 존중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아름다운 질서를 이루는 것이죠.

그 모습을 공적인 모임에서도 지켜 행하라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이 영적인 예배포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적용)부모님과 자식의 관계도 마찬가지죠.

우리의 부모님들은 컴퓨터를 대부분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식들이 부모보다 월등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식의 역량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에서 부모님들은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바로 그런 차원에서 자식이 부모를 존중하듯 아내도 남편과 질서를 잘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가 예배포를 쓰지 않고 예배에 참여하면 그런 여자는 창녀로 남의 남편을 유혹하는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남자가 예배포를 쓰고 나타난다면 그것은 동성애자와 다를 바 없다고 했습니다.

여자가 긴 머리를 갖고 태어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주권적인 모습이요 여자가 남자의 갈비뼈를 통해 태어난 것도 하나님의 섭리이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남자가 여자 없이 태어날 수 없듯이 남자도 여자를 존중해야 함이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는 길이죠.

그런 마음과 자세로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그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는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이른바 영적인 자립인 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야 누군가에게 기대거나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설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본문)오늘 본문 17절부터 34절까지는 성찬식과 관련된 사도 바울의 답변입니다.

성찬식 역시도 영적인 무질서와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본문 17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원해)여기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모임을 칭찬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 모임이란 바로 성찬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해로움’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문을 보면 비교급으로 돼 있습니다.

너희들이 모이는데 그게 유익이 못되고 더 나쁘고 더 해악을 끼친다는 뜻입니다.

 

(본문2) 본문 18절입니다.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원해)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모이는데 실은 분쟁하려고 모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런데 ‘듣고’로 번역된 ‘ἀκούω’(아쿠오)는 현재형으로 편지를 통해 정보를 입수한 게 아니라 구두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아쿠오’가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형으로 쓰여졌다는 것은 분쟁의 소문이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의 분쟁 소식을 전해주었던 것일까요?

이미 여러 가지 소식들을 전했던 글로에의 집 사람들(고전1:11)이거나 바울에게 늘 관심을 쏟았던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고전16:17)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확실하게 질책해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어느 정도 믿는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μέρος’(메로스)인데 영어로는 ‘부분적으로’(partly)라는 뜻입니다.

물론 바울이 ‘어느 정도’라고 부연한 것은 그런 소문을 인정하기를 꺼렸다는 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믿었다’는 것은 그 소문과 함께 소문을 전해준 사람에 대한 바울의 신뢰를 나타내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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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예수님께서 요한복음 21장 마지막 부분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21:18)

그러자 베드로는 만찬석에서 예수님의 품에 의지한 요한을 보고 주님께 물어봤죠.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그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21:22)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내가 돌아올때까지 살아 있다 할지라도 너는 무슨 상관이야,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상관하지 말고 네가 할 도리를 다하면서 나를 따라야 한다, 하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의외에 반응을 보여준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21:23)

 

(깨달음)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일에 상관하지 말고 너는 너에게 주어진 일에 성실을 다하며 나를 따르면 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요한은 죽지 않는데”하는 헛소문을 퍼진 것입니다.

 

(적용)실은 그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참된 말도 비틀어서 듣기도 하고, 또 상관없는 말도 뭔가를 엮어서 말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신뢰하는 사람이라도 100% 믿지 않는 게 정상이죠.

지금 바울도 고린도교회에 분쟁이 있다는 말을 100% 믿지 않고 부분적으로만 믿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만큼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신뢰하고 싶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본문3)본문 19절입니다.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원해)여기에 ‘파당’으로 번역된 헬라어 ‘αἵρεσις’(하이레시스)는 ‘선택하다’(choice)는 뜻을 지닌 αἱρέω’(하이레오)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개인이 선택하는 어떤 견해를 뜻하는 말입니다.

물론 신약성경에서 이 말은 견해를 달리하는 자들의 배타적인 모임을 가리키는 파당을 언급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사도행전 5장17절에서 사두개인들에게 적용됐고, 사도행전 15장5절에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사도행전 24장5절과 14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이 됐습니다.

더욱이 갈라디아서 5장 20절에서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 등을 육체의 일로 간주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이 파당이라는 단어는 초대교회 당시 교회의 교리와 교훈을 적대하는 이단들에게 보편적으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깨달음)그런데 바울은 교회 내에 파당이 형성됨으로 인해 발생하는 긍정적 측면을 언급하고 그 타당성까지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헬라어 ‘δεῖ’(데이)라는 뜻이 ‘반드시 –해야 한다’는 비인칭 동사입니다.

철학에서 그 단어는 논리적이거나 과학적인 필연성을 나타날 때 또 윤리적인 의무나 종교적인 당위를 나타낼 때 주로 사용한 단어죠.

바울은 그 단어를 그리스도의 통치(고전15:28)와 최후 심판(고후5:10)과 그리스도인의 몸의 부활(고전15:53)과 같은 종말론적인 문구에서 사용했습니다.

그만큼 파당을 짓는 자들이 필연적으로 종말을 맞이한다고 할 때 사용한 것입니다.

 

(역본)그런데도 바울은 파당으로 인해 일어나는 긍정적인 측면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본문 말씀을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런 당파가 있게 될 때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깨달음)이제는 이해가 되시죠.

분쟁을 하다가 파당이 생기면 누가 옳은지 드러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파당이 생기면 부정만 할 게 아니라 긍정적인 면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교회 안에 일어난 파당이 오히려 복음의 진리로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내는 사람들을 가려내는 데 기여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다는 헬라어 ‘도키모이’(δόκιμος)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확인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파당을 말하지만 그 말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는 필수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그만큼 교회 내의 분열은 하나님 앞에서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들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기여하는 것도 된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이미 고린도전서 3장 13절에서 그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심판의 불이 임하게 되면 그 속에서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집은 타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만큼 파당이 다 나쁜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진리에 속한 자가 드러나는 긍정적인 모습도 기여한다는 뜻입니다.

 

(적용)313년에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이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교회 밖의 세력에 의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핍박을 당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공인된 그 시점부터 기독교인들끼리 서로 논쟁하고 배척을 하기 시작합니다.

소위 교리논쟁이 그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파당이 생기고 분쟁이 생기고 분파가 갈라졌죠.

 

그렇지만 그 교리논쟁의 긍정적인 면도 있었습니다.

교리논쟁을 통해 교회의 순수성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 교리논쟁으로 인해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바르게 세워진 계기였습니다.

지금 바울도 그런 파당을 통해 나누기만 할 게 아니라 긍정적인 면을 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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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지상의 불완전한 교회에서 다툼과 파당이 일어날 때 상대방의 관점을 통해 진리와 생명을 더 깊이 깨닫는 계기로 삼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딸아. 사랑하는 아들아.”

때리면 때릴수록 더 커지는 게 다툼이지만 그걸 덮어주고 감싸주면 조화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이 땅의 모든 지상의 교회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다툼도 생기고 파당이 생기지만 무조건 상대방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은 분열을 더욱 가속화하는 길이지 않느냐?”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아닌 다른 누군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때 주님과 함께 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더냐?”

고린도교회에 성찬식 모임을 두고 파당이 일어나고 있는데 무조건 비난하고 정죄하기보다 그 속에서 진리와 생명의 관점을 더 깊이 깨닫는 게기로 삼는 게 지혜로운 모습 아니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나가는데 너와 다른 견해를 지녔다고 해서 무조건 비난하고 정죄하기 보다 상대방의 관점을 배우는 계기로 삼는 게 사랑의 모습이지 않겠느냐?”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에 기독교가 양지로 나와 수많은 논쟁이 일어났지만 그를 통해 올바른 교리가 세워지지 않았더냐?”

지금도 이 땅의 불완전한 교회에서는 그런 논쟁과 다툼과 파벌이 생길 수밖에 없지만 그 속에서 더 깊은 사랑과 진리를 세워나가는 디딤돌로 삼아야 되지 않겠느냐?”

누군가 거짓과 권모 술수로 교회를 어지럽히고자 한다면 그 또한 불탄 공력처럼 다 사라지지 않겠느냐?”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영생을 취해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찬양)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자매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우리의 모임 중에 임하신 하나님 영광 아름다워라 존귀한 왕이 여기 계시니 사랑하며 섬기리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거룩한 성도들의 모임이므로 늘 사랑과 위로와 감사만 넘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다툼도 있고 논쟁도 있고 쉽게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거듭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죄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라 그렇습니다.

그런 불완전한 존재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기에 분쟁과 다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다툼과 파벌이 생길 때 상대방을 비난하고 정죄하기보다 그들의 관점을 통해 더 깊은 주님의 진리와 생명을 깨닫는 계기로 삼는 게 사랑의 모습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2:3)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2:1-2

분쟁과 다툼이 일어날 때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주님의 더 깊은 생명과 진리를 깨닫고 수용하는 큰 그릇이 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시간표 | 권성권 | 유페이퍼- 교보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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