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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인터넷에 그런 유머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교회에 잘 다니는 한 형제가 이상형인 자매를 성가대에서 만났습니다.
그는 그 자매와 결혼을 했고 아름다운 아내를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일 년이 지나자 아내가 아이를 가졌습니다.
자랑스럽던 아내가 배가 부르니까 남편은 창피하게 생각했습니다.
거기다 아이를 갖더니 그 아내가 자신에게 “사과 사와라” “배 사와라”하고 온갖 주문을 하며 귀찮케 하는 것입니다.
너무 힘에 겨워서 그 남편이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주여, 꼭 하루만 서로의 육체를 바꾸어서 지내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은 그 남편의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여자가 된 이 남편은 온갖 집안 일을 다했고, 그러고 나니 밤 10시가 넘었습니다.
이제 지친 몸으로 남편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아내가 된 이 남편은 눈뜨자마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여, 제가 정말 멍청했습니다. 제발 소원하오니, 저를 원상으로 복귀시켜 주시옵소서. 당장 남편으로 돌려주십시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빙긋이 웃으시며 “이 인간아 그건 안 되느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왜요? 왜 안되는데요?”
“너는 오늘부터 10개월 후에야 남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넌 어젯밤에 그만 임신하고 말았느니라!”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 같습니까?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질서에 순응하며 사는 게 그리스도인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나를 남자로 여자로 지으셨는지, 왜 나를 첫째로 둘째로 셋째로 태어나게 했는지 말입니다.
거기에는 모두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담겨 있으니 그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게 창조질서를 따르는 길입니다.
그렇지 않고 남자가 여장을 하거나 여자가 남장을 한다면, 또 남자와 여자가 성을 무시하거나 동성애나 레즈비언으로 산다면 그 또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시하는 행위 아니겠습니까?
(적용)그만큼 이 땅에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는 영적세력과 육적인 세력들이 참 많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인간의 인권만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나 보기에 좋은 길, 인간이 보기에 좋은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는 그 길을 좇아 살아야 하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인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고린도전서 8장 1-11장 1절까지 걸쳐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 사도 바울의 목회적 답변을 살펴봤습니다.
이것은 비단 우상의 제물에 관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아디아포라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문제를 선과 악이나 의와 불의의 차원에서 다룬 게 아니었습니다.
내가 하는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함인가 실족케 하는 가의 차원인간의 답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서 10장 마지막절까지 그 긴 내용을 다 이야기하고 바울이 결론을 맺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바울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할 때 그것을 풀어서 썼습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2-33)
바울은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지 말고 너의 유익보다 남의 유익을 위해 살도록 한 것입니다.
(깨달음)그래서 사도 바울이 11장 1절을 통해 그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바울이 남의 유익을 위해 산 것은 개인적인 생각이나 신념이 아니라 주님을 본받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본받아 살면 다른 사람도 그 사람의 삶을 본받고 살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우리도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좋아 사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전개)오늘 읽은 11장 2절부터 14장 마지막 절까지는 공적예배에 대한 바울의 목회적인 답변입니다.
그 중에서도 11장 2-16절까지는 예배 때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에 대한 답변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지금도 미사를 드릴 때 하얀 수건 곧 미사포를 쓰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알기 위해서는 2천 년 전 헬라문명 사회 관습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헬라문명사회에서 여자들이 집밖을 나가거나 공식적인 모임에 참여할 때 머리에 수건을 꼭 썼습니다.
당시 수건을 쓰는 것은 머리가 가장 높은 것이지만 나는 머리가 아니다 하는 뜻에서 쓴 것입니다.
바꿔 말해 남자가 내 위에 있다는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당시에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가렸던 것은 철저한 남성우월주의 사회체제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예배 모임에서도 여자들은 예배포를 쓰고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헬라사회에서 예배포를 안 쓰는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노예들은 쓰지 않았고 창녀들도 쓰지 않았습니다.
창녀가 수건을 쓰지 않는 것은 남자를 부르는 몸짓이자 남자를 유혹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동성애자들도 레즈이언도 예배포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회안에 은사를 받는데 남자만 받는 게 아니라 여자도 받았습니다.
여자도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병고침의 은사를 받는 것이죠.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여자들은 ‘왜 우리만 예배포를 써야 하는가?’하고 쓰지 않는 여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다 똑같은데 왜 우리만 써야 하는가 하고 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남자도 종종 예배포를 쓰고 나타난 경우도 있었습니다.
밖에서 동성애자들이 그렇게 예배당 안에 여자 역할을 하는 것처럼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자들이 전부 다 예배포를 벗었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저것들이 내 남편을 유혹하네, 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죠.
또 남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예배를 드리러 왔다면 저것들 동성애자들 아니야 하고 생각했겠죠.
그런 모습으로는 교회의 덕을 세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남성우월적인 사고방식에서 예배포를 쓰라고 하는 게 아니라 교회의 덕을 위해 쓰라고 한 것이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순종하라는 의미입니다.
(본문)이런 사전이해를 갖고 오늘 본문 2-3절 말씀을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깨달음)여기에서 바울은 다시 한 번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칭찬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새로운 주제로 들어가기 전에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꾸짖다가도 ‘형제들아’ 하면서 칭찬을 하면서 호흡을 가다듬은 것이죠.
그러면서 바울은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시고 여자의 머리는 남자다, 하고 말했습니다.
남성우월주의 사상을 말하는 게 아니고 그렇다고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관점에서 말 한 게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다, 하는 표현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성부성자성령이 한 몸의 하나님이시지만 각각의 질서와 역할을 통해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런 것처럼 남자와 여자도 본질적으로 생명의 가치가 하나님 앞에서 다 똑같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남자를 먼저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 차원에서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여자의 머리는 남자고, 그리스도의 머리는 성부 하나님이시다, 하고 말한 것입니다.
(본문2) 본문 4-10절입니다.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깨달음) 만약에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하고 예언하면 먼저는 자기 육체의 머리를 욕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욕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 되죠.
왜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남자로 창조하셨는데 이 사람은 남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격입니다.
그만큼 남자로서의 권위를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수건으로 자기 머리를 가린 것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부정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가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하고 예언한다면 어떻겠냐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여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고 평등하고 하면서 머리에서 수건을 벗는다면 그것도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자가 머리에 예배포를 쓰지 않거든 삭발을 하라고 말합니다.
아주 모독적인 말이죠.
그래서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된다고 한다면 가리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남자의 우월의식을 강조하거나 여자가 열등하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르라는 것이죠.
최초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을 때 흙으로 남자를 빚어 만들었고 당신의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을 잇게 하셨습니다.
여자는 남자가 독처하는 게 좋지 않아 그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어 돕는 배필로 만드셨죠.
그만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10절 말씀에 대한 해석은 분분합니다.
하지만 가장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예배 현장에 하나님의 영이 임재해 계심을 압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재해 계실 때 하나님을 보좌하는 천사들도 당연히 와 있는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의 현장은 천사들이 함께 임재해서 우리 각자 각자를 보고 있기 때문에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칫 오해하면 어떤 남자의 권세에 정복당하라는 말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말이 아니죠.
헬라말의 참 뜻은 ‘여자 너 스스로 머리에 예배포를 취하는 선택을 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강압이 아니라 하나님의 천사가 보고 있음을 안다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 앞에 나를 죽이는 시간이지 않습니까?
영적으로 내가 살지만 육적으로는 나를 죽이는 것이 예배이기에 그런 모습을 자발적으로 취하라는 거죠.
만약 바울이 예배포 이야기를 하면서 여기까지만 말하고 끝냈다면 이 부분을 가지고 2천년 동안 남자들이 악용했을 것입니다.
소위 남성우월주의자들이 여성을 계속 폄하하는 것으로 말이죠.
그래서 그런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11절에 이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3) 본문 11-12절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깨달음)주님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가 절대로 독립적인 존재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 상호 보완적이고 연합적인 존재로서만 서로의 가치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 혼자 독처하는 게 좋지 않아서 그를 돕는 배필로 여자를 지어 주셨습니다.
만약에 남자가 홀로 인생을 완성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면 여자를 지어주지 않았겠죠.
그만큼 남자는 여자의 반쪽짜리입니다.
서로 보완해서 완성할 수 있도록 남자와 여자를 지어주신 것이죠.
그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죠.
남자 혼자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30억 남자가 있어도 그 남자에게 아내가 없으면 안 되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물론 남편과 아내를 통해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 남편과 내 아내를 통해 나의 모난 부분을 갈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속 상한 것을 갈고 상하고 썩은 것을 도려내도록 말입니다.
그만큼 남자가 여자 없이 완성될 수도 없고 여자가 남성 없이 온전할 수가 없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4) 본문 13-16절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깨달음) 바울은 여기에서도 너희들 ‘스스로’ 생각해 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 남자를 먼저 만들고 그 다음에 여자를 만들었는데 이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이 합당치 않겠냐는 것입니다.
이 질서를 순복하며 사는 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도리이지 않냐는 것이죠.
그렇게 산다고 해서 남성우월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라 말씀 토대 위에 질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가 여자처럼 긴 머리를 갖는 것은 본성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개성이 강해서 여자처럼 머리를 긴 남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명이 시작된 이래 남자는 대부분 짧게 하고 다녔습니다.
그렇다면 여자는 왜 머리를 길게 기르고 다닙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본성이라는 것이죠.
2천 년 전 하나님을 믿지 않는 헬라철학자 에픽데토스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남자가 여자처럼 머리를 턱까지 내리는 것처럼 쓸모없는 짓이 있겠는가?”
“자연은 가능한 한 적합한 방식으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지 않았는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신이 부여한 표징들을 보존해야 하고 그런 표징들을 버려서 성의 구별들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그만큼 2천 년 전 하나님을 믿지 않고 헬라잡신을 믿는 사람들조차 남자는 반드시 머리를 짧게 하고 다니는 게 신의 뜻에 부합한 것이고 여자는 기르는 게이 신의 뜻에 부합한 것이라는 말이죠.
15절에서도 여자가 공적 모임에 예배포를 쓰는 것은 긴 머리 대신 쓰는 것이니 그 또한 하나님의 질서에 따르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16절에서 그런 논쟁을 위해 말꼬리를 잡는 자가 있어도 하나님을 믿는 우리와 교회에는 남자가 남자이기를 부정하고 여자가 여자이기를 부정하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부인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적용)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우리 삶에 적용해야 할 부분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갈 때 철저하게 하나님의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7번 나옵니다.
죄란 그래서 인간 보기에 좋은 것을 하는 것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을 좇아 순종해야 합니다.
그를 위해 철저하게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하며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남자나 여자로 태어난 것도, 집안에서 첫째 둘째 셋째 태어난 것도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 질서를 존중하지 못하고서 어찌 하나님의 섭리에 승복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유니섹스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남자가 여자처럼 하고 다니는 걸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교회 모임에서 남성들만 강화하기보다 여성도 배려하는 것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죠.
더 나아가 교회가 동성애를 옹호하거나 부추기는 것은 삼가야 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적극 권면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유익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따르고 교회의 덕을 위해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남자가 아내를 만나 배가 불렀다고 수치스럽게 여기고 과일을 사오라고 해서 여자로 바꿔 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질서를 부정하는 것 아니겠느냐?”
“바울이 고린도교회 예배 때 예배포를 쓰지 않는 여성들을 향해 예배포를 쓰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따르도록 권고하는 것 아니겠느냐?”
“만약 여자가 예배포를 쓰지 않으면 창녀취급받을 수 있고 남자가 예배포를 쓰면 동성애자로 취급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를 남자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과 여자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여자보다 남자를 먼저 지으시고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태어나게 하셔서 서로 돕는 배필로 지으신 그 뜻과 질서를 말이다.”
“네가 아내로서 남편을 존중하는 것도 하나님의 창조질서요 네가 남편으로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섭리에 순종하며 사는 것 아니겠느냐?”
“그것이 가정의 평안과 화목을 위한 길 아니겠느냐?”
“교회에서도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할 때 서로 돕는 배필로 지으신 그뜻을 교회 안에서도 잘 적용하는 길이지 않겠느냐?”
(찬양)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자매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우리의 모임 중에 임하신 하나님 영광 아름다워라 존귀한 왕이 여기 계시니 사랑하며 섬기리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요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존재들입니다.
이 땅에 남자와 여자로 태어나게 하신 그 뜻과 질서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예배 때 예배포를 쓰지 않는 여성들도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시하는 행위요 예배포를 쓰는 남성들은 동성애자로 오인받는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남자가 남성성을 지니며 여성을 보호하고 여성이 여성성을 지니며 남성을 존중하며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따르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길입니다.
지금도 이 세상 사람들은 다들 자기 보기에 좋은 길을 좇아 살지만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길을 좇아 사는 은총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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