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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고린도전서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고전11:20-29)

by 똑똑이채널 2024.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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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facebook.com/missiongraphy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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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한국 농구 스타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최초로 덩크 슛을 성공한 분인데 조동우 집사님이 그 분입니다.

 

그분이 미국 애틀란타 집에 있을 때 요로 결석처럼 허리 통증이 있어서 괴로웠는데 졸도해 버렸습니다.

그 일로 병원에 와서 수술하고 깨어날때까지 코마 상태였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심장 옆에 대동맥이 파열된 것이었습니다.

복부대동맥의 위쪽이 파열되면 뇌 쪽에 피가 고여서 죽거나 장애자가 되는데 다행히 아래쪽이 파열된 것이었습니다.

보통 그 수술은 3시간 걸린다고 하는데 그날 수술은 7시간이나 걸렸습니다.

그 수술을 하고 또 손을 봐야 할 상태라 오픈한 상태로 1주일이나 있었고 1주일이 지나서야 닫았다고 합니다.

닫고나서 열이 올라서 폐렴도 오고 황달도 왔다는데 마약에 진통제를 투여하면서 2주간 혼수상태로 지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혼수 상태에서 현실 같은 꿈을 꿨다는 것입니다.

어떤 계단을 올라가는데 중간에 물이 차 있는데 핏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힘이 없으니까 코와 입만 내고 숨을 쉬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벽에 있으면서 자신을 지켜만 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꺼내주시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힘이 없어 빠지는데 빠지면 생명이 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너무 힘들어서 주님께서 소리쳤습니다.

“주님. 제 삶을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새끼봐라. 살려놨더니 엉뚱한 소리 하네.”

뭔가 점잖하게 고상하게 말씀하실 것 같았는데 자기 삶에 맞게 이야기하셨다는 것이죠.

 

그렇게 자기 생명이 꺼질 때마다 귀전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성도들의 중보기도하는 소리였던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힘을 내서 물 위로 올라오기를 반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수술한 지 두달 만에 깨어나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그 분의 간증입니다.

 

(깨달음)그 분이 간증한 유튜브를 듣고 밑에 댓글을 봤습니다.

그랬더니 서울에서 유사한 암수술을 받을 때 그렇게 주님께서 옆에 계셨다는 분의 간증도 올라왔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연약한 누군가 사경을 해매고 있을 때 중보기도하는 게 얼마나 주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함께 신앙생활하는 성도의 연약함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그 기도가 얼마나 큰 힘이요 위로가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적용)우리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성도들을 배려하고 위로하며 중보하는 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할 일입니다.

그것이 실은 주님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나눠주신 주님의 배려요 주님의 사랑이지 않겠습니까?

그 사랑을 힘입어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다면 더더욱 함께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성도들을 돌아보고 격려하고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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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고린도전서 11장 2절부터 14장 마지막 절까지는 공적예배에 대한 바울의 목회적인 답변입니다.

그 중에 11장 2-16절은 예배 때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에 대한 답변이었죠.

당시 여성들이 공적 모임에 나갈 때 머리를 수건을 쓰고 나갔는데 예배 때도 그렇게 해야 했죠.

그것은 남편이 우월하거나 월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시고 그리스도의 머리는 성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성부성자성령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동등된 분이지만 성자의 머리를 성부라고 밝히면서 질서의 차원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니 여자들이 예배포를 쓰지 않는다면 창녀로 여길 것이고 남자가 예배포를 쓴다면 동성애자로 여길 일이었습니다.

그런 차원을 방지하고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순종하기 위해서라도 여자는 예배포를 쓰고 예배에 참석하는 게 낫다고 한 거죠.

물론 지금도 예배포를 쓰는 교단도 있지만 설령 그걸 쓰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의 영적 질서를 받아들인다면 예배포를 쓰는 것과 똑같은 격이라 할 수 있죠.

 

17-34절까지는 성찬식과 관련된 사도 바울의 답변입니다.

성찬식 역시도 영적인 무질서와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모이는데 분쟁하려고 모이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바울이 그 소식을 글로에의 집 사람들(고전1:11)이나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고전16:17)에게 전해 들었겠죠.

그렇다면 확실하게 질책해야 할 것 같은데 어느 정도 믿는다고 말했죠.

 

(깨달음)그래서 파당이 형성된 것을 바울이 알고 있는데 파당이란 단어는 알곡과 가라지처럼 종말을 맞이한다고 할 때 쓰인 단어였죠.

그런데도 바울은 파당으로 인해 일어나는 긍정적인 측면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파당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들이 반드시 드러난다면서 말이죠.

그것은 마치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의 모습과 같은 격이라고 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교회 밖 세력에 의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핍박을 당하고 죽었는데 공인된 이후에 기독교인들끼리 서로 논쟁하고 배척하는 것이었죠.

이른바 교리논쟁으로 파당이 생기고 분쟁이 생기고 분파가 갈라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통해 교회의 순수성이 확립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적용)그만큼 지상의 교회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다툼도 논쟁이 생길 수 있는데 그때 상대편의 주장을 통해 뭔가 더 깊이 있는 교훈을 깨닫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오늘 읽은 20-2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원해)20절 말씀의 헬라어 원문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한 곳에서 모여 있을지라도 이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게 아닙니다.”

함께 주님의 성찬식을 행해도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역본)그 이유가 21-22절에 있는데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어드리면 명확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져온 음식을 나눠 먹지 않고 각자 자기 것을 먼저 먹어 버리므로 어떤 사람은 배가 고프고 어떤 사람은 취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먹고 마실 집이 없습니까?

어째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합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나로서는 여러분을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깨달음)사실 초대교회에서 주님의 만찬을 한다고 할 때 애찬과 성찬으로 나뉩니다.

그 유래는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최후의 만찬에서 찾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함께 모여 사랑의 식탁을 나누셨습니다.

그것은 애찬입니다.

그런데 그 식탁에서 식사를 하시고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기념하라고 하셨죠.

그때 성찬식이 제정이 된 것이죠.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서로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서로 떡을 나누고 포도주를 나눕니다.

그것이 애찬이요 식사를 하는 것이었죠.

그러다가 서로 성찬식을 하자고 하면 성찬식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때 사람들이 음식을 가지고 와서 애찬을 하다가 성찬이 되는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여유로운 사람들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자기네들끼리 다 먹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늦게 온 사람들 곧 노예와 노동자들을 포함한 가난한 사람들은 주인이 다 끝나고 나가면 뒤치다꺼리를 하고 참석하는 것이죠.

그들은 자기 돈으로는 뭔가를 들고 올 형편이 못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늦게 일을 처리하고 온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고 앞에 온 사람들이 다 먹어 버린 게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 애찬과 성찬의 정신은 사도행전 2장 44절의 정신 곧 유무상통의 삶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많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서로 통용해서 쓰는 것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유있는 자들이 많이 가지고 와서 없는 자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하면서 배부름 자체가 목적이라면 집에서 먹고 오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교회에서 먹는 주의 만찬은 배부름 자체를 위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적용)교회는 빈궁한 자들도 하나가 되는 교회여야 하지 않냐는 것입니다.

교회는 남녀노소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가 하나가 되는 교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편적인 교회를 이루는 것인데 고린도교회는 그 의미를 상실했으니 이 문제에 관한 한 칭찬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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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2)본문 23-29절은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찬식을 바울이 고린도교회 전하여 준 것이라고 밝힌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은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전해 준 통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성찬식 때 나눈 떡이나 유월절에 먹는 떡은 무교병이었습니다.

배를 불리고자 하는 게 아니라 ‘떼어주고자’ 먹은 것이었죠.

다시 말해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찬식은 주님의 살과 피를 찢어서 떼어주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요 그것을 기념토록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그렇게 떼어주시고 찢어주셨다면 우리도 그렇게 살라는 것 아닙니까?

 

궁극적으로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 죽으심을 골고다에서 맞이하셨습니다.

왜 하필 골고다일까요?

골고다 언덕 모양이 해골처럼 생겼기 때문에 또 사형집행장소로 쓰였다는 것 때문에, 마지막으로 아담의 묘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이유가 어찌됐든 간에 그 해골의 정수리에 예수님의 보혈이 흘러내립니다.

그 흘러내린 피에 빨갛게 물든 해골이 살아나는 것이죠.

주님의 피로 생명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이 예수님의 보혈로 살아난다는 것을 기억하고 성찬식에 참여한다면 우리의 삶이 새롭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 성찬식을 나의 식탐을 채우는 방편으로 파발을 만드는 일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그 뜻과 가르침에 따라 그 애찬과 성찬식을 주님 오실때까지 전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주님은 2천년 전에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지만 성찬식은 과거 예수님의 고난과 미래 재림하는 것을 오늘 나의 삶에 현재화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를 깨닫고 성찬식에 참여한다면 어떻게 장난스럽게 참여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파벌을 조장하는 모습으로 참여할 수 있겠냐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의 몸을 분별치 못하고 성찬식에 참여하는 자는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 잘 분별하고 성찬식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본문3)오늘 읽은 30-34절 말씀을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깨달음)교회에서 애찬과 성찬식을 행할 때 약한 자와 병든 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연약한 너희를 위해 예수를 내어주는 것을 기억한다면 너희도 애찬과 성찬에 참여할 때 연약한 자에게 너희의 것을 내어주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죠.

그런데도 만약 배가 고프다면 집에서 먹고 오는 게 낫다는 것입니다.

왜 집에서 먹고 오라는 것입니까?

교회에까지 와서 남을 실족시키면 되겠냐 하는 것이죠.

 

(적용)그렇기에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도 진정한 성찬의 사람들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매일매일 외적인 성찬식을 행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말씀 안에서 매일매일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의 살과 피가 나를 살리셨고 내가 그것을 먹고 마심으로 내 생명이 유지된다는 것을 안다면 내 삶은 달라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죠.

더욱이 우리가 성찬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약한 자를 배려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한 자란 경제적으로 궁핍한 자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면에서든 나보다 연약한 자라면 주님의 몸으로 생각해서 배려하는 게 성찬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 없이 살아간다면 성찬의 무질서 속에 사는 것이요 주님의 살과 피와 무관한 자로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모습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주님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우리에게 서로에 대해 배려하며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복부대동맥파열로 죽어가던 조동우 집사를 살려주신 하나님은 지금도 시러펗게 살아계신 분이지 않느냐?”

그가 죽음의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를 아는 사람들의 중보기도에 그가 깨어나고 일어나는 은혜를 덧입은 것 아니더냐?”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애찬과 성찬을 행할 때 그렇게 연약한 자를 배려하지 않고 가진 자들만 먹고 마시는 일을 일삼지 않았더냐?”

그렇게 종들과 노예를 배려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주님의 몸을 이룰 수 있겠느냐?”

주님께서 성찬식을 제정하시면서 당신의 살과 피를 떼어주신 것을 기념한다면 교회에서도 소외받는 사람이 없도록 배려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연약함에 처할 때, 누군가 연약함에 처할 때, 그를 위해 중보기도하는 게 얼마나 큰 위로요 격려인지 알 수 있지 않느냐?”

그러니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데 소외되거나 상처받는 사람이 없이 상대방을 배려하는 걸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겠느냐?”

너도 교회에서 뭔가를 먹고 마실 때 가난하고 연약한 자도 함께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것이 골고다 언덕에서 피를 흘려 생명을 찢어주신 주님의 성찬이지 않더냐?

주님의 몸된 교회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답게 타인을 배려하며 살 때 더 아름답게 세워지지 않겠느냐?”

 

(찬양)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 있네 위로를 받을 것이요

온유 한자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겠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저희 배부를 것이라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 받겠네 마음이 청결 한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 천국이 저희 것이라

내게도 주소서 내가 복을 받기 원하네 오 내주여 주소서 아멘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조동우 집사님이 복부대동맥파열로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지만 그를 아는 이들의 중보기도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교회에 연약한 자가 힘들어할 때 돌아보고 배려하고 관심을 갖고 나누는 삶도 그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린도교회에 종과 노예를 두고 사는 이들이 먹을 것을 가져와 끼리끼리 먹고 마신다면 그렇지 못한 자들이 얼마나 소외당할 일이겠습니까?

그렇게 하고서도 주님의 성찬을 나눴다면 그것은 주님의 살과 피를 모독하는 행위이지 않겠습니까?

골고다 언덕의 주님과 살과 피를 찢어주신 주님의 은혜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면 누군가 연약한 자에게 그 생명을 나누고 베풀 때 어찌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은총의 주인공으로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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