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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오늘 점심때 밥을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봤습니다.
국회 본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 위헌적 비상계엄 선포 내란행위’와 관련해 질문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국민의 힘 윤상현 의원이 나와서 법무부 장관에게 질의하는 모습을 보고 참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윤상현 의원은 비상계엄 선포 내란 행위를 통치행위에 빗대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른바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가 ‘고도의 정치행위’와 같다는 뜻이었습니다.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 당시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에 돈을 송금했는데 처벌치 않는 것도 통치행위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고 있던 우원식 국회의장이 결국은 한 마디 하고 나섰습니다
“대통령의 명에 의해서 군대가 국회에 총을 들고 들어왔다.”
“그것을 통치행위로 이야기한다는 게 같은 국회의원으로서 말이 되느냐”하고 윤상현 의원을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깨달음)제가 윤상현 의원의 발언을 듣고 깨달은 게 그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분별하고 올곧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발목을 잡고 어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로 인해 본질을 호도하고 더 어수선하게 만드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지금 우리나라 대외 신뢰도가 추락하고 경제도 폭망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하루 빨리 회복시키려고 한다면 국정을 정상화시켜야만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를 위해 국회의원들이 길을 찾고자 모여서 내란 선포행위에 대해 질문하고 있고 잘잘못을 가려 바른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죠.
(적용)문제는 이런 모습이 2천년 전 고린도교회에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각자 받은 은사 그 중에서도 방언의 은사를 내세워서 내가 최고다 네가 최고다 하면서 서로 우월감에 도취돼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다투는 문제로 바울에게 답변을 구했는데 바울은 그 은사를 주신 분은 성령님이고 다양한 은사를 주신 이유는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자기 유익을 주장하기보다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 공동체가 하나될 방향을 위해, 주님께서 주신 은사로 잘 섬기도록 한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역배)고린도전서 1장 1-9절은 도입부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에 대한 문안과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인사가 담겨 있습니다.
1장 10절부터 6장까지는 고린도교회의 현황문제에 대한 내용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분열과 다툼에 대해 훈계도 하고 책망도 하고 권면하죠.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7장부터 15장까지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질문에 대한 바울의 목회적인 답변입니다.
자기네들끼리 풀 수 없는 신앙적인 문제에 대해 바울에게 질문했고 바울은 그 답변을 한 것이죠.
그 중에 고린도전서 7장은 결혼에 대한 목회적인 답변이었습니다.
8장과 9장과 10장은 우상에 대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 대한 답변이었습니다.
11장부터 15장까지는 공적 예배와 관련된 교인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습니다.
그래서 11장은 예배 때 예배포를 여자들이 쓰는 게 어떤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바울은 질서의 차원에서 쓰라고 했죠.
이어서 예배 시간에 성찬식을 하는 그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바울이 답변을 했습니다.
이제 12장부터 14장까지는 다른 은사의 사용에 대한 목회적인 답변을 바울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읽은 것을 토대로 할 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각자 받은 은사를 가장 큰 것으로 여기며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 방언에 대한 다툼이었죠.
자신들이 받은 방언이 최고 우월하다는 입장 말이죠.
거기까지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공적 예배시간에도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문제죠.
그런 차원이라면 누가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어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모든 은사 가운데 최고인 사랑에 대해서 권면했습니다.
오늘 읽는 14장 1-15절까지는 방언도 좋은데 예언의 유익한 점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1-5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원해)여기에 ‘예언’은 헬라어로 ‘프로페테오’(προφητεύω)입니다.
신적인 영감에 의해 말하다는 뜻입니다.
그 어근인 ‘프로페테스’(προφήτης)는 구약의 예언자와 세례 요한과 같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말하는 대변자라는 뜻입니다.
한자로는 맡을 예 자에 말씀 언 자입니다.
무당처럼 점을 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가 그 맡은 말씀으로 시대와 상황을 해석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죠.
위기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맡은 말씀으로 위로하고 교만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맡은 말씀으로 겸손케 하는 사람 말이죠.
한 마디로 말하면 오늘날의 예언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그 말씀으로 설교하고 선포하는 설교자라고 할 수 있겠죠.
(깨달음)그런데 왜 방언보다 예언의 유익성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방언은 하나님께만 하기 때문이고 예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방언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가 깊어질 수 있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언으로 공적인 기도때 기도한다면 누가 알아들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기도에 집중도 못하고 혼란만 가중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예언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맡은 말씀으로 시대와 상황을 해석하고 성도들이 힘들어할 때 위로하고 권면하는 것이 실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죠.
더욱이 아주 잘 나가는 사람이 교만하다면 하나님의 맡은 말씀으로 겸손하도록 선포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예언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바르게 살도록 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우는 것이고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방언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칭하기 때문이고 예언은 하나님의 맡은 말씀으로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기 때문에 교회에 덕이 된다는 것입니다.
설령 다 방언을 한다 할지라도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고 바울이 말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죠.
(원해2)여기에 덕을 세운다는 헬라어 ‘오이코도메오’(οἰκοδομέω)는 집을 세운다(to build a house)는 뜻입니다.
움막에 살던 사람이 작은 집에서 큰집으로 옮기는 것은 그만큼 삶의 질이 달라지는 것이죠.
(깨달음)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언을 하는 것은 그처럼 삶의 질이 달라지는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으로 나를 비추고 그 말씀으로 시대와 상황을 해석해서 바른 길을 좇아갈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런 예언의 말씀이 없으면 대부분 욕심과 탐욕을 좇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예언의 말씀이 내 인생의 집을 바르게 짓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적용)그래서 바울은 다 방언을 말하면 좋겠지만 특별히 예언을 하면 더욱 좋겠다고 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방언은 개인의 유익을 끝나지만 하나님의 맡은 말씀으로 시대와 상황을 해석해서 성도들을 바르게 인도한다면 그보다 더 값진 유익도 없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은 사람이 계속 세상길로 빠져갈 때 그 길이 사망의 길이라고 맡은 말씀으로 선포해서 그 영혼이 돌아선다면 그보다 더 유익된 일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계속 승승장구하는 사람이 자기 곁에 사람도 이제는 안 보이듯 교만에 빠져들어 있다면, 그 성도를 향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선포한다면, 그 영혼을 살리는 길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방언도 좋지만 예언을 통해 성도들에게 덕과 권면과 유익을 주기 때문에 예언하도록 하라고 하는 것이죠.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 방언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집에서는 물론이고 교회에서도 하는데 예배 중에도 한다면 말썽이죠.
마치 그것은 이방 신전에서 하는 것처럼 무아지경에서 큰 목소리로 하면 성령님께서 더 크게 역사하실 줄 알고 하는 것이죠.
만일 그렇게 한다면 통역이 필요한 일이고, 그렇지 않다면 말씀을 맡아 예언하는 자보다 결코 나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방언보다 교회 공동체에 훨씬 더 유익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방언도 좋지만 예언을 통해서 공동체의 유익을 끼치는 은혜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국회에서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찾고자 하는데 엉뚱한 소리를 하는 국회의원도 있는데 교회도 그런 이들이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
“2천년 전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각자 받은 방언의 은사가 최고라고 우월감에 도취되었는데 방언은 개인의 유익이 크지 않더냐?”
“하지만 예언은 맡은 말씀으로 시대와 상황을 해석하여 성도를 올곧게 인도하고 믿음의 길로 안내하는 공동체이 유익함이 크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성령님은 너의 신앙 경륜과 성품에 맞게 다양한 은사를 주신 분이니 그 은사를 주신 주님의 기쁨이 되는 길을 좇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 은사로 너의 자랑거리나 너의 우월감에 취하지 말고 어떤 경우에도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길로 섬겨야 하지 않겠느냐?”
“바울도 방언을 하는 게 좋지만 개인의 유익보다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더 강조하는 예언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더냐?”
“하나님의 맡은 말씀으로 연약한 자에게는 위로와 격려를 보내고 교만한 자에게는 겸손함을 주문하는 예언의 기능이 교회 공동체에 훨씬 유익하니 말이다.”
“너도 다양한 은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대와 상황을 내다보고 누군가에게 그 말씀으로 위로하는 예언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더욱더 기뻐하지 않겠느냐?”
(찬양)내게로 부터 눈을 들어 주를 보기 시작할 때 주의 일을 보겠네
내 작은 마음 돌이키사 하늘의 꿈 꾸게 하네 주님을 볼때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낄 때
내 삶은 주의 역사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
성령이 나를 변화시켜 모든 두렴 사라질 때 주의 일을 보겠네
황폐한 땅 한가운데서 주님 마음 알게 되리 주님을 볼 때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느낄 때
세상은 주의 나라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
주님의 영광 임하네 주 볼 때 주님의 영광 임하네 주 볼 때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낄 때
내 삶은 주의 역사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경륜과 인격의 경륜을 보시고 각양 각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를 베푸십니다.
그 은사는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에 나의 자랑거리나 나의 우월감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은사 중에서도 방언은 개인의 유익을 위함이지만 예언은 공동체의 유익이 된다고 바울이 말합니다.
방언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더욱 개인적으로 깊어질 수 있지만 공적인 예배때까지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한다면 오히려 무례하고 무질서한 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방언보다 성도가 힘을 잃었을 때 위로하고 또 교만할 때 겸손토록 맡은 말씀으로 예언하는 것이 성도들을 유익케 하는 일이라고 답변한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맡지 않았다 해도 말씀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고 또 겸손케 된다면 그것이 더 큰 유익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듯 어떤 은사든지 간에 개인의 유익을 넘어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그런 은총이 충만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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