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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마태복음 1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날 예수님은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셨죠.
인간 예수님께서 성자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께서 혼자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갔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보고가 모세와 엘리야를 본 적이 있었냐는 것입니다.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 두 사람의 영체가 하늘에서 내려오자 곧장 모세와 엘리야를 알아 보게 된 것입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사건입니까?
지상에서의 모습과 영적인 세계의 모습에서의 차이를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이 지상에서는 부분적으로 아는 것들이 영원한 세계에서는 온전하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행하는 방언도 예언도 그 모든 지식도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 세상의 육신의 몸을 벗어나는 순간 이제는 완전하게 알게 되는 날이 임한다는 것이죠.
(적용)그렇기에 겸손이 무엇입니까?
내가 아는 것이 결코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거들이 지극히 제한적이고 부분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을 깨닫고 겸손하게 살 때 다른 모든 것들도 품고 사랑하고 수용하며 살 수 있는 것이죠.
그런 점을 깨닫는 자가 자기 것을 최고로 여기지 않고 언제나 남의 것도 존중할 수 있는 법이죠.
바로 그것이 사랑이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본문)오늘은 사랑의 영원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 8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원해)여기에서 ‘떨어진다’는 헬라어 ‘에크핍토’(ἐκπίπτω)는 ‘소멸한다’(to fall out of) ‘실패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소멸하지도 않고 실패하지도 않는다는 말이죠.
그만큼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왜 사랑은 영원하다고 말하는 걸까요?
그 이유는 대단히 간단합니다.
요한일서 4장 7-8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만큼 내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신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소멸되지 않고 실패하지 않는 것이죠.
(적용)만일 주님의 말씀대로 내가 상대방을 사랑했는데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내 사랑해도 사랑을 받지 않으면 사랑의 열매가 없어지는 것입니까?
그런 경우에 사랑은 실패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죠.
실패한 것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입니다.
상대가 내가 베푸는 주님의 사랑을 거부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비록 그는 거부했을지라도 그 기간 동안 사랑이신 주님과 깊어졌기에 사랑을 베푼 나는 실패한 게 아니죠.
(전개)그 다음 부분도 마찬가지죠.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깨달음)이것은 사랑과 대비되는 은사들입니다.
예언, 방언, 지식, 이것은 유한함을 말하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폐할 때가 옵니다.
특별히 예언이란 점쟁이가 점을 치듯 말하는 게 아니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가 그 말씀으로 시대와 상황을 분별해서 위로와 권면과 책망을 하는 게 예언이죠.
그래서 지금은 불확실하지만 하나님 앞에 서는 날 모든 방언도 예언도 지식도 필요하지 않게 되죠.
영이신 하나님 앞에 서는데 그것들이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그때도 사랑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하나님나라에서 유일한 존재요 동기와 목적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본문2)그래서 9-12절이 더욱 명확하게 그 부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깨달음)예전에 미국의 부시가 이라크를 공격할 때 그 전쟁의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이라크의 대량살상 무기를 폐기시키는 것이었죠.
미국중앙정보국은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하고 보니까 살상무기가 없었죠.
그래서 전쟁을 하고 이라크를 점령하면 미국이 뜻대로 중동의 질서를 개편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전혀 뜻대로 되지 않았죠.
그것이 바로 부분적으로 안 것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미국 대통령만 그렇겠습니까?
우리나라 대통령도 마찬가지죠.
어제 저녁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가 불과 몇 시간만에 해제했습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내다보고 한 일 같지만 해프닝으로 끝난 것과 다름 없습니다.
(적용)그만큼 우리는 육신적으로 유한하고 연약한 존재 아닙니까?
예언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죠.
말씀을 다 안 것 같아도, 그 말씀으로 시대와 상황을 다 해석하고 적용한다고 해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온전한 것이 올 때, 다시 말해 종말의 날을 맞이하면 우리의 모든 육체가 벗어지는 되죠.
그때는 부분적으로 아는 것들이 온전해지는 것이죠.
그것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죠.
부자는 매일같이 파티를 열고 하고 싶은 대로 사는데 나사로는 먹을 게 없어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걸 먹었죠.
이제 두 사람이 죽고 나사로는 하나님 나라로 갔고 부자는 음부로 갔죠.
그런데 부자가 보는 순간에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죠.
그 부자가 아브라함을 알아봤겠습니까?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아 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턱 보니까 바로 알아보는 것이죠.
이것이 영원한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완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분적으로 아는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전히 아는 것입니다.
(전개)그래서 11절에 장성한 사람과 어린 아이를 비교하여 일깨워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렸을 때는 자기 것을 고집하다가 나이가 들면서 부족함을 알기 때문이죠.
사랑도 어릴 때는 유치하지만 어른이 되면 그 유치한 사랑을 버리고 남을 배려하게 되는 것이죠.
어릴 때는 자기 중심적으로 살다가 어른이 되면 상대방을 수용하게 되죠.
그래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상대를 수용하고 사랑이 깊어지는 걸 말하죠.
내 중심적인 방식에서 이타적인 방식으로 변화되고 깊어지는 것 말입니다
그것은 온전한 것이 올 때도 마찬가지죠.
여기에서 온전한 것이 온다는 것은 주님의 재림과 종말을 말하는 것이죠.
이 세상의 육신적인 삶을 끝내고 영원한 영적인 세계로 진입할 때를 말하는 것이죠.
그때는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 않고 모든 것들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것이죠.
하나님에 대해 안다는 것도 지금은 희미하지만 육체를 벗는 순간에 영이신 하나님을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것이죠.
(깨달음)그래서 13절에 결론이 나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왜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믿음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소망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소망인 것이죠.
그렇기에 믿음과 소망은 모든 근거와 목적이 사랑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결론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이죠.
그 사랑을 믿는다면 몸 된 주님의 지체로서 서로 사랑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소망한다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처럼 분열과 다툼을 일으킬 수가 없다는 것이죠.
비록 어린 아이의 신앙인 때는 자기 주장을 하고 자기 것을 최고라 할 수 있지만 성숙해지면 상대방을 수용하며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것이 사랑이요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믿음과 소망 안에서 그런 사랑의 공동체가 되라고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세계, 그 영원한 세계에 있는 것처럼 지금 육신의 삶을 살고 있는 이 땅에서부터 영적인 성숙한 자로서 서로 서로를 품고 수용하며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어린 아이의 모습을 버리고 온전한 사랑의 삶을 사는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눌 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그들을 본 적이 없지 않더냐?”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모세와 엘리야인줄 금방 알아봤겠느냐?”
“이 세상에서는 알고 행하는 것들, 이 세상에서 하는 방언이냐 예언도 지극히 유한한 것들임을 일깨워주는 것 아니더냐?”
“주님의 재림의 날과 영원한 영적 세계에 입성하는 날에는 부분적으로 알던 것들이 보다 완전하게 알게 되지 않겠느냐?”
“이 세상에서 행하는 방언도 예언도 실은 다 부분적인 것들이요 육신의 세계를 벗어나는 그 날에는 완전한 것들을 알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이 받은 방언과 예언을 최고라고 하지만 실은 영원한 세계에서 보면 유치하고 유한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지 않겠느냐?”
“그 모든 것들이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한 것인데도 최고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얼마나 어설픈 것인지 그 날에 분명히 알게 되지 않겠느냐?”
“그렇기에 오고 오는 세상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남아 있을 사랑을 상대방을 존중하고 수용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에 그 사랑만이 영원히 남기 때문에 말이다.”
(찬양)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자매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우리의 모임 중에 임하신 하나님 영광 아름다워라
존귀한 왕이 여기 계시니 사랑하며 섬기리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들은 유한하기 짝이 없는 것들입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유창한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한다고 할지라도 영원한 천국에서 보면 지극히 어설픈 것들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에 내가 받은 은사를 최고로 여기며 으시댈 게 아니라 겸손한 모습으로 상대방을 품는 사랑이 제일임을 기억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만이 하나님의 속성이요 그 사랑만이 영원한 천국에서도 영원토록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사랑의 삶을 살 때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은혜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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