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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자기에게도 사람에 대한 판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 판단을 절대화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판단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죠. 바울은 절대적인 판단, 곧 최종적인 판단을 하나님께 맡겨드렸습니다. 그 분만이 절대적인 판단의 주관자이기 때문이죠. 그런데도 고린도교회는 자신들의 판단을 절대화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내가 참된 일꾼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에 대한 판결을 유보하는 것이죠. 그래야 사람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죠.
오늘 6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다시금 ‘형제들아’하고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그만큼 자기 자신을 떠나 모두를 생각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라는 말이 나오는데 헬라어 원문은 맨 먼저 나옵니다. ‘이 일’이란 사람에 대한 인간의 판단을 절대화하지 않는 일이죠. 그 일에 바울이 아볼로와 함께 본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웠고, 아볼로가 그 뒤에 가서 양육을 했죠.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서로들 무슨 교회를 위해서 의논한 것도 없고, 교류도 없었죠. 그런데도 바울은 아볼로에 대해서 어떤 비판이나 판단도 하지 않지 않는 것으로 본을 보여줬다는 것입니다. ‘본을 보여줬다’는 헬라어 말은 ‘적용했다’는 뜻입니다. 사실 바울과 아볼로는 배경도, 지적수준도, 모두 다르겠죠. 그러면 바울이 보기에 아볼로의 아쉬움도 있었겠지만 어떤 판단을 절대화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바울과 아볼로의 관계에 적용시켰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뭐라고 말합니까?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이른바 선을 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적용시켜 너희들이 배우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하고 싶은 말이 있고, 학도 싶은 것이 있었겠죠. 하지만 자신과 만나는 사람들이 자신으로부터 본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절제하고 신중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걸 위해 대적하거나 교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여기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첫째 질문이 무엇입니까?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고린도교회 성도들아, 누가 너희를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구별해 주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었기 때문입니까? 아니죠.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해 주신 까닭이죠.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둘째 질문이 무엇입니까? “네가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너희들이 누리고 있는 것 중에 너희들이 태어날 때부터 들고 온 게 무엇이냐, 하는 뜻이죠. 오늘 내 심장이 뛰는 것도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기 때문 아니냐는 것이죠.
셋째 질문은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그런데 왜 너희들은 본래부터 너희 능력의 결과인 양 너희 것으로 자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별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온갖 은혜와 은사를 다 받았는데, 어느 날부터 그것이 본래 자기 것인양 자랑하고 절대화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대립과 분열이 일어난 것입니다.
8절입니다.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고린도에 갈 때 고린도는 상당한 문화와 물질적으로 부요한 삶을 살고 있었죠.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보기에 미숙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미숙아들이 영적으로 부요하고 영적으로 배부른 자인것처럼, 영적인 완숙한 자들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영적인 자만에 빠졌기에 더 이상 선생 곧 바울의 가르침이 필요 없다고 여기는 것이죠. 그러나 바울은 너희들이 왕노릇하는 것은 왕노릇하는게 아니라, 진리 안에서 왕노릇 하는 사람들이 되어서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왕노릇이 무엇인지 9절을 통해 자기 삶으로 이야기합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내가 생각하건데’, 그리스도인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 인생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이 시대에 대해서,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할 책임과 의무와 역할에 대해서 말씀 앞에서 생각하며 사는 게 습관화돼야 합니다. 생각하면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죠. 그렇게 사는 게 영적인 미성숙자로 살게 되는 거죠. 바울은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장 밑바닥에 처하게 하시고,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서 구경거리가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구경거리’란 극장에서 광대나 맹수하고 싸우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깔깔대지만 그 위에 서 있는 사람은 기가 막히는 것이죠.
그래서 10절에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우리는 사도들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너희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이 지금 헬라사람들의 미련한 것을 좇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죠? 헬라인들처럼 지적 수준과 능력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미련스럽게 여겼는데, 지금 그들이 미련하다고 여기는 그 길을 사도들이 걷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더더욱 강함되시는 하나님 앞에 약한 자로 산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왜 하나님의 강함을 필요로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삶이 11절에 나옵니다.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지금까지 바울과 사도들은 먹을 멋 못 먹고,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 없이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또 12절에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수고한다’ 것은 목회한 걸 말합니다. 먹지 못하고 매까지 맞아가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수고를 하면서도 ‘손으로 일을 한다’ 곧 텐트를 만들어 팔면서 자급자족했다는 것이죠. 또 모욕하는 자들에게 축복하고, 그들에게 복을 빌어줬다는 것이죠. 그 뿐만 아니라 13절에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여기에서 ‘세상의 더러운 것’은 쓰레기와 오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만물의 찌꺼기’는 옷이나 몸에 낀 때죠. 그렇게 우리 곧 사도들이 이 세상의 쓰레기나 때 같은 취급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로부터요? 자칭 지혜있다는 헬라인들에게서 말입니다.
바울이 그 고백을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바울이 왜 그런 삶을 살았는지 알아야 되겠죠. 왜 바울이 핍박받고 능욕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 길을 피하지 않았습니까? 바울이 미련해서요? 아니죠. 욕하지만 참고 비방하는 자를 격려하는 것은 그가 선택한 인생입니다. 왜 그런 인생을 선택했습니까? 그 길을 걸어갈 때 진리의 왕이시오 생명의 왕이시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그가 깨달았고, 생각하면서 살았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본문을 통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세상의 것으로 자신들이 절대자인 것처럼 왕 노릇 하려 했지만 그것은 참된 왕노릇이 아니라는 것이죠. 진정한 왕 노릇은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왕 노릇하게 해 주셔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2천년이 지난 지금 누가 왕노릇하고 있습니까? 그들입니까? 헬라인들입니까? 아니죠.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남긴 글을 통해 그가 주님 나라에서 왕노릇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되죠.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이 땅에서 살아 있는 동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로로 살아갈 수 있는 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 길은 이 세상의 것을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떠나라는 게 아니죠. 수도원이나 기도원으로 들어가라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의 것을 누리고 살되 이 세상의 것만을 목적으로 삼지 말라는 뜻이죠. 이 세상의 것들을 절대화하고 왕노릇하면 공중에 흩날리는 인생으로 끝나버립니다. 바울처럼 영원한 나라에서 왕 노릇할 수 있는 주님의 도구로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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