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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고린도전서

하나님의 나라(고전4:14-21)

by 똑똑이채널 2024.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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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말씀보다 세상의 것으로 자랑하며 왕 노릇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해 주었죠. 왕은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해서 왕이 되는 게 아니라, 진리와 생명의 왕 곧 만 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통해 온전히 역사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드릴 때, 그분으로 인해 왕노릇을 하게 되는 것 말입니다. 그런 삶을 위해 사도 바울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만물의 찌꺼기 같은 삶에도 주저하지 않았죠. 바울이 미련해서 아니라 바로 그것이 진리 안에서 왕노릇하는 것임을 바울은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이죠.

바로 그런 실상 앞에 부끄러워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4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자기 글을 읽고 부끄러워할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마음을 미리 읽었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자식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권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6장 5절에서는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하고 말합니다. 서로 옳다면서 법정에 나가 송사하는 이들에게 그렇다는 것입니다. 돌처럼 굳어버린 이들이 있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수치를 느끼든, 수치를 가려주든, 그 동기는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자식을, 내 이웃을, 내 교우가 잘못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꾸짖을 수 있죠. 하지만 사랑의 선을 넘지 않아야 정제된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선을 넘어서면 모든 말이 폭력이 되고 상처만 되기 때문이죠.

15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여기에서 ‘스승’이라고 하는 말은 헬라말로 ‘가정교사’입니다. 옛날에는 공인된 학교가 없어서 선생이 집에서 공부를 가르쳐죠. 그런데 가정교사는 그 학생의 인격을 책임져주거나 미래를 책임져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대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죠. 지금 고린도교회에 스승이 많이 있다고 하는 자칭 스승들은 가정교사와 같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다 자기 유익을 위해 일하지만 바울은 ‘아버지의 심정으로’ 섬겼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의 미래와 행복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사람이죠. 바울이 그런 심정으로 섬겼다는 것이죠. 바울이 어떻게 아버지와 같은 심정으로 섬겼다는 것입니까? 몇 해 전 ‘복음으로 낳은 것’이 그렇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참된 사랑은 상대를 위해 할애하는 시간과 정비례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몇 해 뒤에 에베소에 있을 때에도 바울은 그 마음이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함께 하는 것을 알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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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바울이 이런 표현을 많이 썼습니다. 그래서 교만하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본받으라고 할 때 무엇을 본받으라고 한 것입니까? 내가 나 자신을 놓고서 왕 노릇한 게 아니라 진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삶을 통해 온전히 역사하실 수 있도록, 세상 사람들이 만물의 찌꺼기라고 비하하는 삶마저도 조금도 게의치 않는 나를 본받으라는 것이죠. 누구를 높입니까?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은 바울의 교만이 아니라 주님께 사로잡힌 바울의 사랑고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각자 우리의 삶이 세상을 향한 쇼 윈도우임을 기억하며 살아야 하죠.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 때 누구든지 들여다보게 만드는 것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들은 세상의 빛이다”하고 말씀하셨죠. 예수님을 목표로 삼는 너희 삶을 들여다보게 하라는 것이죠.

17절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이로 말미암아’는 너희가 나를 본받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그삶을 살도록 도와주기 위해 신실한 신앙의 아들 디모데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갔을 때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납니다. 그리고 지금 바울의 파송을 받아 디모데가 고린도교회로 가게 된 것입니다. 이 젊은 청년이 신실한 주님의 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바울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라는 말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게 있죠. 나를 만나고 있는 이들 중에 몇 사람이나 신실하게 변화되고 있는가, 그것이 내가 쇼윈도의 삶을 살고 있는 증거죠. 정말로 형편없는 삶을 살던 이가 변화되었다면, 우리가 신실한 삶을 살고 있는 증거죠. 또 하나 생각할 게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평을 할 때 ‘신실한 아들’이라고 밝혔죠. ‘신실’이란 말이 피스티스로서 ‘믿음’과 똑같은 말입니다. 지금 디모데가 신실한 사람이라는 걸 눈으로 보는 것이죠. 그만큼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백부장을 향해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눈에 보이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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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디모데를 고린도에 파견했습니까?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하는 나의 생활 방식을 여러분에게 되새겨 줄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모든 교회에서 내가 가르치는 그대로 말입니다.” 디모데는 고린도교회에 가서 바울이 어떻게 살았는지, 되새기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보내,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이 되라고, 그 삶을 되새김질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주는 모델로 살아야 하는 것이죠.

18절입니다.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스스로 교만하였다’는 말은 대장간의 풀무로 부풀리는 것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렇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왜요? 바울이 그들에게 가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주님과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관계를 일깨워주기 위함이죠. 이른바 그들이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않기 때문에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는다면 주님의 말씀을 좇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보다 자신들을 더 높게 여기기 때문에 교만하게 산다는 것이죠.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 같지만 나보다 주님을 더 높이 두면 교만하게 되죠.

어떤 목사님이 형제들과 제주도에 갔는데, 주일을 맞이해 작은 교회에 들어가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설교한 내용이 그 예배에 참석한 그 목사님의 설교를 그대로 읽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주님이 그 자리에 있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마찬가지입니다. 내 삶의 매일매일의 현장 속에 주님이 계심을 인정하지 않으면 나는 교만하게 되는 것이죠.

 

19절입니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나는 교만한 자의 말을 듣지 않고, 그의 능력을 알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만한 자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 중요하기 때문이죠. 우리의 능력은 어디에서 드러납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 그렇죠. 그러나 그것은 자기 능력대로 살 수가 없는 것이죠.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야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 수 있습니다. 그만큼 겸손한 사람만 말씀을 좇아 살 수 있다는 점이죠.

20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헬라어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 안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만이 아니라 이 땅에 말씀을 좇아 사는 삶을 통해 그 나라가 확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21절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바울이 매를 들고 갈까?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갈까? 말합니다. 정말 바른 길을 가면 온유한 마음으로 격려할 수 있고, 그릇된 길로 간다면 매를 가지고 갈 수도 있죠. 그렇다면 누가 선택케 합니까? 고린도교회 교인들이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어떤 삶의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매로 치실 수도 있고, 온유한 사랑으로 격려할 수도 있죠. 그것은 철저하게 우리 삶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게 아니라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그 삶, 손과 발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넣고 사는 자들 말입니다.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확장하는 도구가 될 수 있고, 진리의 쇼윈도가 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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