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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장 1-9절은 고린도교인들에 대한 사도바울의 인사와 감사가 담겨 있고, 고린도전서 1장 10절부터 4장 끝까지는 고린도교회 최고의 현안 문제였던 분열과 대립에 대한 사도바울의 지적과 권면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 살펴 볼 고린도전서 5장과 6장은 고린도 교회의 도덕적 무질서 대한 바울의 권면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구원의 기쁨을 경험했지만 세상에 속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것들을 좇으면서,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다보니 분열과 다툼이 생겼던 것이죠.
오늘 1절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타락에 대해 지적하면서 음행에 대해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은 ‘심지어’라는 ‘할로스’(ὅλως)가 먼저 나옵니다. 그것은 ‘심지어’라는 뜻과 함께 ‘확실하게’란 뜻도 있습니다. 너희 중에 음행이 있다는 게 확실하다는 것이죠. 그것도 이방인들도 행하지 않는 음행, 곧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범하는 음행 말입니다. 십계명의 제 칠계명인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꼴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간음에 대해 엄격하실까요? 간음은 자기 육신의 몸 안에 죄를 새기는 일이기 때문이죠. 고린도전서 6장 18-19절에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도둑질이나 폭행은 몸 밖에 행하는 것인데, 음행만은 몸 안에 새기는 죄악이라는 것이죠. 그것이 성전된 몸을 허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법 자체를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그만큼 사랑으로 지키려 하는 분입니다. 둘째로 간음 자기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죽이는 일입니다. 잠언서 6장 32절에 “여인과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상함과 능욕을 받고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되나니.” 간음 곧 음행하는 자들은 자기 영혼을 망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엄히 금하신 것이죠. 셋째로 간음은상대방의 육과 영을 죽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죠. 마지막으로 간음 곧 음행은 자신과 상대는 물론이요 자기 가족과 상대방의 가족까지 완전히 죽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장 4절에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그래서 1절 말씀을 통해 또 하나 생각할 게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범죄는 반드시 공개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음행을 저지른 남자가 고린도교회 교인인데, 상대는 딴 동네 사람이 아니라 자기 계모죠. 그 남자가 그 일을 위해 얼마나 은밀한 장소를 찾아겠습니까? 그런데 그 일이 지금 에베소에 있는 바울에게까지 들려온 것이죠. 그만큼 공개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왜죠?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이고, 공개적인 수치를 통해 다시는 동일한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은밀하게 죄를 짓고, 그것이 들통이 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즐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들통이 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르신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돌아설 기회를 주고 계신 것이죠. 그 인내의 시간이 끝난 지점에는 모두 공개적으로 드러내시겠죠. 히브리서 12장 7-8절에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적자이기 때문에 잘못을 드러내 세워주신다는 점이죠.
본문 2절입니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에베소에 있는 바울에게까지 소문이 날 정도로 그 사람의 음행이 떠들썩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누구도 그걸 지적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죠. 왜요? 그들이 교만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들을 더 위에 두고 있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음행을 저지르지 않았다 할지라도, 다른 분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스스로 순결함을 상실한 것입니다. 교회의 순결성을 상실한 것 말입니다. 교회가 순결성을 상실하면 세상 집단과 다를 바 없게 됩니다. 세상은 순결한 영혼들을 통해 새롭게 될 수 있는 것이죠.
이 사건을 놓고 바울은 3-5절을 통해 말합니다.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3절과 4절과 5절에 ‘영’이 있습니다. ‘세 영’이 다 헬라어로는 ‘프뉴마’인데, 3절과 4절은 ‘마음’으로, 5절은 ‘영혼’으로 번역할 수 있죠. 그래서 바울은 ‘이미 판단하였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몸은 에베소에서 있지만, 마음은 이미 고린도교회에 가서 음행한 자를향해 죄를 범했다고 선언했다는 뜻입니다. 죄에 대해 단호한 바울의 입장이죠. 왜죠? 그것이야말로 그의 영혼을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들의 모임은 세상의 동창회 같은 모임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순결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 주었다’하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 공동체에서 출교시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출교시키고 제명시키면 끝일까요?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과 상치되는 것 아닙니까? 중요한 것은 바울이 출교를 시키라고 할 때 그냥 출교를 말한 게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사탄에게 내어 주었다”하고 말합니다. 인간적인 힘으로 출교시키는 게 아니라 예수의 능력과 함께 출교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5절 하반절에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서 ‘육신은 멸한다’는 말을 어떤 주석가들은 육체적으로 병을 얻게 한다는 뜻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육신’은 헬라어로 ‘사르크스’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구원의 기쁨도 알고, 성령의 인치심의 감격은 맛보았지만, 여전히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아직까지 신령한 단계로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자, 자기감정과 본능대로 나아가는 자들 말입니다. 그래서 육신을 멸한다는 것은 건강을 해치거나 질병을 말하는 게 아니라 육신을 섬기는 그 삶을 폐하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영적 성숙자로 서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출교시키라는 동기가 사랑이고 그 목적도 사랑이기에 그것이 그를 영적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워 주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바로 세워준다는 것,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6절에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여기에서 ‘누룩’은 죄를 표현한 것입니다. 적은 죄가 온 사방에 퍼지는 것이죠. 또 7절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주님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았으니, 묵은 누룩을 버리라는 것이죠. 묵은 누룩이 곧 육신에 속하여 살던 옛 삶을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8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삶을 추구한다는 것, 그것을 두 단어로 표현하면 ‘순전함’과 ‘진실함’입니다. ‘순전함’이란 ‘엘리크리네스’(εἰλικρινής)입니다. ‘태양’을 뜻하는 ‘헬레’와 ‘판단하는’의 ‘크리노’의 합성입니다. ‘순전하다’는 것은 ‘태양의 빛 아래에서 부끄럼이 없는 것’입니다. 빛 속에서도 두려움 없이, 부끄럼 없이 사는 사람이죠. ‘진실함’이란 ‘알레페스’(ἀληθής)로 ‘감추지 않는 것’입니다. 태양 앞에서 부끄럼이 없는 사람 곧 감추지 않는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죠.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교회가 참되고 진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이 사랑의 사람이 돼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랑의 사람이 될 때 서로를 포용하고 잘못된 사람도 바로 세워 줄 수 있다는 것이죠. 징계와 출교의 목적도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가 순전함과 진실함을 지향하며 사는 게 중요합니다. 이 세상은 그런 자들에 의해 새롭게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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