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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교회 교인들의 특성은 구원의 기쁨과 감격은 경험했지만 성령님을 쫓아 살지 않는 것, 육신의 소욕을 쫓아 사는 것, 곧 영적인 미숙아 상태에 있는 것이었죠. 그들은 저마다 자기 것들을 자랑하며 왕노릇 했습니다. 각자 자기 자신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 남을 판단하고 비판했죠. 그러니까 도덕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문제를 바울이 계속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여기에서 ‘너희’란 곧 고린도교회 교인들입니다. ‘일’이란 ‘프라그마’(πρᾶγμα)로서 ‘문제’ ‘다툼’을 뜻합니다. ‘다른 이와 다툼이 일어난 문제’란 교회 밖의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교인들 사이에 문제가 된 걸 말합니다. 그 문제를 가지고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한다’는 것은 교인 개개인의 문제를 세상 법정에 가서 송사를 벌인다는 것이죠. 그런 것을 ‘구태여’(τολμάω), 당돌하게(막5:13) 감히(요21:12) 고발해서 되겠느냐, 하는 것이죠. 교인과 교인 사이의 문제를 세상 법정까지 가지고 가는 것은 아주 당돌한 일이자,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라는 것이죠.
바울이 왜 그렇게 보는 것입니까? 2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2절을 읽기 전에 한 가지 짚어야 할 게 있습니다. 바울이 세상 법정을 ‘불의한 자들’이라고 했는데, 바울은 세상 법정의 권위를 무시한 자였을까요? 그런 의미가 아니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는 관점과 대비해서 말한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그들이 불의한 자라고 말이죠. 바울은 세상 법정의 권위를 부정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읽었던 사도행전 24장의 벨릭스 총독의 법정이나 사도행전 25장의 신임 베스도 총독의 법정을 바울은 존중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네로 황제의 법정에까지 상소한 것이었죠.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세상 법정의 송사를 벌여서는 안 되는 걸까요? 아니죠. 공적인 문제에 걸려 바깥으로 위협을 받는다면 법의 도움을 받아야 하죠. 바울이 로마의 황제의 법정에 상소한 것도 그 까닭이었죠. 회사를 경영하는데 누군가 불의한 방법으로 회사에 위해를 가고 모든 직원들의 생존 문제가 걸렸다면 그리스도인들도 송사를 벌여야 하죠. 그런데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교인과 교인 간의 ‘개인적인 문제’를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2절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진리와 생명의 가치를 추구하는 자들로서 오늘날의 정치와 경제와 교육과 문화적인 측면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사회의 잘못을 지적하고 나가야 할 방향을 바르게 제시해주는 자들이죠. 그런데 2절 하반절에서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하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면, 교회안의 개인 대 개인의 문제는 지극히 작은 일이지 않더냐, 그런데도 그 문제를 판단할 수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크고 작은 일들을 판단하고 분별하는 안목에 비한다면, 교회 내의 교인들 사이에 일어난 일은 문제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걸 왜 해결치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본문 3절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세상만 판단하는 게 아니라, 천사도 판단하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천사는 모든 천사가 아니라 ‘타락한 천사들’ 곧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 심판 날에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둬질 천사들”(유1:6)입니다. 악한 영들이죠. 그들이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심판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왜 그런 말을 합니까? 너희들은 세상을 판단할 뿐만 아니라 악한 천사들까지도 판단할 정도로 그리스도 안에서 고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 ‘세상 일’ 곧 ‘비오티코스’(βιωτικός)란 일상사 속의 사소한 일입니다. 그 사소한 일이 교인과 교인 사이에 일어난 분쟁이라는 것이죠. 너희들이 세상도 판단하고, 악한 천사도 판단할 능력이 있으면서, 왜 교인들 사이의 사소한 일을 해결치 못해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가게 내버려두느냐,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본문 4절에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교인 사이에 사소한 다툼을 가지고 교회 안에 어린 아이와 같은 자를 재판장으로 세워서야 되겠느냐, 하는 뜻입니다. 또 너희들이 가볍게 해결해도 될 일을 왜 세상 법정의 도움을 구하고자 하느냐, 하는 뜻도 있습니다. 어떤 쪽으로 해석하든,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가지 말라는 뜻이죠.
왜죠? 5절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지금 바울은 너희들이 수치를 느끼게끔 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썼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서는 부끄럽지 않게 하려고 썼다고 하지만, 본문은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썼다는 것입니다. 수치를 알면 바른 것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죠.
7절입니다.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가 법정에 다투므로, 허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허물’로 번역된 헬라어 ‘헤테마’(ἥττημα)는 ‘패배’라는 뜻입니다. 너희들이 세상의 법정까지 가서 다투는 것으로 너희들은 이미 패배한 자라는 것이죠. 교인과 교인이 싸우는 문제를 법정까지 가지고 가서 싸운다는 것은 영적 패배요, 도덕적 패배요, 신앙의 패배라는 것이죠. 그리스도는 세상을 이기신 승리자이신데, 그 분을 믿는 너희들이 법정까지 가지고가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패배자라는 것입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상대방을 위해 지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져 주는 것이 주님의 이름을 세상 속에서 드높이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형제로다’하는 것은 싸우는 당사자이기도 하고, 그들을 방관하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들이 싸우고 있는데, 저들이 그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까지 가지고 가려는데, 그걸 빤히 보고 있는 너희들이 진정으로 형제 자매들이냐, 하는 뜻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불을 보듯 할 수 없다는 거죠.
9-10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불의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교인과 교인 사이의 문제를 법정에까지 가도록 방치하는 것, 그것은 형제 자매된 고린도교회 교인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그런 불의함은 음란이나 우상숭배나 간음이나 남색이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일이나 술 취한 것이나 모욕을 주며 살고 갈취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죠. 교인과 교인 사이의 문제로 법정에까지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 그것이 그런 죄악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본문 11절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하는 말은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우기 이전에 믿지 않던 자들이 있더니, 하는 말인지, 아니면 교인들 간에 싸우고 다투면서 세상 법정에까지 가던 그들이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바울이 1장부터 지금까지 오면서, 바울은 중요한 대목마다 항상 강조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정체성입니다. ‘너희들은 어떤 자들이냐. 너희들은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전된 몸이지 않느냐? 그런데 왜 너희들 모두가 하나님 보시기에 불의한 일들을 하려고 하느냐?’ 하는 뜻입니다. 그들의 정체성을 재확인시켜주고 인정해 주면서, 그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다시금 제시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5장과 6장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권면입니다. 오늘 6장은 교인들 간의 다툼을 세상 법정에 가서 송사하는 것이 문제지만 그것만을 문제삼는 게 아니었죠. 교우들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수수방관하게 되고, 그것은 다른 불의한 죄와 똑같다는 것이죠. 그만큼 서로가 성령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길로 나아가도록 격려하고 사랑하고 세워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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