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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5장과 6장은 고린도교회 교인의 도덕적 타락을 사도 바울이 질타하고 권면한 내용입니다. 그들이 어느 정도로 타락했는지 5장부터 상세하게 밝혀줬죠. 5장 도입부에 음행에 관해 지적했는데, 어떤 성도는 아버지의 첩과 음행한 자도 있고, 5장 11절에선 탐욕을 부리는 자, 우상숭배하는 자, 술 취한 자, 속여 빼앗는 자도 있다고 했죠. 갖가지 도덕적인 타락의 양상이 다 있었죠. 6장 도입부에서는 교회 안의 성도 사이의 문제로 세상 법정의 소송에 가지고 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걸 사도 바울이 질타했죠. 물론 그들 당사자만 질타한 게 아니라 같은 교인들이 방치하고 있는 것, 왜 함께 품고 화해하고 사랑하도록 세워주지 못했는지를 일깨워준 것이죠. 그런 모습들이 실은 함께 불의를 행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는 뜻으로 바울이 권면했습니다. 너희들은 서로가 성령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길로 서로 격려하고 세워가야 한다고 말이죠.
오늘 본문 12절입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여기에서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하는 것은 ‘엑세스티’(ἔξεστι)로 ‘용납되었다’ ‘합법화되었다’는 뜻입니다. 당시에 영지주의자들과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이 있었죠.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해서 생각하여, 영혼 앞에 육신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아무런 죄 의식 없이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았죠. 오늘날 구원파 집단과 같죠. 또 하나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인간 존재의 두려움은 쾌락으로 해결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게 구원이라고 말이죠. 그래서 본능적인 쾌락을 좇아 살아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죠. 바로 그런 일들조차도 그리스도인에게 ‘가하다’, 곧 용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중요합니다.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처럼 모든 걸 하고 살 수 있지만 신앙의 유익이 아니라면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에 방해요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말입니다.
여기에서 ‘유익하다’는 ‘숨페로’(συμφέρω)는 ‘함께 지탱한다’, ‘함께 운반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와 연관을 맺고 함께 살아갑니다. 그처럼 나한테 모든 게 가능하지만 더불어 사는 상대방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 절제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한다”, ‘얽매이지 아니한다’는 헬라어 ‘엑수시아죠’(ἐξουσιάζω)는 ‘지배를 받다’는 말입니다. 누구에게든지 종속돼서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꽃뱀이나 제비족이 되어서, 그날 밤은 즐겼을지 모르지만, 다음날이 되면, 돈을 요구하고 신고한다는 위협을 받죠. 서서히 그 사람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죠. 이것은 돈도 권력도 명예도 그럴 수 있는 것들이죠.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이 가능하다 해도 자기 자신은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게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두 가지 원칙을 우리에게 제공해 줍니다. 하나는 모든 것이 가능한 자유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원칙은 내가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 나를 지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 자유를 함부로 사용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 나 자신을 동여매며 산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부분을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 잘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본문 13절입니다.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배에 음식을 채우는 것, 하나님께 폐하신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종말의 때가 오면 그런 것들이 필요치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들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어서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몸’은 헬라어로 ‘소마’(σῶμα)입니다. 보통 ‘육체’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사르크스’인데, 그것은 고깃덩어리와 같은 말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소마’는 단순한 고깃덩이가 아니라, 영혼을 지닌 전인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다운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죠. 인간다운 인간의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주를 위한다는 것입니다. 썩어질 고깃덩이로만 있다면 얼마든지 음란을 범하겠지만, 전인적인 몸은 주님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거죠.
그리고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신다”는 말은 무얼 의미할까요? 14절에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몸으로 오셨고, 부활하실 때에도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승천하실 때에도 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우리의 몸을 다시 살리신다는 뜻입니다. 종말의 날에 신령한 몸으로 말입니다. 무엇을 강조하는 것입니까? 몸의 중요성이죠. 영지주의자들이나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이 말하는 형편없는 고깃덩어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몸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당신을 누구를 통해 보여주십니까? 우리 자신을 통해서죠.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고린도교회 성도들아, 너희들의 손과 발, 너희들의 몸을 통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화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줘야 할 화면인 너희의 몸으로, 우리의 몸으로, 어찌 창기의 지체를 만들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창녀와 합하는 자,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몸을 놀리는 자는 그 육체가 ‘사르크스’, 곧 고깃덩어리로 끝나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7절에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하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죠. 정말로 하나님의 지체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쇼윈도로 살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썩어 없어질 고깃덩이로 전락시키며 사는 것 말이죠. 우리는 주님과 연합하는 영적인 존재로 승화시키는 자가 되어야 하죠.
18절입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여기에서 ‘피하라’는 단어는 ‘퓌고’(φεύγω)인데 ‘도망가라’는 뜻입니다. 내가 죄를 이길 수가 없을 때는 도망가는 게 상책입니다. 요셉도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는 걸 이길 수 없어서 옷을 벗어놓고 도망갔던 것이죠. 왜 그렇게 도망가라는 것입니까?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 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하기 때문이죠. 다른 죄는 몸밖에 죄를 짓는 것이지만 음행은 자기 몸 안에 죄를 짓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3일전에도 음행은 자신과 타인의 몸 안에 죄를 짓는 일이요, 그의 가족식구들에게까지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일이 되죠. 더욱이 그의 ‘소마’ 곧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데 커다란걸림돌이 되기 때문이죠.
19-20절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 3장 16절 말씀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향해 지성소인 ‘나오스’로 곧 ‘성령의 전’이라고 말입니다. 성령님께서 내 소마 안에 빛으로 거하시면 나는 오늘도 성령의 전으로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내 모습은 볼품없지만, 나의 사지백체를 통해 진리의 빛이 온 세상이 비춰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그런 쇼윈도로 살면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왜 바울이 5-6장의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나의 몸은 주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나의 몸 자체가 그리스도의 지체요, 나의 몸 자체가 성령의 전이라는 걸 말입니다. 그걸 안다면 모든 것이 내게 가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하지 않다면, 더불어 사는 사람을 실족케 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절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몸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진리의 등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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