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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절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마땅히’라고 하는 ‘후토스’(οὕτωs)는 ‘그러므로’입니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이전과 이후를 연결하는 것이죠. 지난 시간에 살펴 본 게 무엇이었습니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요 그리스도 아래에 교회가 있는데, 그 아래에 바울 아볼로 게바 그 모든 게 있다고 했죠. 교회는 세상 질서의 중심으로 세운 하나님의 몸된 지체인데, 바울 아볼로 게바가 뛰어나다고 해도 교회 곧 너희들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너희들이 절대시하느냐, 하는 뜻이죠.
그래서 “그러므로”하면서 시작하는데, ‘그러므로’ 사람 곧 고린도교회는 ‘우리’ 곧 바울 아볼로 게바와 같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여겨라’하는 명령형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모두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라는 것이죠. 여기에서 일꾼이란 헬라어로 ‘휘페레테스’(ὑπηρέτης)입니다. ‘아래쪽’을 뜻하는 전치사 ‘휘포’(ὑπό)와‘노를 젓는다’는 ‘아랫소’란 동사가 합쳐진 것입니다.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사람이 휘페레테스입니다. 로마 전쟁 때 노 젓는 사람은 배 밑창에 들어가 있죠. 더 중요한 것은 배 밑창에 노 젓는 사람은 방향을 알 수가 없고, 속도도 모릅니다. 북 치는 고수가 치는 속도에 따라 노를 젓죠. 그들은 도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만큼 자기 생명과 자기 인격을 선장에게 맡기는 자들이죠.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갈릴리 어부들들이 주님의 부활 이후에도 자신들의 인생 방향을 자기들 뜻대로 하려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코 주님의 역사를 이룰 수는 없었겠죠.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가 다 휘페레테스라고 말이죠. 그런데 왜 너희들이 그들을 절대화하려고 하느냐, 하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을 위한 휘페레테스죠.
그런데 바울이 일꾼은 일꾼인데, 누구의 일꾼이라고 말합니까?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강조하죠. 내가 너희를 섬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를 섬길 때 그리스도의 휘페레테스로서 섬긴다면, 누군가 나를 무시하거나 자존심 상하게 해도 상처받지 않게 되는 것이죠. 더욱이 상대가 소망이 없어 보여도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하고 말합니다. ‘비밀’이란 ‘미스테리온’(μυστήριον)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7절에도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증언”을 비밀 혹은 신비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 자체가 신비요 비밀이라는 것이죠. 개는 사람의 일을 볼 때 전부 미스테리일 수밖에 없죠. 비행기를 타고, 높은 건물을 짓는 것 모두가 말이죠. 왜죠? 우리 인간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저급한 짐승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차이는 개와 우리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죠. 창조주와 피조물, 영원자와 유한자 사이의 차이이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하나님의 진리 자체가 인간에게는 미스테리일 수밖에 없는데, 그런 우리에게 진리의 비밀을 은혜로 계시해 주셨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겠습니까?
그렇다면 바울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휘페레테스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된 것까지도 내 능력이나 내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죠.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높여야 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는데, 왜 너희들끼리 사람을 높이며 싸우고 있느냐, 하는 뜻입니다.
2절입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하나님의 종으로, 사명을 맡은 자로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 것입니다. ‘구할 것’이란 헬라어 ‘제테오’(ζητέω)는 수동태입니다.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계시의 은혜가 주어진 자는 충성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충성하는 자들에게도 다툼도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왜죠? 저마다 자기 척도로 충성을 하기 때문이죠. ‘충성’이란 가운데 ‘중’자에 마음 심자, 또 성자는 말씀 언 번에 이룰 성자죠. 충성의 절대적인 기준은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충성할 때 사람 사이에 다툼이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죠.
더 중요한 것은 충성이란 헬라어 단어가 ‘피스티스’입니다. 피스티스는 ‘충성’ ‘믿음’ ‘신실’ 모두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신실로 바꿔도, 또 충성으로 바꿔도 똑같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을 위해 충성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좇아 믿음이 깊어지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 삶이 신실하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왜죠?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바울이 무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고린도교회 교인들도 똑같이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는 은혜를 받았음에도, 말씀을 좇아 충성하지 않았던 것이죠. 말씀안에서 신실하지 않은 것이죠.
3절입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여기에서 ‘매우 작다’는 말은 최상급입니다. ‘제일 작은 일’이라는 뜻이죠. 너희들이 나를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은 하찮은 일이기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평가를 절대화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고린도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교인들이 서로 사람에 대해 판단하면서, 자신들의 판단이 절대적이라고 단정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인간의 판단을 절대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한다”고 말한 것이죠. 내 자신에 대한 판단을 절대화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4절에 풀어서 설명합니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여기에서 ‘깨닫지 못한다’는 말은 과거에서 지금까지 내 자신을 자책할 일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기 자신이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완전무결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 뜻이었다면 교만한 자죠.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팔삭둥이 같고, 흠이 많고, 참으로 모자란 자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직분을 감당하는 데 있어서 신앙양심에 거리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실은 그와 같은 고백을 하는 자가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참 부족하지만 내게 맡겨주신 자식들 앞에 부족함이 없이 살아 왔습니다.’ ‘나는 여러 가지로 어리석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일터에서, 내가 큰 이득은 못 낸다 해도 그리스도인 비즈니스맨으로 신앙양심에 거리낌 없이 일해 왔습니다.’하는 것 말이죠.
그런데 바울은 더 중요한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내가 내 신앙양심상 내 직분을 감당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해도, 그것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받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그것 때문에 의로운 게 아니라, 주님의 은혜 때문에 의롭다 함을 얻고 있기 때문에 내게 맡겨준 직분을 감당코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내가 의롭게 살았다고 판단할 분은 주님이시기에 나도 나를 판단치 않는다는 거죠.
5절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여기서 ‘때’라고 하는 것은 ‘크로노스’과 ‘카이로스’가 있습니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가는 일직선상의 시간이 크로노스이고 위에서 내려오는 시간 곧 주님의 재림과 더불어 오는 종말론적인 시간이 카이로스죠. 오늘 본문은 ‘카이로스’입니다. “때가 이르기 전”에 하는 말은 주님의 종말이 오기 전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의 판단을 절대화하지 말라는 뜻이죠. 그리고 다른 사람을 향한 판단도 절대화해서 비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죠? 인간이 인간을 평가하는 것은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평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평가하시는 것은 무엇으로 합니까? 우리가 감추고 싶어 하는 것으로 하죠. 그것을 하나님은 다 드러내시죠. 그것까지도 절대적인 평가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지금 잘못한 게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그것을 절대적인 것처럼 단정했다는 점입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의 절대적인 판단을 무시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자기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휘페레테스가 될 수 있었겠냐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주님의 날이 임할때까지, 어떤 위치에 있든지 주님을 위한 휘페레테스들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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