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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핏값으로 얻는 것이죠. 그것은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죠. 오직 성령님 안에 있는 자만 그 지혜가 보이는 것이죠. 성령님의 조명 밖에서는 십자가가 미련한 것이자 거리낌의 대상입니다. 사도 바울이 2장을 통해 이야기한 게 그거죠. 너희는 십자가 구원 안에 있으면서도 성령님의 조명 밖에 있다는 것 말이죠.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를 목표로 하기 보다 자기중심적인 인간들이 되다보니 대립하고 분쟁한다는 거죠.
오늘 3장 1절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1장 1절 이래로 ‘형제들아’하는 말이 다섯 번째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신령한 자’와 ‘육신에 속한 자’가 나옵니다. 신령한 자란 성령님을 힘입어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영적 성숙자’를 가리킵니다. 헬라어로 ‘프뉴마티코스’입니다. 그와 상반되는 말이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물론 2장 14절에 “육에 속한 사람”이 나오죠. 그럼 무슨 차이일까요? 육에 속한 사람은 ‘프쉬키코스’로서 영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세 구성 요소로 설명합니다. ‘프뉴마’ 곧 영, ‘프쉬케’ 곧 혼, 셋째로 ‘소마’ 곧 육체입니다. 육체를 제어하는 것은 정신이죠. 그런데 정신을 다로 생각하는 사람이 ‘프쉬케’입니다. 그러나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받지 않습니다. 왜죠? 영적인 채널을 아예 부정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자기 정신으로 자기 육체를 제어하면서 완전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죠. 그에 비해 육신에 속한 사람은 ‘프쉬키코스’로서 영을 부인치 않습니다. 영을 알고 성령님의 기쁨도 압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좇아 사는 게 아니라 여전히 육의 본능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영에 속한 자로 성령님의 지배 속에 살지만, 또 다른 사람은 영을 알지만 육신의 지배 가운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아침에는 신령한 자로, 밤에는 육신에 속한 자로 살 수도 있죠. 우리는 다 믿음의 사람이고 하나님의 사람일 수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린 아이처럼 유치한 신앙의 수준에 있는 사람도 있고, 영적인 성숙자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죠. 그래서 우리 스스로 자신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 성숙자인 사도 바울이 육신에 속한 자 곧 어린이 아이와 같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형제들아’하고 대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보다 약한 자를 품고 사랑하며 사는 모습이죠. 우리에게도 담겨 있어야 할 주님의 마음이라는 사실입니다.
2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지금 어린 아이 같은 유치한 믿음을 지니고 있어서 ‘젖’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젖과 반대되는 밥을 먹는다는 것은 신령한 자들이죠. 젖과 밥은 무엇을 뜻합니까? 젖은 먹기에 좋은 것, 곧 듣기 좋은 말씀만 듣는 것이죠. 그에 비해 밥은 젖에 비해 딱딱한 것이죠. 내게 거북스러운 말씀도 받아들이는 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는 말씀은 잘 듣지만 구원받은 이후 성화의 삶으로 나아가는 말씀도 듣는 자가 신령한 자죠. 젖을 먹는 사람은 새롭게 주어진 신분의 감격에만 안주하는데, 밥을 먹는 사람은 신분에 걸맞는 수준을 추구하죠.
3절입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젖만 먹고 밥을 먹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 ‘육신에 속한 자’라는 것이죠. 그들은 ‘자기중심적’입니다. 타인과 더불어 사는 의무를 소홀히 하게 됩니다. 그들의 삶에는 시기와 분쟁이 당연히 따르게 되죠. 그러니 어찌 성령을 좇는 자이겠느냐, 하고 말하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시기와 분쟁의 순서인데, 항상 시기가 먼저 오고 분쟁이 뒤따릅니다. 일평생 경계해야 할 것은 ‘시기’죠. 우리말 ‘시기’로 번역된 헬라어 ‘젤로스’인데 ‘열심’입니다. 열심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내 기분을 위한 열심히면 반드시 시기와 분쟁으로 이어지죠. 그만큼 위로 하나님을 위하고 아래로 타인을 위한 열심을 낼 때 분쟁보다 통합과 조화와 일치가 생기는 것이죠.
고린도교회에 시기와 분쟁의 양상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4절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하는 말은 너희가 육을 좇는 사람이 어찌 아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파당을 만든 뒤에, 아볼로와 바울의 이름을 들먹이며, 자기 세력을 확장하기 때문이죠.
5절에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여기에 ‘사역자’로 번역된 헬라어는 ‘디아코노스’입니다. 신약성경에 20회 쓰여 있습니다. 세 번을 ‘집사’로 번역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집사하면 직분화 되고 계급화돼 있습니다. 나머지 16군데는 ‘일꾼’, ‘종’, ‘사환’으로 번역돼 있습니다. 본래 ‘디아코노스’는 일꾼입니다. 바울이 이야기한 거죠. ‘고린도교회 여러분,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고 말이죠.
그런데 ‘디아코노스’는 ‘-통하여’ 하는 전치사 ‘디아’와 ‘먼지’를 의미하는 ‘코니스’가 합쳐진 말입니다. 옛날에 일꾼들은 주인이 시키는 일에 따라 청소하고, 추수하고, 창고에 물건을 가져오죠. 그때 일꾼들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펄펄 날리게 되죠. 그것이 일꾼입니다. 일꾼이란 하나님 앞에서의 먼지죠. 하나님께서도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하고 말씀하셨죠. 흙이 히브리어로 ‘아파르’인데 실은 티끌인 동시에 먼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드리고 있어도 100년 뒷면 먼지로 끝나버립니다. 조금 큰 먼지, 조금 깨끗한 집의 먼지, 하는 차이죠. 그런데 조금 깨끗한 먼지가 빈민촌의 먼지보고 ‘너는 어떻게 그렇게 더러울 수 있냐’하면 얼마나 가관이겠습니까?
6-7절입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농부가 씨를 뿌리고 물을 뿌리는 것 대단히 중요하죠. 그러나 아무리 농부가 땀 흘리며 일해도 하나님께서 햇빛을 주지 않으면, 비를 내리지 않으면, 끝이죠. 지금 바울은 자기나 아볼로나 먼지와 같이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들 앞에 Nothing이 아니라 뭔가 Something이라고 생각할 때 교만해지고 문제가 발생되죠. 나는 먼지, Nothing이라고 생각할 때 은혜의 도구가 되는 거죠.
그런데 바울은 심었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후 아볼로는 물을 주었죠. 가르쳤습니다. 둘 다 과거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다, 이것은 미완료형입니다. 현재진형형을 말합니다. 바울은 세웠고 아볼로는 가르쳤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자라게 하신다는 것이죠. 그걸 잊지 말라는 거죠.
8절입니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한 가지이나’ 하는 말은 ‘똑같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일 차체는 똑같지만 일에 임하는 자세에 따라 하나님께서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왜 어린아이와 같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상급을 이야기한 걸까요? 그들이 하나님의 상급을 고대하지 않기 때문이죠. 왜요? 하나님의 상급을 동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 것이죠. 히브리서에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반드시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9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우리’란 아볼로와 바울입니다. 아볼로와 나는 하나님의 먼지로 동료일 뿐이라는 거죠. 그리고 너희들은 “하나님의 밭이요 집이니라” 밭은 농부가 뿌린 걸 소출해 줍니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뿌리든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만큼 젖만 먹지 말고 밥도 먹어야 한다는 것이죠. 또 ‘하나님의 집이다’하는데, 집 주인은 그 집에 사는 사람이자 마음대로 개종할 수 있습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다뤄지라는 뜻입니다. 딱딱한 밥을 먹는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동역자들이 되어야 한다’, ‘밭이 되어야 한다’, ‘집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현재형’입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동역자요 밭이요 집이지 않느냐, 그만큼 고린도교인들의 바탕을 인정해주면서, 그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현재형으로 권고하는 거죠.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신분에 안주하지 않고, 그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는 신령한 하나님의 밭이자 집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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