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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해 각자 일한 대로 상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면서도 신령한 자로 살지 못하고, 젖이나 먹는 육신에 속한 자로 산다고 했습니까? 바울이 생각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상급을 열망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죠. 이 세상을 살고 난 다음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받을 상급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말입니다. 그런 상급을 도외시한다면 하나님을 믿지만 실은 이 세상이 다가 되는 것이죠. 그러면 이 세상의 부귀영화로만 끝나고 맙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신령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고, 영적으로 성숙한 삶도 못 하는 것이죠. 바울이 하나님의 상을 언급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신령한 삶과 상급과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여기에 ‘터를 닦아 두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몇 해 전에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교회를 세운 걸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무슨 대지를 구입했다거나 건물을 사 두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저 교회 곧 사람들을 세웠다는 뜻이죠. 이 세상 모든 목회자 곧 전임자는 터를 닦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세운 터를 아볼로와 같은 후임자가 이어받는 것이죠. 후임자는 그 위에서 든든하게 세워가면 되는 것이죠.
그런데 바울이 어떻게 터를 닦았다고 말합니까?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했다고 합니다. 건축자란 헬라어로 ‘아르키텍톤’(ἀρχιτέκτων)입니다. 모든 목공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말입니다. 요즘 용어로 치면 현장 소장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의 터를 아마추어처럼 하지 않고 현장 소장처럼 세웠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지혜롭게’ 말이죠. ‘지혜롭다’는 말은 ‘숙련되다’ 혹은 ‘능숙하다’는 뜻입니다. 능숙하고 숙련된 현장소장처럼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의 터를 닦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바울이 그렇게 능숙한 건축자로 교회를 세웠다는 표현이 어찌 보면 자기를 자랑하고 과시하는 모습같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게 아니죠.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능숙한 건축자가 되어야 함을 밝혀주기 위함입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가 속한 교회를 일구는 동시에, 나 자신을 일구는 자여야 하죠.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의 숙련된 것으로만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죠. 바울은 그래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교회를 능숙하게 세웠다고 고백하는 거죠.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니니라.” 이게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전임자와 후임자를 이어주는 말씀이죠. 후임자는 전임자가 세운 그 터 위에, 그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조심해서 세워나가도록 하라는 말이죠. 일반적으로 교회를 보면 전임자 다음에 후임자가 오는데, 두 가지 경우에 분란이 생깁니다. 전임자의 임기가 끝났음에도 퇴장하지 않는 경우가 그렇죠. 담임목사가 새로 왔는데도 원로목사가 떠나지 않을 때 말입니다. 두 번째 분란은 새로운 후임자가 말썽을 피울 때입니다. 이를테면 전임자가 쌓아 놓은 터를 모두 부정해 버리는 경우가 그것이죠. 하나님은 한 개인 개인을 긴 쇠사슬의 고리를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모세라는 고리에 여호수아가 엮어지도록 하셨고, 사울이라는 고리에 다윗을 새롭게 엮어주셨습니다. 그만큼 후임자는 이전의 고리를 이어나가는 자가 되는 게 중요하죠. 그래야 분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울이 지금 그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닦아 놓은 터 위에 집을 지을 때, 어떻게 집을 지어야 할지 조심하라는 것 말입니다.
그만큼 바울은 무슨 집인지, 어떤 구조인지, 전임자가 어떻게 주님의 은혜 가운데 세웠는지,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11절에서 다시금 밝혀줍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교회의 터는 공동체이든지 개인이든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닦아 둔 터도 예수 그리스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 터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뜻이죠. 바울이 왜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습니까? ‘이 닦아 둔 것 외에’하는 말은 본래 헬라어로 ‘곁에’라는 말입니다. ‘닦아 놓은 곁에’ 다른 터를 닦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해서 그 곁에 내 터를 닦는 자, 나를 자랑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교인이든 목회자든,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있으면서, 그 옆에 자기 야망이나 욕망을 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집을 짓는 재료가 여섯 가지가 나오죠. ‘금, 은, 보석’은 불변하는 것이고, ‘나무, 풀, 짚’은 언젠가는 소멸되는 것들이죠. 예수 그리스도 위에 내가 금은보석으로 집을 짓는다는 것은 주님을 위한 순전한 믿음으로, 주님 안에서 확고하게 구별된 삶으로 세워간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짓는다는 것은 주님 곁에 자기 터를 따로 세운다는 말입니다. 나를 위해서만 사는 것 말이죠. 그렇게 살고 나서 주님을 위해 나무, 풀, 짚, 그런 쪼가리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운다는 것이죠. 그럼 누가 신령한 자입니까? 금과 은과 보석으로 자기를 세우는 자죠. 누가 영적으로 어린 아이요 육신에 속한 자입니까? 나무와 풀과 짚으로 자기를 세우려는 자죠.
그런데 13절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여기에서 ‘공력’이란 헬라어로 ‘에르곤’(ἔργον)인데 그 뜻은 ‘일’ ‘행위’ ‘업적’ ‘결과’라는 말입니다. 내가 무엇으로 교회를 세워 가는가 그 결과가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죠. 결과가 언제 어떻게 드러납니까? ‘그 날’이죠.이른바 심판의 날에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내가 신령한 자로 살아 왔는가, 아니면 육신에 속한 자로 살아왔는지 말입니다. 내가 무엇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왔는지 말이죠.
여기에서 ‘시험한다’는 단어는 ‘도키마조’(δοκιμάζω)인데 ‘입증한다’(prove)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에게 불처럼 임하는데 그 불 속에서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 모든 것이 입증된다는 뜻이죠. 나무, 풀, 짚, 다 타버지만, 금은보석은 녹아도 그 모습 그대로 간직되기 때문입니다.
14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자신이 세운 공력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하나님의 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다시 상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15절에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는다’, 그날 진짜가 아니었던 것들은 다 해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누가 과연 해를 받는다는 것입니까? 젖을 먹자, 곧 육신에 속한 삶을 산 자, 나무와 풀과 짚으로 자기 집을 세워온 자죠. 그에 반해 밥을 먹는 자 곧 신령한 자는 금은보석으로 자기 집을 지어 온 자요, 그 공적으로 상을 받는 자요, 심판 속에서도 입증된다는 거죠.
그렇다면 ‘해를 받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믿지 않는 자를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믿는 자 중에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구원은 받지만 상을 받는가 받지 못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받되 불 가운데서 받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이른바 잠을 자다가 불이 났는데, 벌거벗은 몸으로 겨우 살았난 경우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은 모두 밖에서 옷을 입고 태연스럽게 있는 경우라면 어떨까요? 자신은 불 속에서 뛰어나온 자요, 육신에 속한 자요, 풀이나 나무나 짚으로 자신을 세우려고 했던 자라면, 심판 날에 그처럼 수치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때 얼마나 후회하겠습니까?
지금 바울이 3장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누가 신령한 삶을 사는 자인가? 누가 성숙한 믿음의 사람인가? 누가 예수 그리스도 위에 믿음의 터를 세우는 자인가? 누가 하나님의 상급을 믿는 자인가? 하는 것이죠.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11절과 46절, 마태복음 6장 1절과 5절, 마태복음 10장 42절을 통해 상급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서도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분명하게 상급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우리의 인생을 세워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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