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논지)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타력종교입니다.
불교나 힌두교나 다른 모든 종교는 자기 노력, 자기 득도, 자기 깨달음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주님이 그 인생에 찾아오셔서 그를 구원해주시고 그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종교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를 주님께서 임재하셔서 말씀을 통해 깨닫고 해석이 되게 해 주시는 것이죠.
주님은 우리 밖에 계시는 초월자로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일을 깨닫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내가 큰 아픔과 고난을 겪을 때, 그때 내게 임재하셔서 깊으신 뜻을 해석할 수 있도록 돕는 분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이란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요, 주님의 뜻 안에서 내게 일어난 일을 해석하며 사는 것임을 알 수 있죠.
(예화)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를 잃었고, 고등학교 때는 어머니를 여읜 소년 가장이 있습니다.
그 소년은 공부를 잘해서 경기고등학교를 입학했고, 1년만에 검정고시를 봐서 이듬해 서울대물리학과에 들어갔죠.
그때 가정교사를 하면서 여동생들을 보살폈습니다.
그 후 서울대행정대학원을 서석으로 졸업했고, 미시건대학도 수석으로 입학해 특별장학생으로 박사과정을 밟았죠.
그 박사과정도 2년 6개월만에 마치고 플로리대대학조교수로 임명받았습니다.
그때가 그의 나이 24살이었습니다.
그 젊고 유능한 청년이 바로 정근모 박사입니다.
미국 MIT와 뉴욕공대를 나왔고, 핵융합연구소를 거쳐 32살에 금의환향해 한국과학기술원의 부장원을 맡았죠.
이후로 한국전력공사 사장, 과학기술처 장관 등 세계적인 과학자로 우뚝 섰죠.
그때까지도 혼자 가정경제를 책임졌고,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이뤘으니, 그야말로 부러워할 사람 아니었겠습니까?
그렇게 10년세월을 승승장구하던 때에 아들 진후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 뿐인 그 아들이 만성신장염으로 5년밖에 못 산다는 진단을 받았죠.
그때 한국에 있던 아들을 치료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고, 직장도 미국 과학재단으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그 아들은 몸이 더욱 아팠고, 심한 우울증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모든 치료법을 다 동원했지만 일주일에 세 번씩 4시간이나 투석하는 단계를 거쳤고, 급기야 신장이식을 해야 했죠.
그때가 1979년대였는데, 그때만 해도 신장이식수술이 참 어려운 때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상황인데, 그 당시 장로였던 정근모 장로님은 어떻게 했을까요?
아들이 투석단계까지 가니, 저절로 입에서 ‘하나님’하며 불렀고, 신앙생활도 더욱 열심히 했죠.
그리고는 자기 신장을 하나 떼어서 아들에게 이식해줬습니다.
하지만 수술 결과가 나빠서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달했죠.
아들은 잠시 회복하는 듯 했지만 자기 절망에 빠져 두 번이나 자실을 시도했습니다.
육적으로도 아픈 아들인데, 그때까지도 그 아들이 영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오질 않는 것이었죠.
그런 아들이 주님을 만나고 성령을 체험하도록 정근모 장로님은 간절히 기도하고 부흥회도 참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예배 때 에베소서 2장 1절-6절 말씀을 읽어나가는데 그 말씀이 심령 속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주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말씀을 읽는데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저녁 기도하던 중에 울음이 터졌고,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음성을 들려주셨죠.
“아들아.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 줄 아느냐.”
“이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네 아들로 인해서 감사해 본 적이 있느냐”
그때 정근모 장로님은 주님께 통곡하면서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내 아들 때문에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나는 부모를 기쁘게 한 효자였고 순종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진후같이 아픈 아들을 얻어야 합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네가 부모에게 효자이고 자랑거리인 것이 네 부모의 영생이나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진후 때문에 너희 식구가 다 예수 믿고 구원받지 않았느냐?”
“그러니 네 아들에 대해 감사해라.”
정근모 장로님은 주님의 그 말씀 앞에 다시금 태어났습니다.
아들 진후로 인해 그의 불신이 깨어지고, 온전한 신앙을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식구들에게 용서를 구했고, 모두가 울며 통성으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아들 진후는 미국에 남겨 놓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 채 홀로 한국에 돌아와 모든 일정들을 소화했죠.
그 와중에 이 일 저 일로 바쁜 날이 이어져 예배에 소홀하면 하나님께서 그 장로님을 치셔서 피를 토하기도 했죠.
때마다 그런 고난을 통해 주님의 마음을 더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진후를 회복시켜주셨는데, 20살에 팬암항공사에 취직을 했고, 결혼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속에서 진후도 주님을 믿기 시작했고,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칠 만큼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습니다.
한전공사 사장 임기를 마친 정근모 장로님도 미국에 가서 아들을 봤을 때, 너무나 밝고 긍정적인 것을 알게 되었죠.
(깨달음) 어떻습니까?
바로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참된 구원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지식이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 주님께서 찾아와 그 뜻을 깨닫고 해석토록 해주신 것 말이죠.
그 아들의 문제가 아니었다면, 어찌 그 분이 참된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아들의 문제가 아니었다면, 어찌 그 장로님이 신실한 신앙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아들의 문제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정근모 장로님에게 친히 찾아와주셨고 임재해 주셨습니다.
그 아들의 문제를 통해 그 분의 어긋난 신앙을 바르게 세워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욥은 동방의 우스(Uz, wooded) 땅에 사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갑부였습니다.
그에게는 아들 일곱, 딸이 셋을 두고 있었죠.
양이 7천마리, 낙타가 3천마리, 소가 100마리, 암나귀가 500마리, 그것들을 돌볼 종들도 많았죠.
자기 생일날이 되면 여동생 3명을 청해 자식들과 함께 잔치를 벌였고, 잔치가 끝나면 자식들 수대로 번제를 드렸죠.그 정도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고, 그 정도로 죄에 대해 털 끝 하나 범치 않고 살려고 했던 욥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뜻하지 않는 인생 풍파가 몰아쳐 오지 않았습니까(욥1:13-19)?
그 모든 풍파는 하나님께 허락을 받은 사단이 꾸민 일이었죠.
큰아들 집에서 자식들이 잔치를 벌이는데 스바 사람들이 침략해 종들을 칼로 죽인 사건이 터졌죠.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수많은 양 떼와 종들이 한꺼번에 타죽는 일이 발생했죠.
갈대아 사람 세 무리가 떼를 지어 욥의 낙타를 모두 빼앗고 종들까지 무참히 살육한 일도 일어났죠.
더욱이 큰아들 집에서 모든 자식들이 잔치를 벌일 때 광야의 큰바람이 불어 집을 덮쳐 모두 죽고 말았죠.
그때 욥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그 많은 소유와 자식과 재산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또 거두어가시는 것도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한 것이죠.
바로 그것이 그때까지 그의 생각으로 정립한 신앙 세계였습니다.
이 모습만 봐도 우리가 생각하기에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신앙인이 잘 수 있죠.
그런데 이번에는 사단이 욥에게 질병을 가져다 주죠.
그의 몸에 악창이 들끓고 기와조각으로 긁게 되죠.
그때 그의 아내가 뭐라고 말합니까?
“이 미련한 남편아.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라.”(욥2:9)
이 모습을 보노라면 욥의 아내가 무엇 때문에 욥과 결혼을 했는지, 무얼 바라고 있었는지 알 수 있죠.
욥의 아내는 사탄의 유혹에 빠져든 하와처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 빠져 결혼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죠.
하지만 욥은 그의 아내가 그렇게 날뛰어도 모든 중심을 잡으면서 그의 아내게 이렇게 말하죠.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화를 받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소?”(욥2:10)
바로 그 무렵에 욥의 세 친구들 곧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찾아와 7일간 함께 지내며 욥을 위로하고 격려하죠.
그런데 욥기서 3장에 이르러 욥의 심경에 변화가 일어나죠.
여태껏 아무렇지 않던 욥이 뜬금없이 자기 생일을 저주하고 자신이 살아있는 것 자체를 부정하게 되죠.
왜 그랬을까요?
무엇보다도 고난이 길어지니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자신은 매사에 제사드리며 의롭게 살아왔는데, 왜 이런 고통이 찾아오는지 자기 머리로 납득되지 않기 때문이었죠.
마치 정근모 장로님처럼 말이죠.
어렸을 때부터 소년가장으로 가족경제를 책임져왔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성실을 다해 성공의 반열에 오르지 않았나요?
그런데 왜 자기 아들 진후가 만성신장염 투석을 해야 했고, 신장이식을 받아야 했는지 도무지 그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그 때문에 정근모 장로님도 하나님을 향해 불평과 원망을 터트렸던 것 아닙니까?
욥도 자기 머리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그렇게 불평과 원망을 터트렸던 것이죠.
그때부터 세 명의 친구들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냐?’면서 욥을 정죄하고 비난하기 시작했죠.
그러자 욥도 차근차근 반박을 하면서 자기 의로움을 내세웠죠.
그리고 그 끝판에 그들보다 나이가 적은 엘리후까지 끼어들어 욥의 무지, 욥의 죄악을 공박했죠.
그렇지만 욥은 끝끝내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게 없고 오히려 하나님께 제사 중심으로 완벽하게 살아왔다고 항변하죠.
그것이 3장부터 37장까지 이어지는 모습인데, 드디어 욥기서 38장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죠.
38장부터 41장까지 욥은 66가지나 되는 질문을 통해 욥의 무지, 욥의 교만, 욥의 의로움을 하나씩 깨트려주셨죠.
그때 욥은 자기 친구들에게 항변하는 것과는 달리 그 어떤 항변도 하나님께 내놓을 수가 없었죠.
하나님의 그 말씀 앞에 얼마나 자신이 무지한 자인지, 자신이 얼마나 교만한지, 자기 자아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절절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그래서 오늘 본문 5절을 통해 욥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고백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원해) 여기에서 ‘뵈옵나이다’ 곧 ‘본다’는 히브리어는 ‘라아’(רָאָה)입니다.
그 뜻은 ‘보다’(to see), ‘응시하다’(look at)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보시고’(창1:4,9,10,12,18)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할 때 쓰인 단어죠.
하와가 나무를 ‘본즉’(창3:6) 먹음직스럽고 보암직스럽고 지혜롭게할 만큼 탐스럽다고 할 때, 쓰인 그 단어입니다.
인간이 바벨탑을 쌓아 올릴 때 그걸 하나님께서 빤히 ‘바라보실 때’(창11:5), 바로 그때 쓰인 단어죠.
(깨달음)그렇기에 ‘라아’라는 단어는 시각적인 의미보다 훨씬 깊은 뜻을 지닌 단어입니다.
뭔가를 ‘깊이 생각하다’, 누군가를 ‘보살펴주다’는 마음과 뜻이 들어 있는 단어입니다.
닭장에 닭이 21일이면 부화를 한다는데, 부화를 하지 않고 있어요.
그런데 만약 새끼들이 부화했다면 그 암탉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이 병아리들이 잘 살아 있는지, 다른 닭들에게 짓밟히는 것은 아닌지, 온 마음을 갖고 눈여겨보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런 마음과 뜻으로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쓰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뭔가를 애타게 간구할 때 믿음의 눈을 열어주실 때 그 단어가 쓰이지 않겠습니까?
욥과 같은 고난에 봉착했을 때, 정근모 장로님과 같은 인생 난제 앞에 닥쳤을 때,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말씀으로 응답해주시는 그런 모습 말입니다.
(원성)그래서 이 ‘라아’라는 단어가 신약성경에선 ‘프로에륍피죠’(προελπίζω)라는 헬라어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뭔가를 갈망하며 바라보다’는 의미죠.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2)
또 아포블레포’(ἀποβλέπω)라는 단어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소망하다’, ‘바라보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6)
(깨달음) 그렇기에 욥이 ‘눈으로 주님을 봤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고백입니까?
주님의 임재를 자기 눈으로 목격했다, 자신이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그 신비한 체험을 자랑하는 게 아니죠.
재산과 종과 자식들까지 다 죽고 몸에 악창이 난 이유를 알지 못해 분통이 터졌는데, 이제는 깨달았다는 고백입니다.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전까지는 자기 제사의 의로움과 자아에 사로잡혀 고난이 원통하고 분했는데, 이제는 주님의 말씀 속에서 해석하게 됐다는 뜻입니다.
그것보다 참되고 바른 신앙인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앙은 주님의 뜻을 깨달아 알고, 주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
주님께서 정근모 장로님에게, 욥에게, 그런 고통과 아픔을 허락하신 것이 바로 그런 차원이었던 것입니다.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 주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통해 주님의 뜻을 깨닫고 해석해서 온전한 신앙으로 세워주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구원은 너 스스로의 지혜나 능력으로 받는 게 아니라 오직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로 받는 것 아니더냐?”
“나는 네가 받아들일 수 있는 고난과 고통을 통해 너를 만나주길 원하고 너를 참된 신앙으로 세워주길 원한다.”
“제사중심으로 살았지만 자기 의로움과 자아에 갇힌 욥에게 그런 고통과 고난을 허락한 이유도 그 때문이지 않더냐?”
“소년가장으로 부모에게 효도하며 자기노력으로 성공한 정근모 장로에게 자식의 고통을 허락한 것도 그 때문이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지식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 너의 의로움으로 생각하는 하나님, 귀로만 들었던 그 하나님의 세계를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욥처럼, 청근모 장로처럼, 너도 주님의 임재 가운데 주님의 뜻을 깨달아 해석하여 살아가는 신앙인이 돼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이해하기 힘든 고난과 역경이 찾아올 때 욥을 떠올리고, 정근모 장로를 떠올려, 주님의 임재 앞에 주님을 만났으면 좋겠구나.”
“그러면 너도 주님의 깊으신 뜻을 이해하고 믿음으로 해석해서 더 큰 신앙으로 세워주지 않겠느냐?”
(찬양)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자녀 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예화) 욥도 그렇고 정근모 장로님에게 하나님은 임재해 주셨는데, 여성분들에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난주에 김양재 목사님의 결혼생활에 대해 말씀을 드렸죠.
어머니 신앙을 물려받았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온갖 일을 했는데, 그런 와중에도 교회에서 10년간 반주자로 섬겼죠.
20대 중반에 맞선을 보는 자리에, 장로님의 아들에다 강남사는 의사원장이 기사를 대동해 왔었죠.
얼굴과 외모도 준수했고, 무엇보다도 돈이 많은 것에 끌려, 지금의 고생이 끝날 것 같다는 생각에 결혼을 했죠.
그런데 꿈꾸던 강남아줌마와 달리, 그 부유한 집에서 걸레질을 해야 했고, 피아노도 돈도 외출도 제 맘대로 하지 못했죠.
더욱이 그 남편은 장로님의 아들과 달리 폭언을 서슴지 않은 남편이었죠.
그로 인해 결혼 5년만에 가출을 했는데 아무도 몰래 기도원으로 숨어들어갔죠.
(깨달음)어쩌면 그곳에서 그녀는 자기 아픔과 고통을 주님 앞에 그렇게 토해내지 않았겠습니까?
욥처럼, 정근모 장로님처럼 말입니다.
“하나님, 제가 뭘 잘 못해서 이런 고통과 고난 속으로 저를 집어 넣으신 것입니까?”
“제가 어려서부터 온갖 일을 하며 학교도 제 힘으로 다녔고, 교회 반주 봉사도 10년 넘게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좀 잘 살고 싶어서 강남의사한테 시집갔는데, 왜 이런 고통스런 남편을 만나게 하셨어요.”
그때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내가 너의 아픔과 고통을 왜 눈여겨보지 않았겠느냐?”
“암탉이 뒤뚱뒤뚱 위태롭게 거니는 병아리를 품듯이 왜 내가 너를 품어주지 않았겠느냐?”
“하지만 너의 열심, 너의 자아, 너의 교만을 꺾고자, 너를 참된 신앙으로 세우고자 그런 곳으로 이끌지 않았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다시금 아내의 자리, 며느리의 자리로 돌아가, 주님의 은혜로 믿음의 가정을 세웠으면 한다.”
어쩌면 그렇게 주님께서 임재 가운데 그녀에게 말씀한 바가 아니었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이전에 귀로 들었던 신앙과는 달리, 눈으로 주님을 뵈옵는 체험 아니었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자기 무지, 자기 교만, 자기 의로움과 자아를 깨트려서, 참된 믿음으로 눈을 뜨게 해 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적용) 그런 체험 이후에 그녀는 다시금 시댁에 들어가 남편의 참된 구원을 위해 헌신하며 가정을 지켜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결혼 13년 만에 그 남편은 딸 하나 남겨 놓고 진짜 구원받은 상태로 천국에 갔죠.
그때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큐티를 하며 자신을 그 가정에 보내신 하나님의 섭리를 해석하게 되었죠.
왜 자신을 그런 남편과 결혼하게 하셨는지, 왜 그런 시댁에 보내셨는지, 주님의 임재 가운데 깨닫게 하신 것이죠.
겉과 속이 다른 남편일지라도, 그 남편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 그 거룩한 사명을 위해 자신을 보내셨다고 말입니다.
지금은 목사님이 된 신분으로 결혼할 여성들에게, 현재의 중년 아내들에게, 그런 권면을 해 줍니다.
여성은 결혼하되 자기 출세와 자기 성공을 위해 하지 말고, 남편과 가정의 구원을 위해 결혼하라고 말입니다.
그 목사님이 쓴 〈보시기에 좋았더라〉에 그런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여자는 대부분 남자의 사랑을 갈망하기 위해서 결혼하는 특성이 있다고 하죠.
그런데 그토록 갈망하던 남자가 자기 남편이 되는 순간, 그때부터 수 없는 고통이 뒤따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여자를 다스린다는 말씀에는 가혹하고 착취적인 예속의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거죠.
남자들이 자기 죄성을 가지고 여성을 다스리기 때문에 인격적인 다스림보다 폭력적인 다스림이 쉽게 나온다는 뜻이죠.
그래서 결혼 전엔 남편이 아내의 말을 잘 듣는 것 같아도 어느 순간부터 아내를 지배하려는 든다고 하죠.
그런데도 아내는 자기 남편을 독점하려는 갈망으로 요리도 하고 애교를 떤다고 하죠.
하지만 주님의 사랑과 섬김이 없이 자기 주장만 하고 자기 영역만 넓히려고 하기 때문에 결혼생활이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창2:23)했던 그 사이가 갈망과 착쥐, 지배와 피지배로 변한다는 겁니다.
그때부터 남편은 바깥으로 돌고, 아내는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이 닥쳐올 때, 김양재 목사님은 주님의 임재가운데 들려주신 그 음성을 전합니다.
어떤 아내든지,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의 다스림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원죄의 형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잘 받아야 한다고 하죠.
그것이 예수님께서 여자의 몸으로 오신 이유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자녀들이 엄마를 인정하고, 가정의 질서를 본받게 된다고 말하죠.
바로 그것이 그 가정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명을 아내들이 완수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께서 부여하실 최고의 면류관이라고 말하죠.
(성화)그런 차원에서 볼 때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아벨과 가인의 제사는 어떤 제사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십자가의 제사 곧 피의 제사 아니겠습니까?
여성에게 그 십자가의 자세, 피의 제사란 남편을 섬기고 임신하고 해산하는 고통이 뒤따르는 제사죠.
그런 고통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손을 들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그런데 그런 십자가 고통, 피흘림의 고통 없이, 부모와 배우자를 버린 채 헌금만 가지고 오는 것은 가인이 원하는 제사 아니겠습니까?
그가 곡물을 가져올 때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쓱 취해서 가져왔으니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가인의 제사, 그런 아내의 제사를 기뻐받으시겠느는 것이죠.
하지만 아벨의 제사 속에는 어떤 제사가 깃들어 있겠습니까?
남편이 힘들게 하는 그 삶속에 순종하는 모습, 아이가 속을 썩이고 가출해도 끝까지 참는 십자가의 제사가 깃들어 있는 것이죠.
가정과 일터가 힘들 때도, 남편의 관계와 가정의 질서에 순종하는 피흘림의 제사 말입니다.
그런 제사, 그런 예배 속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그 아내에게 더욱 큰 믿음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주님인 줄 믿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상급이요 면류관인 줄 믿습니다.
(내음성) 그렇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주님께서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는 너무 무지하고 너무나도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왔어요.”
“내가 결혼한 것도 가정구원이라는 거룩한 사명보다 내 갈망과 내 욕심이 더욱 컸음을 고백합니다.”
“그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갈망과 착취가 거세고, 지배와 피지배가 난무할 때가 많아요.”
“제 남편이 왜 저를 지배하려는지, 왜 겉돌게 되는지, 왜 저를 힘들게 하는지 이제야 깨닫게 됩니다.”
“제가 남편을 향해 주님을 섬기는 마음과 자세 없이, 제 갈망과 욕망만을 남편에게 원하며 살았기 때문이었네요.”
“주님. 지난날 남편이 겉돌거나 술과 도박에 빠지거나 바람을 피우는 일었다면 모두 제 탐욕으로 인함이었네요.”
“그런 갈등과 다툼 속에서도, 부족한 저를 남편의 아내로 자식들의 어머니로 인내하게 해 주신 것 주님의 은혜예요.”
“주님. 훗날 저를 천국으로 부르셨을 때, 아무런 상급을 바라지 않아요.”
“오직, 남편과 가정의 구원을 위해 저를 붙잡아 주신 주님께서 저의 상급이심을 믿습니다.”
“주님. 앞으로 남편 때문에 갈등과 괴로움을 겪을지도 몰라요.”
“그럴 때마다 주님의 임재를 바라보며 삶 속에 십자가를 짊어지는 온전한 예배자로 주님께 나아가게 해 주세요.”
(찬양) 기도를 멈추지 마라 눈앞의 상황이 마음을 눌러도
원망치 마라 너의 입을 지켜라 저들은 너의 입을 보고 있다
마음을 뺏기지 마라 내가 널 도우지 않는단 소리에
너의 모든 게 모든 게 불리해도 너는 기도를 계속해라
너 기도를 멈추지 마라 내가 너의 그 모든 상황을 바로 역전시키리니
너 기도를 멈추지 마라 내가 잠시도 쉬지 않고
모든 걸 지켜보고 있으니 바로 역전되리라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자기 힘이나 자기 노력으로 구원받는 자력종교가 아니라 전적인 타력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친히 임재하셔서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이십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인생의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친히 임재하셔서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해석하게 하셔서 온전한 믿음의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욥에게 찾아와 친히 말씀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욥을 당신의 임재로 불러 그 무지와 의로움과 자아를 깨트리며 주님의 뜻을 해석하여 깨닫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정근모 장로님도 자식의 고통속에서 주님의 임재 가운데 나오게 하셨고, 그때 그의 무지와 의로움과 자아를 깨트려서 참된 신앙을 세워주셨습니다.
지금은 이혼이 흔한 세상이지만, 그 속에서도 남편과 가정을 지키고자 십자가를 짊어지는 아내분들에게,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주님의 은혜가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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