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논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는 예측하기 힘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팬데믹, 코로나 19로 전세계가 감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이 현상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스트라제네카나 모더나 화이자를 맞으면 괜찮을 것이라 했지만, 누가 변이 바이러스가 창궐할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것이 전 세계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일이라면, 우리나라에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었죠.
일본의 항복과 더불어 찾아온 우리나라의 광복절이 그것이죠.
2차대전은 1943년부터 연합군에게 유리했는데 소련이 핵폭탄을 개발한다는 걸 알고 미국이 선수를 치려고 했죠.
그때 일본군 수뇌부는 자기 나라에 미국에 핵폭탄을 던질 것을 알고 있었죠.
그런데도 시간을 늦추고 늦췄던 것은 자신들이 전범 재판국이 되지 않을 명분과 실리를 찾고자 함이었죠.
그러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했을때 일본이 항복했고,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했다면 기뻐했습니다.
누가 그와 같은 일을 그때 당시에 예측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명랑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일도 마찬가지였죠.
그 당시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133척 일본 수군을 대파한 명량해전을 누가 내다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순신 장군이 총에 맞아 죽어갈 때, 일본군 수군은 그것도 모른 채 돌아갔다가 다시 쳐들어올 기세였죠.
하지만 그때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노망이 나서 죽고, 도꾸가와이에야스가 새로운 쇄국정책을 펼쳤죠.
그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밑의 명장인 고니시 유키나 그 소서행장이 그리스도인이었는지 누가 예측이나 했겠습니까?
더욱이 소서행장을 따라 조선에 쳐들어온 일본군 25만명 중 10%가 그리스도인이었는데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지 않고 다시금 군대를 보냈다면 우리나라는 꼼짝없이 일본의 지배를 받았을텐데, 왜 그가 갑자기 죽게 되었는지, 왜 쇄국정책으로 전환했는지, 누가 예측이나 했겠습니까?
코로나19의 팬더믹도, 우리나라 광복절과 임진왜란 승리도, 결코 우리로서는 예측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가정사의 문제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발췌) 김양재 목사의 〈그럼에도 살아냅시다〉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분당 우리들교회를 섬기고 있는 김양재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녀는 1951년에 대구에서 태어나 뿌리깊은 유교 집안에 시집온 어머니의 신앙을 물려받았습니다.
이 후 그녀는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서울예고와 총신대 강사를 지냈죠.
20대 중반에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는 교회 반주자로 10년 넘게 봉사를 했습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믿는 집안의 남편을 만나 혼인예식을 올렸습니다.
그 남편은 준수한 외모에, 강남에 집을 두고 있었고, 더욱이 강남의 병원장을 맡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런 곳에 시집가는 일이었으니 누가 봐도 ‘강남아줌마’로 신분상승을 꾀하는 일 아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 남편과 산 지 5년 만에 집에서 가출하고 말았습니다.
결혼 전엔 몰랐는데, 그 시댁에 들어가 자기 마음대로 피아노도 칠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그 시댁에서 그녀가 직접 걸레질을 해야 했고, 외출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었죠.
거기다가 남편은 폭력을 일삼는 겉과 속이 다른 남편이었습니다.
그래서 결혼생활 5년 만에 이혼을 각오하고 기도원으로 가출을 시도했던 그녀였죠.
그런데 그 기도원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주님은 다시금 아내의 자리 며느리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하셨죠.
물론 집으로 돌아가서도 그 힘든 삶을 살았지만, 주님의 소망을 붙잡고 인내하며 신앙생활을 했죠.
그런데 그렇게나 잘나가던 그 남편이 결혼 13년 만에 갑자기 죽고 말았습니다.
그 남편이 죽자 그녀는 허탈감과 우울증에 빠졌지만, 그때 말씀묵상 곧 큐티하는 삶을 통해 주님의 깊으신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50세 때 신학을 공부했고, 긴긴 기다림 끝에 지금의 우리들교회를 개척하여 섬기게 되었습니다.
(깨달음) 어떻습니까?
김양재 목사님 그 분도 자기 삶에 그런 일을 겪으리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수 있었겠습니까?
누가 감히 강남으로 시집간 그녀가 직접 걸레질을 하고, 쥐죽은 듯 살 수밖에 없다고, 예측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게도 준수하고 그렇게도 훤칠한 그 남편이 이중인격자였는지, 왜 그렇게 갑자기 죽었는지, 누가 내다볼 수 있었겠습니까?
(적용) 그것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저도 제가 세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치도 못한 일입니다.
코로나19로 교회마다 어려운 상황인데, 그 속에서도 여러분들이 믿음의 자리를 지킬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평일이면 주어진 삶 속에서 일터의 선교사로 일하고, 주일이면 예배당에 모여 함께 예배하는 여러분들의 믿음이 얼마나 귀한지, 제가 예측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만큼 우리는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 우리가 나의 연약함, 나의 무지함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예배드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주님의 크신 은혜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본문배경) 동방의 우스(Uz, wooded) 땅에 욥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자요, 가난한 자를 돕는 사람이요, 아들이 일곱과 딸이 셋을 두고 있었죠.
당대의 억만장자로, 양 7천마리, 낙타 3천마리, 소 100마리, 암나귀 500마리에다, 그것들을 돌볼 종들도 많았습니다.
자기 생일날이 되면 여동생 3명을 청해 자식들과 함께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 잔치가 끝나면 온 자녀들을 불러모아 혹여라도 죄를 짓지 않았는가 싶어 그 수대로 번제를 드릴 정도였죠.
그런 그에게 뜻하지 않는 인생의 풍파가 차례대로 몰아쳐오지 않았습니까(욥1:13-19)?
욥의 자식들이 큰아들 집에서 잔치를 벌이는데 스바 사람들이 침입해 칼로 종들을 죽인 사건이 터졌죠.
하늘의 불이 떨어져 양떼와 종들이 한꺼번에 불에 타죽는 일이 발생했죠.
갈대아 사람 세 무리가 떼를 지어 그의 낙타를 다 빼앗고 종들까지 무참히 살육한 사건도 일어났죠.
더욱이 큰아들 집에서 모두가 잔치를 즐기고 있는데 광야의 큰바람이 일어나 집이 무너져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그 모든 일이 사탄이 하나님께 허락받아서 한 일이었죠.
천상의 어전회의가 일어났을 때 땅을 돌아다니던 사탄이 하나님께 고소했죠.
“하나님, 괜히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그 소유에 복을 주셔서 그런 거예요.”하고 말이죠.
그때 하나님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하고 대답하셨죠.
그러자 사탄은 “제가 한 번 욥의 소유물을 건드려보겠습니다.”하고서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욥의 주변을 쳤죠.
그때 욥은 재산 잃고, 자식들까지 다 죽었는데, 어떻게 했습니까?
욥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사탄이 하나님께 다시 허락을 받아, 욥의 몸에 질병 곧 악창이 들끓는 고통을 가져다줬죠.
그때 그의 아내는 “이 미련한 남편아.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라.”(욥2:9)하고 했죠.
하지만 욥은 그때도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화를 받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소?”하고 믿음의 고백을 하죠.
그 무렵 세 명의 친구들,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찾아와 7일간 함께 지내면서 욥을 위로하고 격려하죠.
그것이 욥기서 1장과 2장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욥기 3장에서 욥의 심경에 변화가 생깁니다.
여태껏 아무렇지 않았던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하고, 살아있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모습이죠.
왜 그랬을까요?
고난이 길어지니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자신은 의로운데 왜 이런 고통이 뒤따르는지 도저히 자기 머리로 납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세 친구들이 자기 생일을 저주하고 살아 있는 것 자체를 불평하는 욥을 향해 정죄하기 시작하죠.
그러자 욥도 그 세 명의 친구들과 함께 맞짱 토론이라도 하듯 하나씩 하나씩 따져가며 자신에게 잘못이 없음을 변론하죠.
그렇게 옥신각신 논쟁을 벌이는데, 그들보다 나이가 적은 엘리후가 마지막에 끼어들이 욥을 공박하죠.
그렇지만 욥은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며, 자신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투로 대답을 하죠.
그런 정죄의 질문과 의로움의 항변이 37장까지 이어지는 모습입니다.
드디어 욥기서 38장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개입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서 당신이 누구신지,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하나씩 하나씩 일깨워주십니다.
그 질문이 38장에서 41장까지 무려 66가지나 되는데, 그때마다 욥은 세 친구들에게 했던 답변과는 달리 하나도 대답하지 못하죠.
왜 욥은 하나님 앞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을까요?
하나님께서 던진 질문에는 자기 이치나 자기 논리로 대답할 수 없는 영역의 일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질문들은 자기 삶의 영역을 뛰어넘어 자연계와 우주의 이치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질문들은 자기 자신의 의로운 행위와는 전혀 무관하게 흘러가는 일들임을 그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은 42장 1-6절, 오늘 본문을 통해 그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 아닙니까?
친구들의 공박에는 그렇게도 욥이 또렷하게 반박했지만, 하나님의 크신 섭리 앞에서는 도무지 자기 논리로 대답할 수 없다는 욥 말입니다.
(본문) 바로 그런 자신의 모습을 오늘 본문 2-3절에서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역본)이 말씀을 새번역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깨달음) 욥이 하나님 앞에 어떤 고백으로 응답해드렸는지, 어떤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는지, 알 수 있죠.
주님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다는 것을 이제사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획은 못 이루실 일이 없다는 것을 이때사 깨달았다는 것이죠.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크신 뜻을 흐려놓는 자였다는 것을, 겸손히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주님의 뜻을 깊이 헤아리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자기가 판단해서 아는 척 했다는 것을 털어놓는 것이죠.
제가 이 부분의 고백과 또 욥기서 1장에 나오는 욥에 대한 모습을 보고, 깊이 깨닫게 된 부분이 있습니다.
욥은 자기 행위의 의로움에 갇힌 인간이지 않았나 싶은 모습이 그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제사도 잘 드리고 있고, 나는 잔치를 열면 자식들이 죄를 짓지 않았나 싶어 제사까지 드릴 정도로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잘 경외할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도 긍휼을 베풀고 사는 자라는 것 말이죠.
그만큼 욥기서 1장부터 42장까지 오면서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홍수로 심판 때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 노아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 은혜’(창6:8)라고 설명합니다.
다윗이 사울의 칼날을 피해 도망치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던 것, 자기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시31:19)라고 고백하죠.
모세가 파라오의 명령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물에서 건짐받고 사명감당한 것, 자기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출1:20)였다고 고백하죠.
바울이 구원받고 하나님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 자기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고전15:10)라 고백하죠.
그런데 욥이 그 많은 복을 누리며 산 것,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거나,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보면 욥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 행위의 의로움에 갇혀 있는 교만한 심령의 소유자였지 않나 싶은 것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친구들이 그를 공박할 때, 여전히 자기 의로움만 내세우면 맞서서 공박했던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자기 제사, 자기 의로움조차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비로소 고백하죠.
바로 이것이 욥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 아니겠습니까?
자기 의로움에 갇혀 있는 욥이 스스로 자기 교만을 꺾으며 하나님을 모실 수 있도록 해 주신 그 은혜 말입니다.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주님은 나의 의로운 행위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게 아니라 나의 무지함을 깨닫게 하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너의 무지함과 너의 연약함을 주님 앞에 고백하는 은혜를 덧입으며 살고 있느냐?”
“누가 펜데믹과 같은 이 세계적인 코로나19의 상황을 예측인 할 수 있었겠느냐?”
“누가 일본이 2차 세계대전때 패망할 것을, 누가 임진왜란이 끝날 것을 예견이나 했겠느냐?”
“누가 강남아줌마로 시집간 그녀가 그곳에서 걸레질을 하고 폭력에 시달리며 살 것이라고 예측이나 했겠느냐?”
“전 세계적인 팬데믹도, 우리나라의 상황도, 한 가정의 가정사도,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것 아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혹여 너도 욥처럼 의로운 자기 행위에 갇혀 있었다면 이 시간에 너도 주님의 긍휼 앞에 나아오지 않겠느냐?”
“남들보다 법도 잘 지키고 정직하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생각한다면, 이 시간 너의 의로움 자체를 내려놓지 않겠느냐?”
“욥처럼 너도 네 행위의 주체자가 되어 예배의 주체자인 것마냥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마저 내려놔야 하지 않겠느냐?”
“노아가 홍수심판에서 건짐받은 것, 모세가 나일강에서 건짐받은 것, 그들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지 않더냐?”
“다윗이 사울의 칼날에서 건짐받은 것, 바울이 구원받아 복음전도자가 된 것, 모두 주님의 은혜였지 않더냐?”
“그러니 너도 나의 나된 것은, 나의 구원받은 것, 이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하고 고백하지 않겠느냐?”
“나는 지금도 그런 은혜를 너의 심령가운데 부어주지 않겠느냐?”
(찬양)나 약해 있을 때에도 주님은 함께 계시고
나 소망 잃을 때에도 주님은 내게 오시네
나 시험당할 때에도 주님이 지켜주시고
나 실망당할 때에도 주님이 위로하시네
주님 만이 내 힘이시며 오 주님 만이 날 도우시네
오 나의 주님 내 아버지여 오 나의 주님 내 사랑이여
(예화) 노아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심판받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크신 은혜를 덧입은 노아였는데, 왜 술에 취하고 말았을까요?
유대인들이 지혜의 교본으로 삼는 탈무드엔 ‘악마의 최초 선물’이라는 술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세상 최초의 인간 곧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고 있었습니다.
그때 사탄이 찾아왔습니다.
사탄은 포도나무 열매즙을 마시면 무척 행복해질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죠.
그러면서 그걸 마실 때 자기도 꼭 끼워달라고 부탁을 하죠.
사탄은 그후에 인간이 잠든 틈을 타서 양과 사자와 원숭이와 돼지 피를 포도나무에 거름으로 줬습니다.
그래서 술을 마실 때는 양처럼 순하다가, 조금 더 마시면 사자처럼 사나워지도록 말이죠.
더 마시면 원숭이처럼 춤추고 노래부르고, 더 마시면 돼지처럼 지저분해지는 지도록 하려는 것이었죠.
이제 노아가 포도나무 열매즙 곧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벗고 장막에서 골아 떨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양처럼 순하다가, 사자처럼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이내 원숭이처럼 벌거벗은 것이었죠.
그리고는 돼지처럼 지저분한 모습을 드러냈고, 그것이 자식들에게 수치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성화)그것은 성경과는 무관한 탈무드에서 빚어낸 이야기입니다.
탈무드는 그만큼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는 것이 지혜의 근원이다, 하는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 것이죠.
그렇다면 성경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왜 노아는 술에 취했을까요?
사실 노아는 결혼한지 500년 동안 자식이 없었습니다.
결혼한지 500년이 되었을 때 첫 번째 아들 야벳이 태어나고, 15년 간격으로 함과 셈까지 얻게 되죠.
그만큼 500년간 인생에 낙이 없이 힘들게 살아왔던 노아였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100년에 걸쳐 방주를 짓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홍수 심판은 노아의 600세 때(창7:6)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죠.
그 후 방주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 방주 안이 천국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죠.
그 방주 안에는 온갖 짐승들이 으르렁거리고, 똥오줌 싸는 냄새, 그 가스로 질식당할 수 있는 곳이었죠.
멀정한 사람도 정신병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그런 방주였습니다.
그런 상태 속에서 그나마 온전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방주 위에 있는 창문 덕택이었죠.
그 창문을 통해 숨을 쉬고, 그 창문을 통해 햇빛을 공급받고, 하나님의 숨결을 공급받았던 것이죠.
그토록 힘든 과정을 견디고 드디어 1년 17일이 지나 방주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노아와 그 가족 식구들은 무엇을 했겠습니까?
온 세상이 물로 심판받았으니, 완전히 다 죽고 폐허더미만 남은 상태였겠죠.
그때부터 노아와 그 가족 식구들이 한 일이라고는 그 폐허를 하나씩 하나씩 일구는 일이었죠.
그것을 얼마 동안 했습니까?
노아가 홍수 후에 350년을 살았다(창9:27)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으니, 무려 350년간 폐허더미를 처리하고 새롭게 경작을 했던 것입니다.
그때는 이미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통해 다시는 물로 심판치 않겠다고 약속한 뒤였죠.
바로 그 무렵에 노아는 어떤 삶을 살았겠습니까?
이제는 삶의 여유가 생기고, 망령든 노인이라고 조롱하는 이도 무시하는 사람도 없었죠.
그야말로 자기 힘으로 온갖 어려움을 헤쳐나온 사람처럼, 이제 모든 고생을 뒤로한 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포도나무를 심고 그 포도열매즙을 마시고 잔뜩 취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삶이 힘들고 어려울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겸손한 노아였지만, 삶의 여유와 함께 자기 교만에 치닫게 된 모습아니겠습니까?
이제는 자식들 다 생겼고, 먹고 살 걱정도 없고, 노망들었다고 비난한 사람도 없으니, 그 환경에 스스로 장사가 된 노아였던 것이죠.
그것이 바로 자기 의로움, 자기 교만에 빠진 노아가 술에 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자기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다 결국 그렇게 추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죠.
그런데 누가 노아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노아보다 더 의롭다고,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런 노아의 치부를 드러내서, 하나님의 긍휼로 품어주시는 은혜를 베푸셨다는 점입니다.
(적용) 우리도 마찬가지죠.
내가 의롭기 때문에, 내가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의로운 게 아니죠.
내가 남들보다 도덕적으로 좀 더 깨끗하기 때문에 의로운 게 아닙니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있을 때 내가 의롭게 되는 것이죠.
나는 하나님 앞에 무지한 죄인입니다, 하는 그런 고백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노아가 의롭게 된 게 바로 그런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바로 그 사실을 욥이 42장에 이르러서야 깨닫게 된 것이었죠.
(발췌)김양재 목사의 그 책에 나온 이야기인데, 빌 하이벨스 목사님의 책에 나온 예화입니다.
미국의 풋볼리그 시카고 베어스에는 마이크 싱글테리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키가 작아 풋볼 선수로서는 재능이 없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죠.
하지만 그는 긍정적 사고에 관한 책을 탐독하고 노력하면 안 될 것이 없다는 신조로 풋볼에 집중했죠.
그러면서 후에는 풋볼 장학금도 받고, 시카고 베어스 팀에 영입되는 쾌거를 누렸죠.
그 후 10회 연속 올스타에 뽑혔고, NFL(내셔녈풋볼그리)에서 선정한 올해의 선수도 됐습니다.
그는 태클 1,300회, 단독봉쇄 800회, 전 선수생활 동안 단 2회의 결장 등, 온갖 눈부신 기록을 세웠죠.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는 어마어마한 부와 명예를 누렸고, 억만달러 규모의 사업체를 소유했습니다.
심지어 영화에 출연했고, 책도 써냈습니다.
그런 삶을 살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이 하나님께 뭔가를 해드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니 무슨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이 정도로 인기와 부와 영광을 누리는 것은, 당연히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과정 중에 생활은 나무랄 데 없이 철저히 통제했고, 사랑하는 아내는 출산을 앞두고 있었죠.
그런데 그때부터 기쁨도 없어지기 시작했고 두려움만 가득차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는 불을 켜지 않고는 잠을 잘 수가 없는 지경까지 처해졌습니다.
더욱이 성공의 최정점에서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갖는 그런 모습까지 보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을까요?
욥과 같이 자기 의로움에 갇혀 있는 사람이 봤다면 당장에라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포기하지 않고 그가 돌이키도록 회개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얼마나 자기 의로움에 사로잡혔는지, 얼마나 교만에 찌뜰었는지, 하나님 앞에서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내에게까지 자신의 모든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자기 의로움에 사로잡혀 살지 않고,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하고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적용)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나도 마이크 싱글테리가 될 수 있고, 나도 욥과 같이 자기 의로움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게 중요한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베푸시는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내음성)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실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나는 너무나도 무지한 자예요. 이런 저를 긍휼로 품어주세요.”
“저도 욥처럼 자기 의로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많아요.”
“저도 노아처럼 이제는 평안하고 안전한 상태라 내가 내 인생의 주체자가 될 때가 많아요.”
“날들보다 예배도 더 잘 드리고 율법적으로 부족함 없는 내 자아의 상태에 빠질 때가 많아요.”
“주님, 이런 나의 자아에 빠져 있는 저를, 자기 교만에 숨어 있는 저를, 긍휼히 여겨주시길 원해요.”
“이런 나의 치부를 주님의 말씀으로 수술해주시고, 더 겸손히 주님의 은혜를 바라볼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주님, 이 무지하고 연약한 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붙잡아 주세요.”
(찬양) 나 비로소 이제 깊고 넓은 바다 간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내 손을 주는 결코 놓치지 않으셨다.
나 비로소 이제 폭풍우를 뚫고 간다 비바람에 흔들리는
나약한 나를 잡아주시는 그분은 나의 주님.
주 나를 놓지 마소서 이 깊고 넓은 바다에 홀로
내 삶의 항해의 끝이 되시는 주님이시여.
난 의지합니다. 날 포기하지 마소서. 나 잠시 나를 의지하여도
내 삶의 항해의 방향을 잡아 주시옵소서.
이 깊은 바다에 날 홀로 버려두지 마소서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는 어떤 자녀이겠습니까?
자신이 누리고 있는 부와 명예와 능력을 자기 의로움의 결과로 여기는 교만한 자녀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무지함과 자기 연약함을 고백하며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겸손한 자녀를 긍휼로 품으신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그렇게 품으시고 세워주셨습니다.
욥을 그렇게 빚으시고자 그에게 고난과 역경을 주셔서, 깊으신 은혜 앞에 불러내신 것이었습니다.
김양재 목사님도, 미국의 풋볼리그 최고의 선수 마이크 싱글테리도, 그런 방법을 통해 은혜의 자녀로 세워주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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