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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에 이어 네로가 5대 황제로 즉위하자, 유대의 총독을 벨릭스에서 베스도로 새로 파견했습니다. 베스도는 유대 지방의 총독으로 새로 부임하자마자 골치 아픈 사건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유대 정치와 종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을 만나러 가이샤라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 때, 그곳의 유대 지도자들은 베스도에게 호의를 베풀어달라고 요청했죠. 그때의 호의를 바울을 예루살렘에 끌고 와서 다시금 심문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것이었죠. 하지만 신임총독 베스도는 바울을 그곳으로 불러 심문하기보다, 자신이 이제 가이샤라로 내려가니, 함께 가서 바울을 심문하자고 요청을 했죠. 그래서 신임 총독 베스도의 제안대로 유대 백성의 지도자들이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2년 전처럼 바울을 다시 고소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여전히 무죄임을 주장했고, 그 모든 상황을 들은 베스도는 바울의 범죄사실을 입증하지 못했죠. 그렇다면 응당 바울을 풀어주는 게 상책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신임총독 베스도는 유대 지도자들의 마음을 얻고자, 다시 말해 그들의 호의를 얻고자 바울을 풀어줄 수가 없었죠. 그런 상황에서 바울이 주장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자신은 로마의 호아제 카이사르 곧 네로 황제에게 상소한다고 말이죠. 바울은 유대 지도자들처럼 사람들의 호의, 사람들의 카리스를 원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카리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황제에게 상소한다고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요청하고 나섰을 때 신임총독 베스도는 어땠을까요? 한편으로는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해결하기 어려운 난감한 문제를 상위법정으로 넘길 수 있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대신에 그는 유대인들과 바울 간에 일어난 고소와 변론 내용을 상소자료로 준비해야 하는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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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바로 그 시점에 신임총독 베스도를 찾아 온 두 사람이 있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바울이 감금돼 있는 상태에서 수일이 지났을 때, 아그립바 왕과 베니게가 베스도 총독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아그립바 왕은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로서 A.D.48년에 삼촌이 다스리던 레바논과 안틸레바논 사이의 작은 왕국을 이어받아 다스린 자였습니다. 그는 유대의 대제사장 임명권과 회당의 통치권도 로마로부터 위임을 받고 있었죠. 더욱이 A.D.53년에는 빌립과 루사니아가 다스리던 지역까지 포함하는 큰 영토를 받았습니다. 아그립바 왕은 친로마 성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총독이 부임할 때마다 본문처럼 그를 예방해 경의를 표시하곤 했습니다. 아그립바 왕과 동행한 버니게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큰 딸입니다. 그러니까 남매가 지금 베스도 총독을 찾아온 것이죠.
본문 14절을 보면 신임총독 베스도는 자신을 문안하러 온 아그립바 왕과 여동생 버니게에게 바울과 관려된 사건에 대해 자문을 구하죠. 왜냐하면 부임 후 첫 번째로 맞이한 사건을 잘 처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자신을 찾아 온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에게 자신의 유능함을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베스도 총독은 본문 15-21절을 통해 지금까지 자신이 부임하여 바울과 관련된 재판 상황들을 상세하게 설명을 해 줍니다. 이른바 예루살렘에 올라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인사하려고 갔을 때부터 그들과 함께 가이샤라에 와서 바울을 심문한 내용들에 관한 것이었죠.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하고 심문하고자 한 내용은 로마법에 관한 게 아니라 유대인들의 법에 관한 것이고, 유대인들이 경원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이죠. 본문 18-19절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바로 그들의 종교 문제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지난 총독 벨릭스 재임기간 중 2년 동안에 걸쳐서 말썽을 피웠고, 이번에도 내가 새로 부임했는데 또다시 그 문제를 걸고 넘어지는 저들의 모습입니다, 하고 아그립바 왕에게 이야기하는 상황입니다.
계속해서 베스도 총독은 아그립바 왕에게 본문 20-21절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완강하게 고집하는 유대인들과 아무런 악행이 없는 바울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바울에게 직접 물어봤다고 말이죠. 그래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심문을 받겠느냐, 하고 물었는데, 바울은 그때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에게, 다시 말해 5대 황제 네로에게 가서 직접 판결을 받겠다는 요청을 했다고, 지금 아그립바 왕에게 상세하게 이야기를 하는 상황이죠.
신임총독 베스도로부터 이런 상황들을 전해들은 아그립바 왕이 어떻게 합니까? 본문 22절입니다.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베스도 총독에게 지금까지의 재판 상황을 전해들은 아그립바 왕은 바울의 말을 직접 들어보고 싶어한 모습입니다. 왜죠? 아그립바 왕도 유대교 안에서 예수가 부활했다는 바울의 그 말을 자세히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튿날 접견 장소에서 만나게 되죠.
본문 23절입니다.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베스도 총독은 아그립바 왕을 위해서 바울을 접견 장소로 데리고 오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접견장소’로 번역된 헬라어 ‘아크로아테리온’은 ‘강당’을 뜻하는 라틴어 ‘아우디토리움(auditorium)’과 동의어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만큼 그곳은 심문을 위해 마련된 재판장이 아니라 공청회나 청문회장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아크로아테리온’ 곧 청문회장에는 바울도 있고, 바울을 고소하는 유대인들, 신임총독 베스도, 아그립바 왕, 그리고 가이사랴의 높은 권력자들이 함께 자리에 앉아 있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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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베스도 총독은 바울을 심문하는 사건의 개요를 다시금 설명을 해 주죠. 본문 24-27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무슨 말씀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 바울은 유대인들이 요구하는 것처럼 어떤 죽일 죄목도 없는데, 다만 그가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는 바람에 지금 그곳으로 보내기로 결정을 했지만, 어떤 상소할 자료를 얻고자 아그립바 왕 앞에 세운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상황입니다. 베스도의 그 이야기처럼 바울에게는 어떤 죄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전의 천부장 루시아가 분별했던 바요, 전임 총독 벨릭스도 분별했던 바였습니다. 그것은 지금 신임 총독 베스도도 마찬가지였죠.
이처럼 바울의 무죄가 확실한데도 왜 베스도 총독도 전임 벨릭스 총독처럼 바울을 풀어주지 못하는 것입니까? 유대인들의 여론을 의식한 탓이요, 궁극적으로 자신의 정치적인 명분을 놓치지 않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도 바울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복음을 듣고 있었고, 그 복음의 증인이라는 명분 때문에 바울이 이런 결박과 환란을 당한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그는 끝내 복음의 명분보다 세상의 정치적인 자기 욕망의 명분을 따른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베스도의 그릇된 명분을 통해 바울에게 더 곧은 복음의 명분을 심어주고 계신다는 사실이죠. 고린도후서 4장 8-10절 말씀처럼 우리에게 복음의 명분이 서 있으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는 주님의 은혜를 덧입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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