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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랴에 머물고 있는 로마 총독 벨릭스는 바울을 5일간 구금시켜놓고 있었습니다. 그때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몇 몇 장로들이 변호사요 말장이였던 더둘로를 데리고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그러자 총독 벨릭스는 바울을 법정에 세웠죠. 그때 더둘로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뜻을 받들어 바울을 세 가가지로 고소했죠. 바울이 전염병 같은 자로 천하를 선동한 자요, 바울이 나사렛 이단의 괴수요, 바울이 성전을 더럽힌 자라고 말이죠. 그때 바울은 그 세 가지 죄목이 모두 거짓임을 변론했습니다.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지 12일밖에 안 되고, 자신은 정치적인 목적이 아닌 예배와 의식 때문에 올라간 것이고, 이단의 괴수가 아니라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긴 것 뿐이고, 성전을 더럽힌 게 아니라 정결예식을 행한 것 뿐이라고 반론을 폈습니다. 그때 로마 총독 벨릭스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바울을 처결하는 대신 재판을 더 연기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구금시키도록 하는데, 대신에 바울의 동료들이 바울을 돌봐줄 수 있는 범위는 허락하죠. 아울러 로마 총독 벨릭스는 그의 아내와 함께 바울을 찾아가죠. 바울로부터 어떤 평안과 축복을 듣고자 함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바울에게 돈을 받고자 하는 것 곧 뇌물을 받고자 하는 까닭도 있었죠. 그래서 더 자주 바울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지만, 바울은 그 어떤 뇌물도 쓰지 않았죠. 왜냐하면 오직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태’ 곧 ‘2년’이 지났습니다. 2년이 지났을 때 로마의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Claudius A.D. 41-54)에서 제 5대 네로 황제(Nero A.D.54-68)가 임명이 되고, 네로는 유대 땅의 총독으로 새로운 베스도 총독을 부임케 하죠. 바울은 2년간 가이사랴에 구금된 상태였고, 그 사이에 로마의 총독은 새로 바뀐 상황이죠. 그런데 새로 부임한 베스도 총독이 어떻게 합니까? 아무리 그가 로마 사람이라 할지라도 유대 땅에 부임한 이상 유대인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이죠. 그만큼 그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유대인들의 호의를 얻고자 계속 바울을 구금시키게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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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1-3절입니다.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신임 총독 베스도가 부임한 지 3일이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보여주는 행동이 있었죠. 유대인들의 마음을 확실히 얻고자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이었죠. 왜죠? 유대 백성들을 지배계층인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의 마음을 얻고자 함이었죠. 그런데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신임총독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바울을 또 다시 고소하고 나선 것이죠. 심지어 그들은 베스도 신임총독의 호의를 원하면서 바울을 고소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호의’로 번역된 헬라어 ‘카리스’는 ‘은혜’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 단어의 주어가 하나님이 되면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이고, 이 단어의 주어가 사람이 되면 ‘호의’가 되는 것입니다. ‘호의’란 인간이 제도권 안에서 권력을 행사할 경우 청탁을 통해 주고 또는 받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은혜’란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과 희생으로 주어지는 선물이죠.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은혜로 주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은 권력을 위임받은 베스도 총독에게 청탁을 해서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는 상황입니다. 그 요청이 무엇입니까? 지난 2년간 감옥에 수감돼 있는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달라는 것이죠. 왜요? 바울을 데리고 오는 사이, 길에서 매복을 해 있다가 바울을 처결하고 싶은 까닭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볼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지난 2년간 바울을 향해 분노를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바울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이죠. 마치 예수님을 향해서도 그렇게 여겼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때 신임총독 베스도는 바울이란 자가 가이사랴에 무사히 감금돼 있으니, 그를 고발하고자 하면 자신과 함께 내려가자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은 더 높고 강한 권력을 가진 유대의 총독 베스도에게 ‘호의’를 베풀어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입니다. ‘호의’를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했던 것이죠. 그만큼 그런 일을 그들은 ‘카리스’ 곧 은혜로 여기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지난 2년 동안 아무런 ‘호의’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우리가 읽었던 24장 26절에 보면 이전 총독이었던 벨릭스는 바울에게 ‘호의’를 베풀고 돈을 받을 생각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단 한 차례도 그에게 ‘호의’를 구걸하지 않았죠. 왜죠?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주어로 삼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경배의 대상자이신 하나님을 주어로 삼을 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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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본문 6절로 이어집니다.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신임 총독 베스도는 예루살렘에서 약 8-10일을 보내고 가이사랴로 내려가죠. 그리고 이튿날에 바울을 불러 재판장에 세웁니다. 그때 예루살렘에서 함께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에워싸고 여러 가지 죄목들을 걸어서 고발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충분한 증거를 찾지 못했죠. 2년 전과 똑같은 상황인 셈입니다.
그러자 본문 8절 말씀처럼 바울이 그들 앞에서 변호를 합니다. 이른바 사도행전 23장 1절에서 산헤드린 의원들 앞에서 변호했던 것처럼, 사도행전 24장 16절에서 이전 총독 벨릭스 앞에서 변호했던 것처럼 동일하게 변호를 하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그리고 세상법적으로도 전혀 죄가 없다고 변론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베스도 신임총독이 어떻게 합니까? 본문 9절에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베스도 신임총독은 또 다시 유대인들의 마음 곧 유대인들의 ‘호의’를 얻고자 바울에게 묻는 상황입니다. 그만큼 베스도 총독은 하나님의 ‘카리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온통 권력자들의 호의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던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호의를 얻고자 바울에게 예루살렘 올라가서 심문을 받으면 좋지 않겠느냐, 하고 말하는 상황이죠.
그때 바울은 신임총독 베스도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죠. 왜 거절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어주신 카리스 곧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죠.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죽이고, 교회를 잔멸하는 앞잡이였던 자신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와 구원시켜 주신 그 은혜 말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사도행전 9장 15-16절을 통해 너는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 네가 내 이름을 위해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다.”하신 은혜의 사명을 부여해 주셨죠. 그걸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이죠. 아울러 산헤드린 공회원들 앞에서 변론하다가 감옥에 감금되었을 때 주님께서 찾아와 격려해 주신 그 카리스 그 은혜를 기억하고 있었죠. 사도행전 23장 11절에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로마에까지 가서 주님의 카리스 주님의 은혜를 증언하기 위해서, 그래서 바울은 베스도 총독의 예루살렘 행을 거절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1절 하반절 말씀처럼 “내가 가이사께 상소 하노라”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 곧 5대 황제 네로에게 상소하겠다는 거죠.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로마로 가겠다고 담대하게 선포한 거죠.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나는 베스도 총독이나 유대 지도자들처럼 사람에게서 ‘카리스’를 구하는 자인가, 바울처럼 어떤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카리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인가? 하는 것이죠. 인생은 별 것 아니지만, 인생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사는 자들에게 매순간 바울처럼 하나님의 ‘카리스’로 인도해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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