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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자객 40여명이 바울을 죽이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천부장 ‘루시아’는 총병력 472명을 동원해 바울을 호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이틀이나 걸려 가이사랴의 총독 벨릭스 앞에 서게 했습니다. 물론 총독 벨릭스는 바울을 그 즉시 심문하지 않고, 바울을 고발하는 자들이 올 때, 그때 비로소 심문을 하고 판결을 하겠다고 하면서, 바울을 헤롯 궁에 거하게 하면서 지키게 했죠.
오늘 본문은 그로부터 닷새가 지나서 일어나는 공판 내용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 바울이 벨릭스 총독에게 붙잡혀 있는 5일만에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몇 몇 장로들 그리고 변호사 더둘로가 함께 내려와 총독 앞에 선 상황입니다. 그들도 이틀 정도 걸려서 왔을 것이니, 무척이나 피곤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렇게 서둘러서 나타났다는 것, 그것도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심지어 변호사까지 대동했다는 것은 바울이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고 있었는지, 또 바울을 얼마나 제거하고 싶어 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총독 벨릭스가 그런 고발자들 앞으로 바울을 불러 세웠는데, 이제 변호사이자 유창한 연설자인 더둘로는 총독 벨릭스에게 모든 유대인들의 뜻을 대변하여 바울을 세 가지로 고발을 하죠.
그 첫 번째 고발 내용은 본문 5절에 있습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변호사 더둘로는 전염된 병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많은 사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것처럼, 바로 바울이 로마에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전염병자다, 다시 말해 폭등의 불씨와도 같은 자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잦은 폭등에 시달려온 총독 벨릭스에게 폭등의 불씨와도 같은 전염병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너무나도 민감한 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런 자를 가만히 내버려두었다가는 로마는 물론이고 벨릭스 총독에게도 해가 될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 절대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두 번째 고발 내용은 본문 5절 하반절에 있습니다.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여기에 사용된 ‘이단’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정통 교리에 어긋난 무리’라는 뜻이고, 로마인들에게는 ‘불순한 자들’ 곧 ‘정치적인 폭동을 일으킬 수 있는 무리’라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을 절대 묵과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처벌해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더둘로가 이야기하는 바입니다.
세 번째 고발 내용은, 6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이른바 바울은 성전을 더럽히려 하던 자라는 것입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사두개인들이었는데, 그들은 로마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로마 권력의 비호 아래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죠. 그러니 성전의 제사장인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것 자체를 성전을 더럽히는 일로 간주했고, 자신들의 뜻에 따르지 않는 자들은 결국 로마 당국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단정해 버렸던 것이죠. 바로 바울이 그런 자라고 변호사 곧 말쟁이 더둘로가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본문 9절의 말씀처럼 함께 따라 온 유대인들도 나서서 더둘로의 말이 옳다고 주장하고 나서는 상황이죠. 그렇다면 총독 벨릭스는 더둘로의 말에 따라 바울을 즉결 심판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총독 벨릭스는 더둘로의 고발만으로 판결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바울에게도 변론할 기회를 주죠.
본문 10절 말씀은 바울이 벨릭스 총독에 대한 호의적인 발언을 하는 모습입니다. 일단 자신에게 변론할 기회를 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 격이죠. 그러면서 이제 본문 11-13절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과 유대인들을 소란케 했다는 대한 그 ‘소요죄’의 고발 내용을 반박합니다. 변호사요 말쟁이인 더둘로가 자신을 향해 전염병과 같은 자라고, 그런 소란을 피운 자라고, 한 그 부분에 대해 반박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간 지 12일밖에 되지 않았고 이 시간은 유대인들을 선동할 충분한 시간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예루살렘에 간 것은 정치적인 의도 때문이 아니라 예배와 의식을 행하기 위함이요, 바울을 고발한 그 누구도 바울이 무리를 소동케 한 일을 본 적이 없기에,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못할 것이라고 변론을 합니다.
본문 14-16절에 이르기까지, 더둘로가 제기한 두 번째 고발 내용,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고발한 내용에 대한 반론을 제기합니다. 바울은 여전히 하나님을 순수하게 믿고 있고, 그런 하나님에 대한 소망은 자신을 고발한 사람들조차도 동일하게 고대하는 소망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기에 자기 자신은 정치적으로 불순한 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결코 이단도 아니라고 반론을 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바울이 반론을 합니다. 변호사 더둘로가 바울을 향해 성전을 더럽히려 한다는 고발을 했는데, 그에 대한 반박을 하는 것이죠. 그 내용이 본문 17-20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더둘로는 바울이 성전을 소란게 했다고 고발했지만, 정작 바울을 고발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다 보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저 자신은 성전에 나가 절차에 따라 정결 예식을 한 것이었지, 어떤 소동을 일으킨 게 아니었다고 말입니다. 만약 목격자가 있었다면 당연히 고발했을 텐데, 그렇지 않았으니, 그들의 고발이 바로 거짓이라고 반론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와 같은 두 사람의 주장을 들은 로마 총독 벨릭스가 어떻게 합니까? 본문 22절에 보면 로마 총독 벨릭스도 바울이 전하는 그 도에 대해 이미 자세히 알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경로로 기독교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그 도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재판을 연기하도록 하죠. 대신에 백부장에게 명령을 내려 바울을 지키도록 하고, 대신 자유를 주어서 친구들도 돌봐줄 수 있도록 하라고 하죠.
이와 같은 내용을 통해 바울의 어떤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까? 바울에게 거짓누명과 억울함이 덧씌워진 상황의 모습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상황속에서도 거짓된 고발을 담대하고 침착하게 반박하며 변론하는 모습이죠. 그런데 그렇게 상반된 두 모습처럼 보이는 바울에게는 ‘변치 않는 하나의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5-16절이 그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하나님을 향한 부활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는 마음’, 바로 그것이 바울이 지녔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바울로 하여금 주님의 나라를 향해 걷게 한 것이었고, 그 마음이 어떤 결박과 환란 속에서도 담대하게 주의 길을 걷게 한 원동력이었던 것이죠.
바울의 그런 한결같은 마음과 그에 따른 삶을 보여주는 하건이 본문 24절 이하에 나오죠. 수일이 지나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도에 대해 듣고자 합니다. 어쩌면 자신들에게 바울이 평안과 축복에 대해 얘기해 주지 않겠나 싶었던 것이죠. 하지만 바울은 25절 말씀처럼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해 총독 부부에게 강론을 했다는 점입니다. 그로 인해 벨릭스 총독이 두려워했다고 증언해 줍니다.
바울에게 어떻게 이런 용기가 가능했을까요? 저 같으면 총독 앞에서 어리광을 떨면서 평안과 축복을 이야기했을 것 같은데 말이죠. 바울은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바라봐야 할 것은 이 세상 권력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의인과 악안의 부활, 곧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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