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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유머) 세 명의 할머니가 자식 자랑으로 수다를 떨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할머니가 말하기를 “우리 아들은 교회 목사라우. 남들은 울 아들더러 오, 고귀한 분. 하고 말한다우.”
그러자 두 번째 할머니가 말합니다.
“우리 아들은 교황이지. 남들은 내 새끼더러 고결한 양반. 하고 말한다우. 이젠 더이상 높은 사람은 없지?”
이때 마지막 세 번째 할머니가 말합니다.
“그런데 이걸 우짜노. 우리 아들은 숏다리에 곰보에 뚱보인데. 남들은 우리 아들을 보면 다들 이러는 기라. Oh my God!”
(유머2)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미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신 분, 손들어 보세요.”
아무 반응이 없자 다시 물었습니다.
“정말로 아무도 없습니까?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그때 저 뒤에서 한 할아버지가 손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요청했습니다.
“할아버님,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지 우리에게 말씀해주세요.”
그러자 나이가 들어 힘없는 목소리로 그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응 있었는데. 다아 죽었어.”
(깨달음)누군가 그렇게 기도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며 살기에도 짧은 인생입니다”하고 말입니다.
미워하고 질투하기보다 사랑하고 이해하고 배려하며 사는 것이 가장 값진 삶입니다.
미워하고 다투고 증오하며 살다가 “다아 죽었어”하면 그보다 더 허망한 인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랑하고 배려하고 공감하며 사는 삶이 가장 귀한 삶이죠.
“응. 있었는데. 다아 죽었어”해도 사랑을 베푼 누군가의 인생은 그가 죽을 때까지 남는 법 아니겠습니까?
(예화)〈누구나 할 수 있는 좋은 일〉이란 아름다운 시가 있습니다.
부자가 아닌 사람도 넉넉한 마음으로 친절을 베풀 수 있습니다.
학력이 많지 않은 사람도 지혜로운 마음으로 실의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리더십이 없는 사람도 선한 일로 본을 보일 수 있습니다.
설득력 있게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진실한 말로 믿음을 줄 수 있습니다.
외모가 아름답지 못한 사람도 아름다운 마음으로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힘이 약할지라도 기도로 크게 도울 수 있습니다.
(깨달음)사랑은 많이 가진 자만 하는 게 아니라 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부자가 아니어도, 똑똑한 사람이 아니어도, 외모가 아름답지 못해도, 친절과 진실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남을 돕는 구제와 사랑은 정작 내가 필요할 때 돌려받는 은총임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19:17)
(성화)스라랴 7장을 보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금식을 계속 해야 되는지 묻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나라가 패망한 것은 하나님 앞에 잘못 산 까닭이요 그 삶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금식을 해왔었다는 것입니다.
4월의 금식일, 5월의 금식일, 7월의 금식일, 그리고 10월의 금식일을 정해놓고 금식한 것이었죠.
그런데 앞으로도 그렇게 계속 금식을 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물은 것이었습니다.
그때 스라랴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그것입니다.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8:16-17)
(깨달음)하나님께서는 형식적으로 금식하는 그 모습보다 진실한 삶을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웃과 더불어 진실되게 소통하며 사는 모습을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성문에서 진실되고 화평한 재판을 하며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 말이죠.
상대방을 해롭게 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사는 걸 말입니다.
그런 모습 없이 하나님 앞에 금식한다는 것은 실은 위선이요 하나님을 조롱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적용)그래서 이사야서에서도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58:6-9)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금식은 그저 남에게 보이고 과시하기 위한 금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을 옥죄며 살고 있다면 그것을 풀어주는 게 참된 금식이라는 거죠.
누군가를 압제하고 있다면 그 압제로부터 자유케 해 주는 것, 멍에를 풀어주는 게 참된 금식이라는 거죠.
누군가 주린 자가 너에게 먹을 것을 원한다면 기꺼이 콩 한 조각이라도 나눠주는 것이 참된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집이 없어 떠돌고 있다면 너의 집에 들여 잠자리를 제공하거나 여관을 잡아주는 것이 참된 금식이라는 말씀입니다.
누군가 옷이 없어 추위에 떨고 있다면 이불과 같은 옷을 주고, 네 사촌이 뭔가를 원할 때 모른 척하지 않는 게 참된 금식과 다를 다 없다는 말씀입니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어려움에 처한 형제나 자매나 사촌이나 이웃을 향해 구제하고 사랑을 베푸는 삶입니다.
남을 구제하고 사랑을 베푸는 삶이 금식하는 것보다 백번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렇게 구제하고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산다면 네가 정작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신혹하게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혹여라도 네가 병들어 있다면 너를 향한 하나님의 치료가 급속할 것이라고 약속한 말씀입니다.
바로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길이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린도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본토를 연결하는 좁고 잘록한 땅의 서쪽 끝에 위치한 곳입니다.
남북과 동서를 잇는 무역항이 있어서 상업의 중심지요 부의 중심지라 사치와 향락이 판을 치는 도시였습니다.
해발 575m에 ‘아크로폴리스’ 성채를 세웠고 그 중심에 ‘아프로디테 신전’ 곧 비너스 신전이 있었죠.
거기에 1천 명이 넘는 여사제가 낮에는 신전에서 섬겼고 밤이 되면 시내에 내려와 매음을 하던 창녀와 같다고 했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아테네보다 더 큰 로마제국의 네 번째 도시로서 사실상 그리스의 중심지였습니다.
인구 60만 명을 헤아리는 그곳에서 바울은 1년 반가량 유스도의 집에서 머물며 복음을 전하고 고린도교회를 세웠습니다.
사도행전 18장 후반부를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을 나서는데 아시아 지역의 중심지인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3개월은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는데 많은 유대인이 훼방하자 주님의 제자들을 따로 세워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전했죠.
2년간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전하고 평상시 일할 때 닦던 천조각을 병든 자나 귀신 들린 자에게 얹으면 병이 고침받고 귀신이 떠나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무렵 바다 건너 고린도교회의 음행의 문제 파벌의 문제 방언과 같은 은사자랑의 문제, 우상제물의 취식문제가 들려왔죠.
그래서 총 네 번 편지를 썼고 젊고 유순한 디모데를 파송하기도 했고 또 나이가 많지만 강단있는 디도를 보내기도 했죠.
우리에게 남은 편지는 고린도전후서 두 개인데 디도가 문제를 잘 해결하고 와서 에베소를 떠나면서 바울이 직접 고린도에 방문해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전개)그 중 우리가 3주째 읽고 있는 고린도전서 13장은 12장의 은사 문제를 정리하면서 쓴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자신이 받은 은사, 방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 병고치는 은사를 최고로 여기며 남을 무시하고 있었죠.
방언을 받은 성도들은 예배 중에도 심지어 타인과 대화하는 중에도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면서 우쭐대기도 했고요.
그래서 바울은 우리 몸을 빗대서 손과 발과 코와 입처럼 외적으로 드러나는 기관이 있는가 하면 신장과 폐와 장기들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인 기관들도 있다고 말했죠.
하지만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다들 소중한 지체들이지 않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어느 지체가 잘났다고 뽐낸다면 다른 지체가 소외되는 게 아니냐면서,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조화와 통일을 이루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12장 말미에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하면서 13장에 이르러 ‘사랑’에 대해 말한 거죠.
고전 13장 1-3절은 사랑의 필수성에 대해서 4-7절은 사랑의 정의에 대해서 8-13절은 사랑의 영원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고린도전서 13장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문헌 중 가장 아름다운 찬가요 사랑의 교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깨달음)그래서 1절 말씀을 통해 깨달은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13:1)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방언과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받은 천사의 말은 다 같은 말인데, 그것을 주신 목적이 중요하다고 했죠.
그 방언은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과 교제와 공감과 이해를 위해 주신 것이지 그걸로 자기 우월의식에 빠져서는 안되는 거죠.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은 방언으로 소통의 장을 마련했지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걸로 자기 우월의식에 빠진 거죠.
그래서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그런 방언과 천사의 말은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곧 소음에 불과하다고 한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듯 타인에 대한 소통과 공감과 배려가 없으면 아무리 유창한 방언을 한다 한들 소음과 같지 않겠냐 하는 뜻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은 1절 말씀을 그렇게 번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의 유창한 말과 천사의 황홀한 말을 해도 사랑하지 않으면 녹슨 문에서 나는 삐걱거리는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 살펴본 2절 말씀을 통해서 깨달은 바는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13:2)
‘예언’이란 헬라어 원어는 ‘점쟁이’를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가 그 말씀으로 시대와 상황을 해석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올바른 삶을 살도록 선포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비밀이란 헬라어 원어의 뜻은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을 말하는 것으로 성령의 영감을 통해서만 깨닫는 것이라고 했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란 과장법 중의 하나로 진짜로 바다에 빠트리는 믿음이 아니라 누가 봐도 큰 믿음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죠.
(적용)중요한 것은 아무리 내가 말씀을 잘 전하고 성령의 영감으로 모든 비밀과 지식을 깨닫고 누가봐도 큰 믿음을 지녔어도 사랑이 없다면 ‘Nothing’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누군가 주님 앞에 나와 “주님 내가 주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큰 권능을 행했습니다.”하고 자랑하는데 주님은 “도무지 너를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야 내게서 떠나가라”(마7:23)하는 것과 같은 격이라고 말이죠.
그렇기에 설령 내가 말씀을 절 전하지 못해도, 모든 비밀과 지식을 깨닫지 못해도, 큰 믿음이 없어도, 교회 성도들을 배려하고 공감하고 섬기고 있다면 그게 가장 귀하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오늘은 본문 3절 말씀을 집중해서 보시는데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원해)여기에 ‘구제’라는 헬라어 ‘ψωμίζω’(프소미조)는 어린이나 어린 동물에게 ‘먹이다’(to feed) ‘입에 넣어주다’는 뜻입니다.
누군가 연약하고 힘든 자에게 먹을 것을 입에 넣어주는 것, 그것이 구제의 본 뜻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란 재산과 소유를 말하지만 재능과 달란트와 그의 모든 역량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제’란 부자나 똑똑한 사람이나 능력있는 사람만 하는 게 아니라 긍휼어린 마음이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부자가 아니어도, 학력이 많지 않아도, 리더십이 없어 보여도, 외모가 그렇고 그래도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고 힘이 약해도 기도로 도울 수 있듯이 말입니다.
(원해2)내 몸을 ‘불사르게’ 내준다 할 때 ‘불사르다’는 헬라어 ‘καίω’(카이오)는 ‘타서 녹아내리다’는 뜻입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겁다’(눅24:32)고 할 때도 그 단어가 사용됐습니다.
그만큼 누군가를 위해 자기 몸을 불태우고 녹아내리면서까지 내어주는 행위를 말한 것입니다.
(역본)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은 본문 말씀을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순교자처럼 불살라질 각오를 하더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깨달음)궁극적으로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준다”는 말씀은 한 마디로 구제하고 나누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끊임없이 강조하는 게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아보며 구제하는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었죠.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먹을 것이 없는 자에게 먹을 것을 입에 넣어주고 잘 곳 없는 자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이죠.
친척과 골육이 아픔에 처할 때 모른 척하지 않는 것 말이죠.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금식과 똑같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제하고 남에게 나누고 베풀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제하지 말고 남에게 나누지도 베풀지도 말라는 말씀입니까?
아니죠.
구제하고 남에게 나누고 베풀되 사랑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적용)우리 주님께서도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를 통해 그 사실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세리는 자신이 죄인이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알기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기도를 했죠.
그런데 바리새인은 기도할 때 그들과 따로 떨어져서 자신을 과시하듯이 자랑하듯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나님, 보십시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합니다. 나는 소득의 십일조도 드리고 있습니다. 나를 잘 아시죠?”(뉵18:12)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무슨 뜻입니까?
너희들은 남에게 자랑하듯이 금식하고 곡물과 채소까지 십일조 하는 걸 드러내고 있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그것도 중요하겠지만 그 속에 사람에 대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는 뜻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해서 금식하고 곡물의 십일조까지 드린다면 그 속에 사람에 대한 긍휼과 구제와 자비로운 마음까지 담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기뻐하지 않겠느냐 하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드린 십일조를 영적으로 기뻐받으셨고, 그것을 성전의 레위인들과 성전관리비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 마음과 자세를 너희들이 헤아리고 있다면 너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에 사람에 대한 긍휼과 구제와 자비로운 마음까지 담아서 드릴 때 하나님께 복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신 뜻입니다.
(적용)그런데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그렇게 구제하며 사는 성도들이 있었지만 사람에 대한 긍휼과 사랑이 없이 자기 과시용으로 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이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사람에 대한 사랑과 긍휼이 없는 구제가 너희들에게 어떤 유익이 되겠느냐 하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금식을 기뻐받으시되 흉악의 결박과 멍애를 풀어주며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과 옷을 주고 혈육의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여기며 구제하는 사람의 삶을 기뻐받으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일조를 기뻐받으시되 레위인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향한 긍휼의 마음을 품고 드리는 십일조를 기뻐받으시고 그에게 신속한 응답의 복을 베풀어주시는 줄 믿습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타인을 향한 긍휼과 자비의 마음으로 구제하는 삶의 은혜를 베푸시는 줄 믿습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으로 오늘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친히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미워하고 질투하기보다 사랑하면서 살기에도 너무나 짧은 인생이지 않더냐?”
“누군가 너에게 사랑을 베풀고 이해하고 도움을 준 인생은 그가 죽었을지라도 너에게 평생토록 잊혀지지 않는 법 아니더냐?”
“네가 돈이 있고 지혜가 있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긍휼과 자비가 있어서 구제하는 것 아니겠느냐?”
“금식하는 것도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드리는 것이지만 레위인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이들에 대한 긍휼과 자비의 마음으로 드리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게 네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에 대한 긍휼가 자비로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께서 너의 기도에 신속하게 응답하신다고 약속하지 않더냐?”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도 그렇게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주는 이들이 있었지만 자신을 드러내고 과시하는 모습일 뿐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없는 것이기에 유익이 되지 못한다고 한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하나님께 드리는 금식을 하고 십일조를 드릴 때 레위인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향한 긍휼의 마음을 품고 드린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기뻐받지 않겠느냐?”
“그런 네가 간절히 기도할 때 어찌 신속하게 응답하지 않겠느냐?”
“네 형제와 친척이 어려움에 처할 때 네가 모른척 한다면 어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네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누군가 굶주림에 처할 때 그에게 빵 한 조각을 먹여준다면 어찌 하나님의 사랑이 네 안에 풍성하게 자리잡지 않겠느냐?”
“다만 너의 구제와 긍휼과 자비가 너를 과시하는 차원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사랑이 되도록 은밀한 중에 갚으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할 때 하나님의 응답이 너에게 신속히 임하지 않겠느냐?”
(찬양)내게로 부터 눈을 들어 주를 보기 시작할 때 주의 일을 보겠네
내 작은 마음 돌이키사 하늘의 꿈꾸게 하네 주님을 볼 때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낄 때
내 삶은 주의 역사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하네
성령이 나를 변화시켜 모든 두렴 사라질 때 주의 일을 보겠네
황폐한 땅 한 가운데서 주님 마음 알게되리 주님을 볼 때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느낄 때
세상은 주의 나라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
(예화)구두장이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이 구두장이 할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은 예수님을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나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꿈 속에 나타나 내일 너희 집을 방문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어찌나 기뻤던지 온갖 정성을 들여 음식을 가득 차려놓고 기다렸습니다.
마치 죽은 조상에 대해 진수성찬을 준비해 차례상을 차려놓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예수님은 그날 저녁 가게문을 닫을 때까지도 오지 않았습니다.
단지 거지가 한 번 오고, 또 한 번은 청소부 할아버지가 오고, 저녁땐 사과장수 아주머니가 왔을 뿐이었습니다.
실망감에 빠진 그 할아버지는 그만 그 음식을 거지와 청소부 할아버지와 사과 장수 아주머니에게 나눠 주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모두 너무나 불쌍하게 보였고 실제로 추위 때문에 또 배고픔 때문에 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예수님께서 꿈 속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그 구두장이 할아버지는 왜 오시지 않으셨느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뜻밖에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오늘 너희 집에 세 번 갔었는데 세 번 다 대접을 잘 받았다.”
“참으로 너는 나를 사랑하는 줄을 알겠다.”
“네 이웃에 사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 곧 나를 대접한 것이다”
(깨달음)이 이야기는 톨스토이의 작품 속에 나오는 것으로 마태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장면을 연상케 하는 내용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 의인으로 판결을 받은 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죠.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 돌봐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와 주었다”하고 말입니다.
그때 언제 주님께 한 일이냐고 물어봤을 때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있는 네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하고 말입니다.
(예화)어느 할머니가 아침 일찍 백화점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그 순간 팡파르가 울리며 폭죽이 터졌습니다.
할머니는 깜짝 놀라 영문을 몰라 당황했습니다.
그러자 백화점 사장과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 와서 축하를 하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축하합니다. 저희 백화점 백만번째 고객이십니다. 축하금 백만원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 직원이 물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 뭘 사러 오셨나요?”
그때 할머니가 뭐라고 말했을까요?
“응. 이 물건 무르러 왔어.”
(깨달음)행운이 왔는데도 무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것을 무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이란 가난하고 연약한 자를 사랑으로 구제하는 삶이요 신속히 응답받는 비결인 줄 믿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를 것처럼 남을 위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자기 자랑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바리새인처럼 과시용으로 하는 기도나 십일조보다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갖고 하는 기도와 십일조를 기뻐받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자비와 사랑의 마음으로 하는 구제를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고 우리가 다급할 때 신속히 응답해주시는 은총을 저와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내기도)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행운이 밀려오는데 그걸 무르려는 사람보다 어리석은 사람은 없는 줄 압니다.”
“주님께서 제게 구제하는 그 삶이 신속하게 응답받는 비결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비록 돈과 지식과 힘으로는 구제할 수 없어도 주님께서 내게 주신 달란트와 재능과 기도로 누군가를 향한 구제의 삶을 살 수는 있을 거예요.”
“뭔가 자랑하고 떠벌리듯이 구제하지 않고 오른 손이 한 일 왼손이 모르게 구제할 때, 그 사랑의 구제를 주님께서 기뻐받으실 줄 믿어요.”
“그때 제가 주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릴 때 신속하게 응답해주신다고 약속하셨사오니 그런 은총을 저에게도 베풀어주세요.”
(찬양)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군가를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 준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금식도 하고 곡물과 채소까지 십일조를 했지만 주님은 사람에 대한 긍휼과 자비로운 마음을 갖고 하나님께 드리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과시하거나 자랑치 않고 은밀한 중에 갚으신 그 하나님께 하듯 사람에 대한 자비를 잊지 않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신속하게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명절에 제사상을 차려 조상의 혼을 달래려는 어리석은 세상 사람의 길보다 그 음식으로 어려운 이웃에게 나눌 때 주님께서 더 큰 응답으로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총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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