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설교열기)(나예)제 어머니는 주일 오후가 되면 제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습니다.
“다 나왔대? 새로 나온 사람은 없냐?”
그러면 저는 “예 다 나왔어요.”하고 대답을 합니다.
“지난 번에 새로 나오셨던 분들도 다 나왔어요.”하고 말이죠.
매번 똑같지 않는 상황이지만 똑같은 답을 하는 것은 어머니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제 딴에는 어머니를 향한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저의 어머니가 올해 91세인데 작년과 달리 더 야위었습니다.
살도 많이 빠지고 기운도 없어서 유모차를 몰고 갈 때도 몇 번 쉬어가는 상황입니다.
몇 해 전에 압해도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가 몇 달 뒤에 시골 집에 가셨는데 시골에 가서도 유모차를 끌고 밭에 왔다갔다 하라고 했습니다.
나이 들어 움직여야 그래도 건강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이별하는 때요 저 영원한 천국으로 입성하는 날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살아계신 부모님들에게 더욱 사랑으로 섬겨야 하는 것이죠.
(깨달음)주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부모님 제삿날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놓고 절을 합니다.
그러면 부모님의 혼령이 찾아와 음식을 먹고 ‘고맙다’하고 해 줄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 누구든지 이 땅에서 숨을 거두면 구천을 떠도는 게 아니라 곧바로 음부와 낙원으로 가게 됩니다.
(성화)예수님께서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오른편 강도와 왼편 강도도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로마 병사들과 군중들을 향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의 죄를 사해 주시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눅23:31)
그러자 오른평 강도와 왼편 강도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왼편 강도는 여전히 예수님을 비방했지만 오른편 강도는 그 사람을 꾸짖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마땅한 보응을 받지만 저 사람은 그런 게 아니지 않느냐”하고 말이죠.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향해 그렇게 탄원하며 간구했습니다.
“예수여. 당신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23:42)
(깨달음)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오른편 강도를 향해 그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오른편 강도가 죽는 즉시 그 영혼이 낙원으로 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죽기 직전에 가래가 끓고 동공이 열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그리고 죽습니다.
그때 믿는 자의 영혼은 곧바로 낙원으로 가고 믿지 않는 자의 영혼은 곧바로 음부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적용)그렇기에 부모님 돌아가신 후에 지극정성으로 사랑하려고 할게 아니라 살아계실 때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숨을 거두고 낙원에 가기 전에 요한에게 예수님의 어머니를 잘 보살펴드리도록 당부했던 것입니다.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은 부모님과 소통하고 공감하고 부모님이 감동받을 수 있는 삶을 사는 데 있습니다.
부모님이 나이가 들었다고 무시하거나 내가 똑똑하다고 소리를 친다면 그것은 부모님께 공해와도 같은 소리이지 않겠습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보다 부모님의 입장에서 행동한다면 무엇보다도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님뿐만 아니라 내 자식을 향해서도 나와 관계 맺는 모든 이들을 향해서도 똑같겠죠.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해 소통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공감하고 행동한다면 누구든지 감동을 받고 행복할 것이니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나눌 수 있는 참된 사랑이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새벽에 사도행전 18장을 읽으면서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한 일을 살펴봤습니다.
바울은 당시 아시아 지역을 목표로 복음을 전하고자 했지만 성령님은 유럽 대륙으로 부르셨습니다.
드로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 섬을 거쳐 네압볼리 항구에 당도해 내륙 빌립보에 당도했죠.
그곳의 자주색 옷감 장사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녀의 집에서 빌립보교회가 태동이 됐습니다.
그 후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핍박자들 때문에 야손의 집에서 복음을 전했고 그 집에서 데살로니가교회가 태동이 됐습니다.
그 후 베뢰에로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와서 핍박하자 바울은 아테네로 갔습니다.
아테네에서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하면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후에 비로소 고린도에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본토를 연결하는 좁고 잘록한 땅의 서쪽 끝에 위치한 곳입니다.
남북과 동서를 잇는 무역항이 있어서 상업의 중심지요 부의 중심지라 사치와 향락의 도시였습니다.
해발 575m에 ‘아크로폴리스’ 성채가 세워져 있는데 그 중심에 ‘아프로디테’ 곧 비너스 신전이 있었죠.
거기서 섬기는 여사제가 1천 명이었는데 낮엔 신전에서 섬기고 밤엔 시내에 내려와 매음을 했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아테네보다 더 큰 로마 제국의 네 번째 도시로서 사실상 그리스의 중심지였습니다.
인구는 60만 명을 헤아렸는데 바울은 1년 반가량 유스도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바로 그곳에서 고린도교회가 태동된 것입니다.
(전개)사도행전 18장 후반부에는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을 나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바울은 아시아의 에베소 지역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3개월간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는데 대다수 유대인들이 훼방하자 주님의 제자들을 따로 세워 ‘티란노스’의 ‘스콜레’ 곧 두란노 사원을 빌려 점심시간에 주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했습니다.
2년넘게 두란노 서원을 예배당 삼아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내쫓고 병든 자를 고쳤는데 바다 건너편 고린도 교회에 좋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되죠..
고린도교회에 음행문제,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파벌문제, 은사문제, 우상제물 문제 말이죠.
바울은 첫 번째 편지를 써서 고린도교회를 직접 방문하고자 했지만(고후1:15-17) 성사되지 못했죠.
그 후 젊지만 온순한 디모데를 파송해서(고전4:17)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한 통의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그 편지가 오늘날 우리가 읽는 고린도전서입니다.
물론 그 편지도 그리고 디모데도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후에 바울이 직접 방문하는데(고후2:1-2) 바울이 눈물로 호소하고 권면해도 성도들은 외면하고 말죠.그러자 바울은 괴로운 심정으로 에베소에 와서 세 번째 편지를 써서 디도 편으로(고후2:3-5) 보냅니다.
물론 그 편지도 남아 있지는 않지만 디도는 강단 있게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잘 매듭짓고 오죠.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은 너무도 기뻐서 네 번째 편지를 쓰는데 우리가 갖고 있는 고린도후서입니다.
그 편지를 보낸 바울은 교회문제가 잘 매듭지었는지 확인하고 성도들을 격려하고자 에베소를 떠나 고린도 교회에 방문을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에서 3개월간 머물면서(행20:1-3) 성도들을 굳게 세웠고 로마서도 그때 써 보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9절은 인사말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10-6장20절까지는 교회의 분란에 대해 이야기하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1-16장12절까지는 결혼 제사음식 성찬 은사문제 부활에 관한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16장13-24절까지는 권고의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본문)그 중 본문의 고린도전서 13장은 12장의 은사 문제로 다투는 걸 정리하면서 한 말씀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자신이 받은 은사를 최고로 여기며 남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내가 받은 방언이 최고다, 예언이 최고다, 병고치는 은사가 최고다 하면서 말입니다.
마치 나이든 부모 앞에서 젊은 자식이 똑똑한 척하면서 부모님을 완전히 무시하는 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여러분. 우리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지 않습니까?”
“손과 발, 눈과 코, 입과 같이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지체가 있고 신장과 폐와 장기들처럼 눈에 안 보이는 내적인 지체들도 많습니다.”
“각각의 지체들이 다 소중하고 고유한 형태와 특성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어느 지체가 자기만 중요하고 잘 났다고 하면서 다른 지체를 무시한다면 조화와 통일을 이룰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각자 은사로 우월의식을 삼지 말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12장에서 말한 것이고 13장에 이르러 많은 은사 가운데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 다양한 지체가 있듯이 우리 한 사람이 받은 은사도 다 다양한데 그 중에 사랑이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상대방의 말을 들을 수 있고 배려하며 소통하고 감화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를 갖고서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원해)여기에서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때 ‘방언’과 ‘말’은 헬라어로 ‘글로사’(γλῶσσα)라는 단어입니다.
신약성경에 50회 쓰였는데 ‘혀’(the tongue,막7:33,눅1:64,행2:3) ‘방언’(막16:17) ‘언어’(행2:11)로 사용됐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글로사’인데 바울은 왜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이라는 표현을 쓴 것일까요?
사도행전에는 이 단어가 대부분 인간의 언어로 알아듣는 ‘방언’으로 쓰였습니다.
갈릴리 어부 출신의 제자들을 포함해 120명의 성도들이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여 방언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내뱉은 말은 세계 17개국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말로 알아듣는 인간의 언어였습니다.
그래서 세계 17개 국에서 온 사람들은 저들이 술에 취해서 저런 것이다 하고 비웃기도 했죠.
하지만 베드로는 술에 취한 게 아니라 구약의 요엘서의 말씀대로 성령을 통해 방언을 한 거라고 말했죠.
중요한 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기도하는 120명의 성도들에게 왜 방언을 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방언의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뽐내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계 17개국에서 온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감토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깨달음)그런데 바울은 똑같은 ‘글로사’라는 단어를 ‘천사의 말’로도 사용했습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의 임재를 통해 받은 방언도 천사의 말이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받은 방언도 천사의 말이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의 방언은 인간의 언어로 알아듣는 말이었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받은 방언은 같은 성도들이 알아듣지 못한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4장 13절에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데 서로가 알아듣지 못한다면 누군가 방언을 통역해 회중이 알게 해야 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런 통역없이 자기가 받은 방언만 떠들어 땠기에 문제가 된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받은 방언의 우월주의에 빠져 남을 배려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유창하고 세련된 방언을 못한다 할지라도 묵묵히 서로를 배려하고 공감하는 삶으로 섬긴다면 그것이 백배 나은 모습지 않겠습니까?
(원해2)그래서 바울이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권면한 게 그것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13:1)
소리 나는 ‘구리’는 헬라어로 ‘칼코스’(χαλκός)로 ‘놋쇠’ 곧 ‘브라스’(brass)를 말하는 것입니다.
울리는 꽹과리는 헬라어로 ‘쿰발론’(κύμβαλον)으로 드럼칠 때 그 ‘심벌’(a cymbal)을 말합니다.
(깨달음)2천 년 전 헬라 문명의 세계에서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이 많았습니다.
고린도의 아크로폴리스 성채 위의 세워진 비너스 신전에서 제사할 때도 브라스로 부르고 심벌을 쳤겠죠.
그때 그 신전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 소리에 맞춰 춤을 추며 신을 향해 괴성을 불렀던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무당이 굿을 할 때 징치고 꽹과리 치고 북을 치는 격입니다.
거기에 사람에 대한 인격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만큼 남을 배려하지 않고 소통도 공감도 없는 방언은 쇠 소리 구리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나이든 부모님과 소통하거나 공감하지 않고 똑똑한 자식의 말만 늘어놓는 것도 그와 똑같은 격 아니겠습니까?
비록 자식이 똑똑하지도 유능하지도 못할지라도 부모님의 입장에서 소통하고 공감한다면 최고의 방언이지 않겠습니까?
(예화)스포츠 드링크 회사 세일즈맨이 아랍 중동에 파견을 갔다가 1년 만에 귀국했습니다.
친한 친구가 그를 만나 다녀온 일은 잘 됐냐고 묻자 그가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응. 중동에 간 첫날 어떻게 우리 회사 음료를 아랍 사람들에게 알릴까 고민하다가 신문 광고 아이디어가 떠올랐어.”
“그래서 세 가지 사진들로 구성한 광고를 만들었지.”
“맨 처음 사진은 사막에 지쳐서 쓰러져있는 사람 장면이었어.”
“두 번째 사진은 우리 회사 에너지 음료를 벌컥벌컥 마시는 장면을 보여줬지.”
“마지막 세 번째 사신은 새롭게 힘이 난 사람이 힘차게 달리는 장면의 사진이었지.”
친구는 매우 관심 있는 표정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래서 광고 효과는 어땠는데?”
“묻지도 마. 쫄딱 망했어.”
“아니 왜? 광고가 심플하지만 효과는 아주 좋았을 것 같은데?”
그때 세일즈맨은 어이가 없다는 듯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랍인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더라고.”
(깨달음)아무리 좋은 광고라 해도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한다면 무슨 쓸모가 있겠냐는 뜻입니다.
(예화2)가난한 청년 ‘마틴’은 캘리포니아의 작은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입학 전에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온실 재배사업의 현장 감독은 마틴의 어려운 가정 사정을 듣고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현장의 인부들은 점심시간이 되면 커다란 나무 밑에 둘러앉아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한 마틴은 나무 그늘에 누워 허기를 달래야 했습니다.
그때 현장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젠장, 이놈의 마누라가 나를 코끼리로 아나?”
“혼자서 이걸 어떻게 먹으라고 이렇게 많이 싸 보내는 거야?”
“이봐, 누구 이 샌드위치와 케이크 한 조각 좀 먹어줄 사람 없어?”
마틴은 그 현장 감독이 내민 샌드위치로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었습니다.
감독의 불평소리는 그렇게 매일같이 이어졌고 덕분에 마틴은 점심 때마다 그걸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한 달이 지나 마틴은 급료를 받기 위해 사무실에 찾아갔습니다.
급료를 받고 나오면서 경리 직원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감독님에게 감사하다고 말을 전해 주시면 좋겠어요. 부인의 샌드위치도 정말로 맛있었다고요.”
그러자 경리직원은 놀란 눈으로 되물었습니다.
“부인이라니요? 사모님은 5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감독님은 부인을 그리워하며 혼자 살고 계셔요.”
(깨달음)누군가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고 공감하고 베푸는 사랑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사랑이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몸된 교회를 함께 세우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도 그렇게 배려하고 사랑을 베푼다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방언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문)그렇기에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부모든 자식이든 동료든 성도든 서로를 배려하고 공감하고 베푸는 사랑의 사도로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부모가 죽은 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제사상을 차려 부모님을 대접한다고 하지만 사람은 죽으면 즉시 낙원으로 음부로 가는 것 아니더냐?
“그러니 부모님 살아계실 때 부모님 말씀을 이해하고 부모님 입장에서 공감하는 게 최고의 사랑이지 않겠느냐?”
“바울도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방언의 은사를 뽐내고 자랑하는 이들에게 타인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사랑임을 일깨워주는 것 아니더냐?”
“남의 말을 경청하지 않고 남의 형편을 헤아리지 않는 유창한 방언은 그저 쇠소리와 구리소리에 불과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아무리 멋진 광고를 만들어 아랍에서 세일즈를 한다 해도 거꾸로 읽은 아랍인들을 배려하지 못한 광고가 무슨 소통을 할 수 있겠느냐?”
“아내가 죽어서 힘들지만 도시락도 싸오지 못하는 직원에게 샌드위치를 먹도록 배려한 그 사랑이야말로 최고 방언이지 않겠느냐?”
“너도 주님의 몸을 이루는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고 배려하고 감화력을 준다면 최고 방언이지 않겠느냐?”
“그런 사랑없이 유창한 설교나 유창한 방언이나 유창한 찬송이 무슨 의미와 능력이 있겠느냐?”
“설교를 잘하지 못해도, 방언기도를 못해도, 멋진 화음의 찬양은 못해도, 주님의 몸을 이루고 있는 성도들을 배려하고 공감하고 섬기고 있다면 그것이 최상의 방언이지 않겠느냐?”
(찬양)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자매의 모습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 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우리의 모인중에 임하신 하나님 영광 아름다와라
존귀한 왕이 여기 계시니 사랑하며 섬기리
우리의 모인중에 임하신 하나님 영광 아름다와라
존귀한 왕이 여기 계시니 사랑하며 섬기리
(예화)높은뜻숭의교회를 섬겼던 김동호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에게 첫 손녀 민희가 태어났는데 일 년 반 가까이 김동호 목사님 집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이제 그 손녀가 엄마 아빠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미국에서 돌 잔치 할 때 목사님과 사모님도 함께 가서 축하를 해 줬습니다.
온 가족들이 그 아이에게 사랑으로 듬뿍 품어준 것이었습니다.
이제 손녀 딸이 세 돌쯤 되었을 때 그림 하나를 그렸다고 합니다.
민희는 그 종이 위에 아파트를 그렸고 아파트 문에 17이라는 숫자를 써넣었다고 합니다.
그때 민희의 엄마가 물어봤습니다.
“딸. 이 그림의 숫자 17이 뭐야”
“엄마 이곳은 내가 사랑을 받는 곳이야.”
그 이야기를 김동호 목사님이 들었을 때 눈시울이 불거지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1년 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손녀딸에게 사랑을 부어준 걸 그 녀석이 그렇게 기억한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점점 자라면서 미국 학교를 다녔는데 유색인종이라면서 왕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또 한국에 나와서도 한국의 동료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손녀 딸 민희는 두 번 다 거뜬히 이겨냈다고 합니다.
부모님의 사랑,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을 받은 아이라, 그 고난과 역경에서 이겨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사랑받은 아이는 그처럼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강건하게 자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걸 확신하면 그 어떤 고난도 기꺼이 이겨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적용)그렇다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자유로교회에서 나는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나는 성도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교회는 내가 사랑받는 곳이야, 하고 말입니다.
그 교회는 내가 사랑을 베풀고 있는 곳이야, 하고 말입니다.
내가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걸 확신한다면 우리도 세상의 어려움을 능히 이겨낼 줄 믿습니다.
내가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성도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걸 느낀다면 결코 홀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상대방과 소통하고 배려하고 공감하는 그 사랑보다 더 귀한 방언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설교를 잘 못해도 유창한 방언기도 멋진화음의 찬송을 못해도도 성도들을 섬기고 배려하고 공감하는 사랑이야말로 가장 멋진 방언인 줄 믿습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가 유창한 방언을 못해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을 배려하고 공감하며 산다면 그것보다 더 멋진 방언은 없겠네요.”
“목사님의 손녀 딸이 1년 반 가까이 아파트 집에서 사랑을 받은 걸 기억하고 17이란 숫자를 써넣었네요.”
“나도 주님의 몸된 자유로교회를 떠올리면 주님의 사랑 성도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확신하고 있는지요?”
“내 그 사랑을 받고 있고 내가 그 사랑을 주고 있는지 말예요?”
“주님. 이 세상에 어떤 방언이나 특별한 은사보다도 상대방을 섬기고 배려하고 공감하는 사랑이 제일인 줄 믿어요.”
“우리 자유로교회가 그런 사랑을 받는 곳이요 그런 사랑을 베푸는 교회가 되게 해 주세요.”
“내가 그런 사랑을 베풀고 그런 사랑을 받는 교회가 되게 해 주세요.”
“우리의 모습은 서로 달라도 주님 한 분 바라며 소통하고 배려하며 살 때 나머지 부족한 부분은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찬양)주 안에 우린 하나 모습은 달라도 예수님 한 분만 바라네
사랑과 선행으로 서롤 격려해 따스함으로 보듬어 가리
주님 우리 안에 함께 하시니 형제 자매의 기쁨과 슬픔 느끼네
네 안에 있는 주님 모습 보네 그 분 기뻐하시네
주님 우릴 통해 계획하신 일 부족한 입술로 찬양하게 하신 일
주님 우릴 통해 계획하신 일 너를 통해 하실 일 기대해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님을 사랑하되 살아생전 사랑하고 이해하고 배려하고 공감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함께 세워나가는 성도들이 서로를 소통하고 배려하고 공감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바랍니다.
사랑과 섬김과 배려와 공감이 없는 방언의 은사는 그저 쇠 소리 구리 소리 공해소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유창하고 세련된 방언을 못한다 해도, 예언이나 병고치는 은사를 못 받았어도, 묵묵히 섬기고 배려하는 그 삶이야말로 최상의 은사인 줄 믿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내가 사랑받는 곳이야 내가 사랑을 베푸는 곳이야 그렇게 기억되고 있다면 가장 멋진 방언의 은사를 하고 있는 분인 줄 믿습니다.
그런 사랑과 섬김과 배려와 공감의 삶을 살아갈 때 나머지 부분은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총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주일설교SundaySerm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이 없으면3(고전13:1-3)_2024년 9월 15일 주일설교문 (5) | 2024.09.13 |
---|---|
사랑이 없으면2(고전13:1-3)_2024년 9월 8일 주일설교문 (3) | 2024.09.06 |
여호와의 계명은 눈을 밝게 하시도다(시19:7-10)_2024년 8월25일 주일설교문 (0) | 2024.08.23 |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시19:7-10)_2024년 8월18일 주일설교문 (0) | 2024.08.16 |
여호와의 율법은 영혼을 소성시키시며(시19:7-10)_2024년8월11일 주일설교문 (0) | 2024.08.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