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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교회에 잘 다니는 한 형제가 이상형인 자매를 성가대에서 만났습니다.
그 자매와 결혼을 했고 아름다운 아내를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일 년이 지나자 아내가 아이를 가졌는데 아내의 배가 부르니까 남편은 아내를 창피하게 생각했습니다.
거기다 아내가 한 밤 중에도 “사과 사와라” “딸기 사와라”하며 귀찮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힘겨워 하던 그 남편은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꼭 하루만 서로의 육체를 바꿔서 지내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은 남편의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여자가 된 남편은 집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다 했고 밤 10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아내가 된 그 남편은 눈을 뜨자마자 하나님께 다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멍청했습니다. 제발 저를 원상 복귀시켜 주십시오. 당장 남편으로 돌려주세요”
그 때 하나님께서는 빙긋이 웃으시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인간아 늦었다. 이제는 안된다.”
“왜요? 왜 안되는데요?”
“오늘부터 10개월 후에야 남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넌 어젯밤에 그만 임신하고 말았어!”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 같습니까?
남편이든 아내든 서로 소통하고 배려하고 존중해야 오래도록 행복할 수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부부지간만 그런 게 아니라 부모자식도 이 땅에 관계 맺고 사는 모든 이들이 그렇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부모가 죽고 난 뒤 제사상에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부모의 혼령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보다 어리석은 사람이 없다고 말이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오른편 강도가 “당신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주소서”(눅23:42)할 때 예수님께서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이다.”(눅23:43)하고 말씀해주셨죠.
그만큼 사람은 죽으면 믿는 자는 곧바로 낙원으로 가고 믿지 않는 자는 즉시 음부로 내려가는 거죠.
그렇기에 부모님 살아생전에 부모님과 소통하며 부모님 말씀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삶이 가장 중요한 법입니다.
자식이 배운 게 많고 돈이 많다면서 부모님 말씀을 무시하고 부모님을 함부로 대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불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모습처럼 부모든 자식이든 일터의 동료든 교회의 성도든 서로를 배려하고 섬기는 삶이 사랑의 삶입니다.
(유머)어떤 젊은이가 생선가게에서 조기를 사려고 싱싱한 것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기 한 마리를 손에 들고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러자 생선가게 주인이 그 사람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봐요. 젊은 사람. 왜 멀쩡한 고기를 가지고 냄새를 맡고 야단이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냄새를 맡는 게 아니라 귓속말로 바다 소식 좀 물어봤어요.”
주인도 호기심이 생겨서 다시 물어봤습니다.
“그래 조기가 뭐라고 말하나요?”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다를 떠난 지 벌써 일주일이 넘어 최근 소식은 알 수 없다고 하네요.”
(적용)어떻습니까?
생선에서 썩은 냄새가 나서 그렇게 돌려 말한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 생선 썩은 내가 진동한다면서 시장바닦에서 큰 쏘리로 쏘아붙였다면 한바탕 큰 소란이 나지 않았겠습니까?
그처럼 내가 뭔가를 알아내는 능력이 특별해도, 혹여라도 유달산을 바다에 빠트릴만큼 큰 믿음이 있어도, 남을 배려하고 공감하지 못한다면 어찌 화평을 이루며 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 들어가 복음을 전해습니다.
그 당시 바울은 안디옥의 윗쪽 길리기아 지역-갈라디아 지역-무시아 지역을 거쳐 아시아 지역에 내려가고자 했습니다.
요즘 우리식의 아시아가 아니라 그 당대의 아시아 지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시아 지역의 드로아 항구에서 다음날 아시아 지역으로 가려 했는데 성령님께서 꿈에 환상 중에 유럽대륙 사람이 손짓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때 바울은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 섬을 거쳐 네압볼리 항구에 당도해 내륙 지역인 빌립보에 당도했죠.
그곳의 자주색 옷감 장사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녀의 집에서 빌립보교회가 태동이 됐습니다.
그 후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핍박자들 때문에 야손의 집에서 복음을 전했고 그 집에서 데살로니가교회가 시작이 됐죠.
그 후 베뢰에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와서 핍박하자 바울은 아테네로 갔죠.
아테네의 에피쿠로스 철학자와 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하던 바울은 아레오바고에 가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후에 비로소 고린도에 내려간 것이었습니다.
고린도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본토를 연결하는 좁고 잘록한 땅의 서쪽 끝에 위치한 곳입니다.
남북과 동서를 잇는 무역항이 있어서 상업의 중심지요 부의 중심지라 사치와 향락의 도시였습니다.
해발 575m에 ‘아크로폴리스’ 성채가 세워져 있고 중심에 ‘아프로디테’ 곧 비너스 신전이 있었죠.
거기에 1천명이 넘는 여사제가 있었는데 낮엔 신전에서 섬기고 밤엔 시내에 내려와 매음을 했죠.
당시 고린도는 아테네보다 더욱 큰 로마제국의 네 번째 도시로서 사실상 그리스의 중심지였습니다.
인구 60만 명을 헤아리는 그곳에서 바울은 1년 반가량 유스도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그 집에서부터 고린도교회가 태동이 됐습니다.
(전개)사도행전 18장 후반부를 보면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을 나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가고자 했던 아시아 지역 그 중에서도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3개월간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데 대다수 유대인들이 훼방하자 주님의 제자들을 따로 세워 두란노 사원을 빌려 점심시간에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죠.
2년 넘게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전하고 평상시 일할 때 닦던 천조각을 병든 자나 귀신 들린 자에게 얹으면 고침받는 역사가 일어났죠.
그 무렵 바다 건너편 고린도교회에서 좋지 않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음행문제,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파벌의 문제, 방언과 예언의 은사문제, 우상제물 문제 말이죠.
바울은 첫 편지를 써서 고린도교회를 직접 방문하고자 했지만(고후1:15-17)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그 후 젊지만 온순한 디모데를 파송해서(고전4:17)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바로잡고자 한 통의 편지를 서 보냈는데 우리가 읽고 있는 고린도전서입니다.
물론 그 편지도 디모데도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바울이 직접 방문해서(고후2:1-2) 눈물로 호소하고 권면해도 성도들은 외면하고 맙니다.
바울은 괴로운 심정으로 에베소에 와서 세 번째 편지를 써서 디도 편으로(고후2:3-5) 보냅니다.
물론 그 편지도 남아 있지 않지만 디도는 강단 있는 심성으로 고린도교회 문제를 매듭짓고 옵니다.
그때 바울은 너무도 기뻐서 네 번째 편지를 썼는데 우리가 갖고 있는 고린도후서가 그것이죠.
그 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잘 매듭지었는지 확인하고 격려코자 에베소를 떠나 고린도 교회에 방문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에서 3개월간 머물면서(행20:1-3) 성도들을 굳게 세웠고 로마서도 써 보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9절은 인사말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10-6장20절까지는 교회의 분란에 대해 이야기하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1-16장12절까지는 결혼 제사음식 성찬 은사문제 부활에 관한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16장13-24절까지는 권고의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전개)그중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13장은 12장의 은사 문제를 정리하면서 쓴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자신이 받은 은사를 최고로 여기며 남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내가 받은 방언이 최고다, 예언이 최고다, 병고침 받은 은사가 최고다 하면서 말입니다.
그 중에서도 방언을 최고로 치면서 예배 중에도 방언으로 말하면서 우쭐대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몸을 빗대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는데 손과 발과 눈과 코와 입처럼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지체가 있습니다.”
“하지만 신장과 폐와 장기들처럼 눈에 안 보이는 내적인 지체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다 소중한 지체들이지 않습니까?”
“어느 지체가 자기만 잘 났다고 소리친 채 다른 지체를 무시한다면 어떻게 우리 몸이 조화와 통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각자 받은 은사로 우월의식에 도취되지 말고 묵묵히 교회를 섬기는 성도들을 더 존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12장에서 말미에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하면서 13장에 이르러 ‘사랑’의 은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3장 1-3절은 사랑의 필수성을 4-7절은 사랑의 정의를 8-13절은 사랑의 영원성을 말하고 있죠.
그만큼 고린도전서 13장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문헌 중 가장 아름다운 찬가입니다.
그 어떤 대문호도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 13장에 필적할 수가 없습니다.
문자 그대로 고린도전서 13장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교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을 왜 썼는가 하는 동기와 배경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은사를 받았지만 그 은사로 싸우고 경쟁하고 대립하고 분열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서 배려하고 공감해야 할 성도들이 사랑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를 온전히 이룰 방도로 사랑에 대해서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1절 말씀을 살펴봤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은 헬라어로 ‘글로사’(γλῶσσα)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에 50회 쓰였는데 ‘혀’(the tongue,막7:33,눅1:64,행2:3) ‘방언’(막16:17) ‘언어’(행2:11)로 사용됐죠.
똑같은 ‘글로사’인데 왜 바울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이라는 표현을 썼습니까?
실은 둘 다 성령의 임재 가운데 받은 방언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의 임재를 통해 받은 방언은 세계 17개국에서 온 사람들이 다 알아듣는 인간의 방언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에서 성령의 임재를 통해 받은 방언은 통역하지 않으면(고전14:13) 알아듣지 못한 방언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알아듣는 방언이냐 못 알아 듣는 방언이냐 보다도 더욱 중요한 게 있다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방언을 주신 목적이 그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방언을 주신 것은 타인과 소통하고 공감하고 섬기는 도구로 주신 선물입니다.
그걸 무시한 채 자기 우월주의에 빠져 있다면 나이든 부모를 무시하고 생선 파는 주인을 무시하는 것과 똑같은 격이지 않겠습니까?
이제 들어온 신입사원이 AI를 잘 활용해서 좋은 성과를 내지만 그 지식으로 상사를 무시하고 팀웍을 해친다면 회사의 주도적인 역할을 맡기에는 역부족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권면한 게 그것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13:1)
소리 나는 ‘구리’란 헬라어로 ‘칼코스’(χαλκός)로 ‘놋쇠’ 곧 ‘브라스’(brass)를 말하는 것입니다.
울리는 꽹과리란 ‘쿰발론’(κύμβαλον)으로 드럼칠 때 그 ‘심벌’(a cymbal)을 말합니다.
2천 년 전 비너스의 신전에서 제사할 때 브라스와 심벌을 치면서 춤추고 열광했던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마치 무당이 굿을 할 때 징 치고 북 치고 꽹과리 치는 것과 똑같습니다.
거기에 사람에 대한 인격을 존중하는 모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만큼 남을 배려하지 않고 소통도 공감도 없는 방언은 쇠소리 구리소리 소음에 불과하다는 거죠.
(본문)오늘은 본문 2절을 주목해서 보시는데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원해)여기에 ‘예언’이란 헬라어로 ‘프로페테이아’(προφητεία)입니다.
하나님의 영감을 깨달은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선포하는 걸 말합니다.
예언이란 ‘점쟁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가 하나님의 뜻에 맡게 해석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권고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나 초대교회 선지자들은 성경이 확정되기 전이란 성령의 영감으로 장래 일을 말했지만 구체적인 날짜와 시기와 방식까지 말한 건 아니었습니다.
사도 요한도 요한계시록을 쓸 때 육하원칙에 따라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무엇을 한다는 내용을 쓴 게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시대나 앞으로 오는 시대에는 성경말씀이 다 들어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을 시대를 해석하여 성도들을 바르게 살도록 선포하는 게 예언자입니다.
우리말 ‘비밀’이란 헬라어로 ‘뮈스테리온’(μυστήριον)인데 ‘감춰진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성경에 비밀이란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식과 논리로 깨닫는 게 아니라 성령의 영감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 십자가에 죽으신 것, 부활하신 것, 머잖아 재림하시는 것, 모두가 영적인 비밀이요 성령의 영감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비밀입니다.
그리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란 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는데 간질병 발작하는 아이를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자 하신 말씀이 이렇습니다.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는데 한 나절 만에 말라버린 걸 보고 제자들이 놀라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
그만큼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란 큰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실은 과장법 중 하나입니다.
우리 식으로 “손에 장을 지진다”, “벼룩의 간을 빼 먹어라” 하는 표현처럼 말입니다.
성경에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면 연자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게 낫다’하는 표현도 그렇습니다.
연자맷돌은 성인 10명이 들어도 못 들정도로 엄청나게 큰 것인데 그만큼 실족케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기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란 진짜 바다에 빠트릴 수 있는 믿음이 아니라 누가 보기에도 큰 믿음의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상과 같은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된다면 우리가 깨닫는 게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누군가의 인생을 해석해주고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도록 선포한다면 그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은사를 우월의식으로 삼아 누군가를 무시하고 인격을 짓밟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의 영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모든 비밀을 깨닫는다면 그 또한 하나님의 선물이지 내 자랑거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보기에 산을 옮길만한 큰 믿음을 지녔어도 그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지 내가 자랑할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는 예언에 대해, 비밀과 지식에 대해, 그 믿음에 대해, 자기 자랑과 우월의식으로 삼는 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은사로 남을 배려하고 공감하고 섬겨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으니 그런 은사와 믿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주님 앞에서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도 쫓아냈고 큰 권능을 행했습니다.”하고 자랑하는데 주님은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하는 것과 같은 격입니다.
그것은 내가 한평생 열심히 살고 뭔가 이루었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 부르심을 받았는데 하나님께서 “you are nothing”(너 아무 것도 아니야)하는 것과 똑같은 격입니다.
그처럼 내가 비밀스런 영적 능력을 갖고 누가봐도 큰 믿음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요?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를 위해 서로 배려하고 공감하고 섬기는 사랑이 가장 귀하기 때문입니다.
(적용)내연기관 자동차에는 그 부품이 3만 개인데 그중 20%가 엔진 부품이라고 합니다.
전기차로 바뀌면 그 많은 부품 중에 70%가 사라진다고 하죠.
그만큼 엔진 부품이 자동차의 생명과 같아서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가 올 때 와이퍼가 작동이 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눈뜬 장님과 같은 격 아니겠습니까?
그 와이퍼에 물이 나오는 그 구멍이 0.1mm라고 합니다.
그 작은 구멍이 막히면 자동차 자체가 멈춰서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만큼 주님의 몸된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데 내가 머리라고 내가 심장이라고 뽐낼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와이퍼 하나라도 소중히 대하며 서로가 배려하고 공감하고 섬기는 사랑이 제일이겠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내가 말씀의 능력과 영적 비밀과 큰 믿음이 있어도 겸손하게 남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사랑의 삶을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아내가 배가 부른다고 해서, 임신한 아내가 딸기 사와라 사과 사와라 한다고 남자로 바꿔달라고 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겠느냐?”
“남자든 여자든 남편이든 아내든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고 섬길 때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조기가 상했다면서 큰 소리로 시장판을 떠들썩하게 한다면 그것이 어찌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랑의 삶일 수 있겠느냐?”
“고린도교회에 방언의 은사를 받은 이들도 있고 예언하는 능력과 예수님의 비밀을 깨닫는 능력과 산을 옮길만한 큰 믿음이 있어도 같은 성도를 배려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한다면 그런 은사가 무의미한 것 아니겠느냐?”
“자동차의 3만개 부품 중에 생명과 같은 엔진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비오는 날 와이퍼가 작동이 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것 아니겠느냐?”
“고린도교회가 주님의 몸을 이루기 위해서는 눈에 띄는 성도들의 은사는 물론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성도들의 은사도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해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도록 바울이 권면한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성도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성도들에게 사랑을 주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과 특별한 은사의 선물을 너의 자랑거리로 여기지 않고 성도들을 배려하고 공감하고 섬기는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말이다.”
“혹여라도 주님께서 너에게 놀라운 영적인 비밀과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주셨을 때 그것으로 우월의식에 빠져 있지는 않는지 말이다.”
“어떤 조직이든 어떤 단체든 머리와 심장과 손과 발 모두가 필요하듯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데 너도 그런 지체로서 사랑과 배려와 섬김을 쏟았으면 좋겠구나.”
(찬양)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자매의 모습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 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우리의 모인중에 임하신 하나님 영광 아름다와라 존귀한 왕이 여기 계시니 사랑하며 섬기리
(예화)어떤 청년이 금요기도회 때 뜨겁게 기도하다가 방언을 받고 큰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예수님과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던 걸 기억했습니다.
또 “누구든지 이 산 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하는 말씀도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한강을 건너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물 위로 한발을 내어 딛는데 그만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실망감에 젖은 채 그 청년은 담임목사님을 찾아가 따지듯 말했습니다.
“목사님.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도 있다고 했고 베드로도 물 위를 걸었는데 저는 방언기도까지 하면서 물 위를 걷는데 왜 빠진 것일까요?”
그 청년의 질문에 목사님이 뭐라고 답했을까요?
“자네는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라고 말하던가?”
“아니요.”
“그러니까 빠지는 거예요. 베드로는 예수님이 걸어오라고 했잖아요.”
(깨달음)웃자고 하는 소리지만 자기 믿음을 뽐내고자 하는 청년의 모습이지 않겠습니까?
그 믿음이 산을 옮길만한 큰 믿음이어도 그걸 뽐내고자 한다면 자기 심령도 병들고 타인의 마음도 힘들게 하는 것이죠.
내가 예언을 하고 영적 비밀을 깨닫고 산을 옮길만한 큰 믿음이 있어도 성도들에게 동일한 잣대로 요구한다면, 왜 나처럼 못하냐고 한다면, 자신도 병들도 성도들의 심령도 힘들게 하는 것이죠.
내가 말씀을 해석하는 능력이 있고, 영적세계와 비밀을 알고, 큰 믿음이 있다면, 더욱더 상대방을 공감하고 배려하는 사랑의 삶을 살 때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줄 믿습니다.
(유머2)어느 교회에 믿음이 좋은 권사님이 계셨는데 그분은 가는 귀가 먹었습니다.
그분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하루는 외출을 하고 싶어 세 아들을 불렀습니다.
“큰 애야 외출을 하고 싶구나. 네가 차 좀 태워주겠니?”
“예, 어머니. 제 소나타 승용차로 모실게요.”
“뭐라고? 이 애미더러 소나 타고 가라고, 쯧쯧쯧. 못된 놈 같으니라구”
“둘째야. 네가 나 좀 태워줘야겠구나”
“예, 어머니. 제 아벨라 승용차로 가시게요.”
“뭐야, 이놈이 망령 들었나? 에미 나이가 몇인데 아를 베라 그러는 거야,”
“셋째야. 너밖엔 없구나. 네 차로 나를 좀 태워줄 수 있겠니?”
“네 어머니. 그런데 제 차는 그레이스 봉고라 타기가 힘들 거예요.”
그때서야 귀가 열렸는지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애야. 조금 힘들면 어떠니. 네 차는 은총(Grace)을 주는 차이지 않느냐?”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유머 같습니까?
누군가 자기 은사와 영적 비밀과 큰 믿음을 뽐내고 자랑한다 해도 그걸 듣는 내가 은혜로 품는 게 귀하다는 뜻입니다.
(내기도)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가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자신의 큰 믿음을 뽐내고 자랑하고자 물 위를 걷다가 물에 빠진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를 품을 수 있는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어머니의 귀가 안 들려 내 말을 오해할지라도, 누군가 그렇게 내 말을 듣고 오해해서 서운한 말을 할지라도, 그를 향해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그릇이 되게 해 주세요.”
“내가 말씀을 잘 전하고, 영적 비밀을 깨닫고, 큰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주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이오니, 묵묵히 사랑하고 섬기는 은혜의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찬양)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자매의 모습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 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우리의 모임 중에 임하신 하나님 영광 아름다와라 존귀한 왕이 여기 계시니 사랑하며 섬기리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고 성도들의 사랑을 받고 있고 나 또한 성도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 당신의 몸을 친히 십자가에 내어 놓으셨다면 우리도 그런 사랑의 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무리 말씀을 잘 해석하고 잘 전해도, 영적인 비밀과 신비를 깨달아도, 산을 옮길만한 큰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다면 ‘너는 아무 것도 아니다’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에 눈에 띄는 은사도 없고 눈에 드러나는 큰 믿음이 없어도 묵묵히 성도들을 배려하고 공감하고 섬기는 사랑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길인 줄 믿습니다.
그런 자녀를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이고 그런 자녀에게 더 큰 은혜를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총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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