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설교열기)(예화)농구선수하면 떠오로는 인물들이 여럿 있지 않습니까?
한기범 김유택 허재 강동희도 있고, 이상민 문경은 우지원 서장훈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최초로 덩크 슛을 성공한 선수는 조동우 선수라고 합니다.
1994년 방영된 드라마 〈마지막 승부〉에서도 장동건이 대학 라이벌전에서 덩크슛을 꽂고 해피엔딩으로 끝난 일이 있죠.
실제 덩크슛은 1978년 11월 추계대학연맹전에서 연세대 센터 조동우 선수가 처음으로 넣은 게 공식기록이라고 합니다.
현재 67살인 그분은 미국 애틀란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어느날 집에 있는데 갑자기 허리 통증이 밀려왔습니다.
처음엔 요로 결석인가 싶었는데 너무나도 아파서 데굴데굴 굴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병원에 실려갔는데 수술하고 깨어날 때까지 코마 상태 곧 혼수상태였다고 합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심장 옆에 있는 대동맥이 파열됐다고 하죠.
복부대동맥의 위쪽이 파열되면 뇌 쪽에 피가 고여서 죽거나 장애자가 되는데 다행히 아래쪽이 파열되었다고 합니다.
보통 수술시간은 3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그날 조동우 집사님의 수술은 7시간이나 걸렸습니다.
그 수술을 하고서도 또 손을 봐야 할 상태라 오픈한 상태로 1주일을 있었다고 합니다.
1주일이 지나서 가슴을 닫았는데 그때도 열이 올라오고 폐렴도 오고 황달도 와서 마약에 진통제까지 투여했다고 하죠.
그렇게 2주간 동안을 혼수상태로 지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혼수상태에서 현실과 같이 생생한 꿈을 꿨다고 합니다.
자신이 어떤 계단을 한 참 올라가는데 그 중간에 물이 차오르는데 핏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힘이 없으니까 코와 입만 내밀고 숨을 쉬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자신의 모습을 주님이 벽에 기대면서 지켜보더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꺼내주시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힘이 없어 빠져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 빠지면 이제 생명이 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너무 힘들어서 주님께서 소리를 쳤습니다.
“주님. 제 삶을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새끼봐라. 살려놨더니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네.”
주님은 뭔가 점잖고 고상하게 말씀하실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전 농구선수 시절에 훈련하던 모습처럼 그런 말씀으로 다그치면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 생명이 꺼질 때마다 자기 귓전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소리는 교회 성도들의 중보기도하는 소리였다는 것입니다.
그 소리가 귓전에 들려오면 물에 빠져 죽어가던 자신이 힘을 내서 올라오기를 반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수술한 지 두 달 만에 깨어나고 이제는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그 분의 실제 간증입니다.
(깨달음)그 분이 간증한 유튜브 댓글에는 그와 유사한 간증들이 많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암수술을 받을 때 주님께서 함께 해 주셨다는 간증도 있고, 다른 분들도 그와 유사한 체험을 한 것을 올려놓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지금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시퍼렇게 살아계셔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아바 아버지이신 줄 믿습니다.
그 체험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조동우 집사님은 무늬만 크리스천이요 세상 방식을 더 가까이하던 분이었습니다.
그 일을 겪고 난 후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백할 정도로 신실한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자에게 믿음을 불어넣어주시고자,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 하고자 그런 체험을 허락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 흐름만 좇던 자에게서 하나님나라의 방식을 좇아 살도록 진리와 생명으로 세워주신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그토록 힘들어하는 누군가를 위해 중보하는 자들의 기도를 하나님은 외면치 않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수술실에 들어가는 조동우 집사님을 위해 교회 성도들도 그를 아는 지인들도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나도 내 가족을 위해, 친척을 위해, 교우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귀기울여 응답해주시는 줄 믿습니다.
(적용)우리 하나님은 높고 높은 저 하늘에서 계셔서 모든 세계와 정사를 다스리는 지존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악과 탐욕과 우상숭배와 자기 의에 사로잡힌 교만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심판주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심판의 자리에 계시면서도 낮고 천한 우리를 구원코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제물 삼기까지 사랑하신 긍휼의 아버지이십니다.
그 공의와 사랑이 없었던들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겠으며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 가운데 계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와 탐욕과 우상숭배를 일삼는 자들의 심령 가운데는 거할 수가 없습니다.
지존하신 하나님은 자기 의에 사로잡힌 교만한 자들 가운데는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자신이 죄인이요 티끌이요 먼지요 지렁이 같은 연약한 자임을 고백하는 자들 가운데 함께 하시는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조동우 집사님처럼 주님을 믿는 것 같지만 세상 방식에 치우진 자들조다도 겸손하게 빚으셔서 그 심령 가운데 계시는 아버지이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2960924
(역배)스바냐는 남왕국 유다의 14대 왕 므낫세의 통치와 아들 아몬의 통치에 이어 16대 왕 요시야가 다스릴 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선지자입니다.
므낫세는 아버지였던 히스기야와 달리 우상숭배의 길을 걸었고 이사야 선지자를 톱으로 켜서 죽였다는 전승이 내려올 정도로 악한 왕이었죠.
그 아들 아몬도 아버지 므낫세가 걷던 우상숭배의 길을 따라 걷다가 2년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 무렵에 8살된 요시야가 왕으로 등극했는데 아버지나 할아버지와 달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좇아 행했습니다.
굳게 닫힌 성전의 문을 열었고 무너진 성전제단을 다시금 쌓아 올린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성전을 수리하면서 모세의 율법책도 발견했는데 그 말씀을 토대로 각종 절기와 제사까지 복원시켜씁니다.
그렇게 요시야 왕이 성전 제단을 정화시키고 수축하던 그 무렵인 B.C.622년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선지자가 스바냐였던 것이죠.
그러니 어떻겠습니까?
어린 요시야 왕이 새로 왕에 등극했다 해도 기득권층에 속한 이들은 이전의 제도와 방식을 더 선호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다시금 바로 서기보다 적당히 우상과 타협하고 이방 나라들의 우상도 섬기면서 사는 게 더 낫다고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스바냐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선포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전에 바알과 아세라와 암몬 나라의 몰렉신과 같은 우상을 좇아 사는 자들에게 심판을 명하도록 한 게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고 하나님 앞에 구하지도 않는 자들은 진멸하도록 하신다는 게 그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스바냐서에서 계속 강조하는 ‘여호와의 날’ 곧 심판의 날입니다.
물론 그 심판의 날에 구원받게 하시는 게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스바냐란 이름의 뜻도 ‘여호와에 의해 감추어지다’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다’는 뜻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불 심판에 의해 멸망당할 때 하나님께서 구원받게 하시는 자들은 심판에서 건져내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 심판의 날에 산으로 도망칠 게 아니라 함께 모여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구하고, 겸손한 모습을 회복하도록 요구하신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온갖 죄악과 우상과 탐욕에 빠져 수치를 모르는 자들은 ‘여호와의 날’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공의와 정의를 행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숨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 심판의 그 날에 죄악과 우상과 탐욕을 좇는 이스라엘 백성만 심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 북쪽의 앗수르 제국과 주변 이방 세력들조차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자 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 돌아와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핍박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살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본문)바로 그와 같은 내용을 선포한 스나뱌는 3장 후반부에서 심판의 날에 구원하실 걸 바라보며 기뻐하도록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본문 15절을 통해 선포하고 있는데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원해)하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운데’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카라브’(קָרַב)인데 ‘-사이에’ ‘-중간에’ ‘한 가운데’라는 뜻이 있습니다.
창세기나 출애굽기에서는 사람이나 어떤 시기가 가까이 왔을 때 그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레위기나 민수기나 다른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번제물을 드릴 때(레2:1,레3:1,레7:3,대하35:12) 그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특별히 흠이 없는 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릴 때 그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깨달음)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계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나 그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시는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전처럼 우상과 탐욕과 죄악에 살던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시거나 그들 가운데 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을 압제하고 못살게 구는 이방 세력들의 심령 가운데 하나님께서 거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자아의 의로움과 교만에 빠져 있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 있겠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우상과 탐욕과 죄악을 좇던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심령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존귀하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교만함을 내려놓고 자신이 티끌이요 먼지와 같은 자임을 고백할 때 거하신다는 것이죠.
자기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에노스임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자들에게 친히 거하시는 분입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2959805
(적용)창세기 18장 후반부에 보면 소돔 성을 하나님께서 불과 유황으로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스바냐에서 말씀하시는 ‘여호와의 날’ 곧 ‘심판의 날’이 바로 그런 날인 셈입니다.
그때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그때 하나님 앞에 소돔 성에 사는 롯을 향해 중보기도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의인 오십명만 있으면 그 성을 멸하지 말아 달라고 간구하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의인 오십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45명만 있으면 멸하지 말아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45명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40명, 30명, 20명, 10명만 있으면 멸하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아브라함이 간구하죠.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의인 40명도, 30명도, 20명도, 10명도 없어서 멸할 것이다, 하고 말씀합니다.
그만큼 소돔 성에 사는 사람들은 다들 죄악과 탐욕과 우상숭배에 빠진 채 자기 교만과 아집 속에 살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들의 심령 가운데 하나님께서 거하실만한 심령, 그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할만한 마음 그릇이 없었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소돔 성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자기 의를 좇아 자기 배만 채운 채 온갖 죄악과 탐욕과 우상숭배와 동성애를 즐기는 자들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날 곧 심판의 날에 불과 유황으로 멸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중보기도를 드릴 때 어떤 자세로 기도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바리새인처럼 나는 일주일에 이틀을 금식하고 또 온갖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를 좇아 살고 있으니, 제 간구하는 기도를 들어주셔야 합니다, 하고 기도한 것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창18:27)
아브라함은 거룩하신 하나님, 존귀하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자신이 티끌이요 재와 같은 존재임을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불어버리면 언제라도 사라질 존재처럼 연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임을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만큼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정직하고 겸손하게 간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아브라함이 기도하는 그 중심에 하나님께서 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원성)이것은 요한복음 15장 1-4절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깨달음)예수님은 참포도나무요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는 포도나무 가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포도는 가지에 열리는 것인데 그를 위해 주님께서 말씀한 것은 주님 안에 거할때에 주님이 원하시는 포도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적용)왜 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겠습니까?
요한복음 15장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애찬과 성찬식을 제정하면서 제자들에게 제자강화의 차원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십자가에 죽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가야 할 시간이 다가온 것을 아시고 제자들과 이별하기 전에 당부하고자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내 제자라면 내가 원하는 열매를 맺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뜻과 무관하게 병도 고치고 귀신도 내좇고 기적을 행하지만 주님 안에 거하지 않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교만한 모습으로 행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통해서 참된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그렇기에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하고 말씀하신 참 뜻이 무엇입니까?
스바냐의 말씀처럼 죄악과 탐욕과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는 모습으로 주님을 모시는 심령이 되는 것이요.
자기 의로움과 자기 능력을 자랑하는 교만한 모습으로 살지 않고 언제나 티끌이요 재와 같은 존재임을 잊지 않고 사는 심령이 되는 것이죠.
그런 심령 속에 거룩하신 주님은 언제나 함께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조동우 집사님도 그런 심령으로 빚으시고자 1주일간 그의 가슴을 연 상태로 지내게 하셨고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7610049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죄와 탐욕과 우상숭배의 마음을 비우고 티끌과 같은 겸손한 심령으로 주님을 모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우리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주님은 조동우 집사님의 수술 현장에 찾아와 임재하셔서 이전에 세상 방식만을 좇던 삶에서 돌이키게 하신 것 아니더냐?”
“우리 주님께서 스나뱌를 통해 친히 말씀하신 바도 그것이지 않더냐?”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죄악과 탐욕과 우상숭배에 빠진 그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여호와의 날 그 심판의 날을 선포하도록 한 것 아니더냐?”
“그 자신이 연약한 티끌이요 먼지와 같은 존재임을 고백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롯을 구하신 것도 같은 이치이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기를 네가 원한다면 너도 죄와 탐욕과 우상숭배를 멀리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구하는 심령이 돼야 하지 않겠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기 자아와 자기 교만에 빠져 있다면 거기에서 돌이켜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아보는 긍휼의 마음을 주님께서 원하지 않겠느냐?”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조동우 집사님과 같은 분들을 친히 찾아와 만나주시고 겸손하게 중보기도하는 이들의 기도에 친히 응답해주시는 분이지 않겠느냐?”
“주님은 포도나무요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라고 말씀하셨으니 참포도나무이신 주님의 가지로 붙어 있는 삶을 살 때 주님께서 네 안에 거하지 않겠느냐?”
“그런 너에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은혜베풀지 않겠느냐?”
(찬양)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예화)인터넷에서 가져온 이야기입니다.
만년설로 뒤덮인 히말라야 산속 동굴에서 하나님 앞에 한평생 기도하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명한 수도사였습니다.
그 분이 어느 날 눈을 감고 기도하다가 눈을 떠본즉 자기 앞에 어느 가톨릭 수도원 원장이 엎드려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여기에 왔나?”하고 물엇습니다.
그 원장은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큰 문제가 있어서 왔습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원장으로 있는 수도원은 젊은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고 경건을 훈련받는 훌륭한 수도원이었습니다.”
“지금은 왜 그런지 수도원이 텅텅 비었습니다.”
“찾아오는 젊은이도 없고 찬양소리도 그쳤습니다.”
“그저 책임자 몇 사람만 모여 있을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수도원을 다시 부흥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히말라야의 수도사는 잠자코 있다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죄 때문이요”
“죄때문이라고요? 아니 우리가 수도원에 있는데 누구를 살인하겠습니까? 강도질 하겠습니까”
“도대체 수도원에서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히말리야의 수도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죄가 있지요. 무지라는 죄가 있어요.”
“우리가 무엇을 모른다는 말입니까?”
그때 히말라야의 수도사는 이렇게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당신들 속에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한 하나님이 계시오. 당신들이 그분을 몰라보고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수도원 원장은 수도원으로 돌아와 그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처음에는 믿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 가운데에 사람으로 변장한 하나님이 계신다는데....”하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저마다 경건한 마음으로 형제를 쳐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분일까?저 분일까? 이 분이 하나님일까? 저 분이 하나님일까?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말도 조심하게 되고 믿음을 다시 추스르게 되고 사람을 존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저들은 찬송을 부르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함께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분위기도 확 바뀌었습니다.
감사 찬송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이렇게 치유되기 시작할 때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수도원이 다시금 젊은이들로 북적거렸습니다.
(깨달음)어떻습니까?
수도원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이 계신 것처럼 소중하게 대할 때 그 수도원에 새롭게 변화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죄악과 탐욕과 우상숭배의 마음을 비워내고 자기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며 다른 사람안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깃들어 있음을 믿고 존중하는 자들에게 친히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주님은 그 수도원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임재하고 계셨네요.”
“주님은 내 곁에 있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가운데에도 친히 거하고 계셨네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신다는 말씀은 지금 나와 함께 하고 있는 내 곁의 성도들을 향한 말씀인 줄 믿습니다.”
“주님. 저의 죄악과 탐욕과 우상숭배의 마음을 비워내고 오직 주님앞에 티끌이요 재처럼 겸손하게 주님을 모시고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여전히 내 자아와 내 고집스런 교만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을 구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해 주세요.”
(찬양)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지존자요 심판주이지만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제물삼기까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죄악과 탐욕과 우상숭배를 미워하시고 자기 교만에 빠진 자들을 여호와의 날에 소돔성처럼 심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손하게 주님을 갈망하는 자들을 스바냐처럼 구원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도 그 주님은 자기 교만을 내려놓고 내 곁의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는 이들에게 친히 임재하시고 거하셔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 농부되시는 아버지이신 줄 믿습니다.
그런 은총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60619796
728x90
반응형
LIST
'주일설교SundaySerm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일설교동영상_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습3:14-17)_2024.9.29. (1) | 2024.09.28 |
---|---|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습3:14-17)_2024년 9월 29일 주일설교문 (3) | 2024.09.27 |
사랑이 없으면3(고전13:1-3)_2024년 9월 15일 주일설교문 (5) | 2024.09.13 |
사랑이 없으면2(고전13:1-3)_2024년 9월 8일 주일설교문 (3) | 2024.09.06 |
사랑이 없으면(고전13:1-3)_2024년9월1일 주일설교문 (2) | 2024.08.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