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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유머)한 여학생이 매일 밤늦게 돌아다니면서 술 먹고 노래방 가고 밤늦게 집에 돌아옵니다.
이런 여학생의 생활을 영화로 만든다면 그 제목은 뭘까요? 문란(뮬란을 패러디함)
어떤 학생이 매일 F학점을 받다가 어느 날 우연히 시험을 봤는데 성적표에 B가 나왔습니다.
이 학생은 너무 감동해서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 영화 제목은 뭘까요? 하나B(하나비를 패러디함)
집을 지키는 용감한 가장의 생활을 영화로 만든다면 그 영화 제목은 뭘까요? 가계무사(카게무샤를 패러디함)
어떤 마을에 왕자들밖에 살지 않습니다. 이 마을을 영화로 만는다면 영화 제목은 뭘까요? 이집또 왕자(이집트 왕자를 패러디함)
(유머2)또 다른 유머가 있습니다.
모세가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방의 기쁨을 안고 부지런히 모세의 인도에 따라 걷고 있었습니다.
한참 후에 홍해 바다 앞에 다다랐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잡으러 애굽의 군사가 쫓아오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앞에는 홍해 바다가 놓여 있고 뒤에는 바로의 군사들이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위기에 몰렸다고 생각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같이 모세를 향해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1: 우리를 여기서 죽일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 2: 여기에서 죽을 바엔 차라리 다시 가서 노예가 됩시다.
그 외에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좀 해 보라고 모세에게 외쳐댔습니다.
한 참 뜸을 들이던 모세가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 이스라엘 백성들이여 안심하라. 내가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으로 다섯을 센 후 저 홍해 바다를 반으로 가르겠다.
모세는 두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다섯을 세기 시작했습니다.
모세: 하나(그러자 하늘의 구름이 검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 둘(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했습니다.)
모세: 셋(홍해바다 물결이 마구 출렁이기 시작했습니다.)
모세: 넷(무엇가 일어날 듯한 예감을 보여줍니다.)
모세: 이제 다섯을 세려고 하는 순간인데 모세 옆에 있던 한 꼬마가 모세에게 하는 말이 있었죠.
꼬마 아이: 아저씨 못세(모세?)
(깨달음)웃자고 하는 유머지만 그래도 하나 생각할 게 있지 않습니까?
인간은 그렇게 연약한 존재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이죠.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그 가운데 계시는 분 아니겠습니까?
모세는 자기 힘과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보여줄 수 없지만 모세의 심령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지팡이를 홍해바다로 내밀게 하셔서 홍해바다를 가르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내 약함을 드러낼 때 하나님께서는 강함으로 역사해 주실 것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내 겸손함을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는 존귀함으로 세워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내 무능함을 아뢸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유능함을 친히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홍해 앞에 선 모세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역사하신 전능하신 능력이었습니다.
(적용)우리가 새벽에 살펴본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전 곧 인간의 행전같아 보이지만 실은 성령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성령의 행전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주도하신 사람은 사도행전 1-12장까지 베드로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가 세워지게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3장-28장까지는 바울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 중 13-20장은 바울의 1·2·3차 전도여행이 나와 있고 21장은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한 내용, 22-26장은 예루살렘 산헤드린 법정에서 심문받고 가이샤라로 이송돼 재판받고 감금된 내용이 기록이 돼 있었죠.
27장에는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는데 유라굴라 광풍에 14일간 떠밀리다가 멜리데 섬에 구조되고 3개월을 지내게 되죠.
28장은 드디어 로마 내륙에 당도하고 네로 황제의 법정에 서기 전까지 셋집을 얻어 2년간 생활하는 모습이 마지막 내용이죠.
사도행전의 기록은 거기에서 끝나지만 성령행전은 현재진형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새벽묵상을 통해 나눴습니다.
바울은 그 후 무죄로 풀려나 나이 많은 제자 디도를 크레타 섬의 담임목회자로, 젊은 디모데를 에베소교회 담임목회자로 세우죠.
자기 자신은 이전 지역을 돌면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는데 그때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를 써 보내 격려했죠.
그 무렵인 A.D.64년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하는데 네로 황제는 그 책임을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돌리고 바울을 체포하죠.
그때 바울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메마르틴 지하 감옥에 갇히고 A.D.67년 봄 67세 때 디모데후서를 써 보내고 참수당합니다.
34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 참수형 당하기까지 무려 30년 넘게 복음을 전한 바울이었습니다.
(깨달음)어떻습니까?
바울은 자기 연약함과 무능함과 병약함을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구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의 중심에 늘 거하셨고 동행하셨고 그를 통해 놀라운 기적과 능력을 행하도록 역사해 주셨던 것입니다.
마지막 체포당해 로마의 지하 메마르틴 감옥에 갇혀 참수형 당할 때까지도 친히 그 심령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적용)우리 하나님은 오늘도 바울처럼 자기 연약함을 인정하고 의지하는 자녀들에게 친히 거하시는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 무능함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자녀들에게 친히 거하시는 아버지이신 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 교만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자녀들에게 친히 역사하시는 아바 아버지이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스바냐는 남왕국 유다의 14대 왕 므낫세의 통치와 아들 아몬의 통치에 이어 16대 왕 요시야가 다스릴 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선지자입니다.
므낫세는 아버지였던 히스기야와 달리 우상숭배의 길을 걸었고 이사야 선지자를 톱으로 켜 죽였다는 전승이 내려올 정도죠.
그의 아들 아몬도 아버지 므낫세가 걷던 우상숭배의 길을 따라 걷다가 2년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 무렵에 8살 된 요시야가 왕으로 등극했고 통치 18년 즈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좇아 행했습니다.
굳게 닫힌 성전의 문을 열었고 무너진 성전제단을 다시금 쌓아 올린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성전을 수리하면서 모세의 율법책도 발견했는데 그 말씀을 토대로 각종 절기와 제사까지 복원시켰습니다.
요시야 왕이 성전제단을 정화시키고 수축하던 그 무렵인 B.C.622년에 하나님의 말씀이 스바냐에게 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겠습니까?
어린 요시야 왕이 새로 왕에 등극했다 해도 기득권층에 속한 이들은 이전의 제도와 방식을 더 선호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보다 사회적인 불의를 좇아 살고 우상과 타협하며 사는 모습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스바냐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선포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 앞에 구하지도 않는 교만한 자들을 진멸하도록 하신다는 게 그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약한 자들을 억업하고 불의를 좇는 자들을 멸하시겠다는 게 그것입니다.
더욱이 바알이라는 우상을 좇고 암몬 나라의 몰렉신과 같은 우상을 좇아 사는 자들에게 심판하도록 명하신 게 그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스바냐서에서 계속 강조하는 ‘여호와의 날’ 곧 심판의 날입니다.
물론 그 심판의 날에도 하나님에 의해 감춤을 받는 사람, 하나님의 의해 구원받는 자들이 있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이방 세력의 침략에 의해 멸망당할 때 그 속에서도 건짐받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판의 날에 산으로 도망칠 게 아니라 함께 모여 회개하고, 공의를 구하고, 겸손한 모습을 회복하도록 요구하신 것입니다.
온갖 죄악과 탐욕과 우상에 빠져 수치를 모르는 자들은 ‘여호와의 날’에 심판하시지만 겸손하게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구원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숨김받는다, 하나님의 의해 구원받는다, 스바냐의 이름 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여호와의 날, 그 심판의 날에 죄악과 탐욕과 우상을 좇는 이스라엘 백성만 심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 북쪽 앗수르 제국과 주변 이방 세력들조차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자 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억압하지 말고 겸손하게 살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본문)바로 그와 같은 내용을 선포한 스나뱌는 3장 후반부에서 심판의 날에 구원하시는 걸 바라보며 기뻐하도록 선포합니다.
그러면서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 본문 17절에서도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명확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원해)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너의 가운데에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가운데’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케레브’(קֶרֶב)인데 ‘-사이에’ ‘-중간에’ ‘-안쪽에’라는 뜻이 있습니다.
인간의 몸을 빗대서는 ‘복부’를 가리키기도 하고 또 감정과 생각의 중심 부분을 말하기도 합니다.
레위기에서는 짐승의 번제물을 드릴 때(offer)도 이 단어가 쓰이기도 했습니다.
(깨달음)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너의 가운데 계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사는 자들에게 친히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생각과 감정까지도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드리며 사는 자들에게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번제물로 내어드리며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에 복종하는 자들에게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원성)그것은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새의 8명의 아들들 가운데 막내 아들 다윗을 왕으로 기름붓게 하셨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이새의 장자 엘리압의 준수함을 보고 이가 하나님께서 선택한 왕이구나 생각하고 기름을 붓고자 했죠.
그러나 그가 아니라고 할 때 둘째 아들 아미나답 셋째 아들 삼마를 보고 외적인 기준으로 왕으로 기름붓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게 있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그때의 ‘중심’이란 바로 ‘내적인 권위’(authority inside)를 말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는 중심을 말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주권에 온전히 복종하는 마음 중심을 말한 것입니다.
그만큼 다윗도 자기 생각과 감정까지도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드렸던 것입니다.
그런 다윗이었기에 골리앗을 죽인 후 사울의 칼날에 도망쳐다닌 10년간에도 하나님은 늘 그의 심령에 거하신 것이었습니다.
(적용)하나님은 저 하늘에 계신 지존자로서 하늘과 땅과 땅 아래 모든 정사와 권세를 다스리시는 통치자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이 땅에 사람들 사이에 계시되 그 마음 중심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며 사는 자들에게 좌정해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죄악과 탐욕과 우상을 좇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분이시지만 자기 연약함과 부족함을 알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자들의 심령 가운데 친히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하고 애굽 군대가 추격해올 때 자기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신 것처럼 말입니다.
대머리에 안짱다리에 안질까지 겹친 바울도 자기 능력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음을 알고 하나님께 자기 중심을 내어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 바울을 통해 놀라운 역사를 행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다윗도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10년 넘게 광야를 전전긍긍하며 도망자로 살아갈 때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지금 여호와의 날 곧 불과 유황과 적군의 칼날에 심판받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래서 너희들의 죄와 탐욕과 우상숭배의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선포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자들의 심령 가운데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 친히 거하셔서 심판 가운데서도 구원하시는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 친히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를 때 그의 지팡이나 그의 지략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일이 아님을 네가 알지 않느냐?”
“바울이 가는 곳마다 기적을 행하고 귀신을 내쫓고 병든 자를 고칠 때 그의 힘과 능력으로 일어난 일이 아님을 네가 알지 않느냐?”
“이새의 8명의 아들들 가운데 다윗이 왕이 된 것도 그가 힘 있고 남다른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니지 않느냐?”
“자기 부족함과 연약함과 무능함을 하나님께 내어놓고 오직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자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시는 것 아니더냐?”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신다는 여호와의 날에도 하나님에 의해 숨김받는 자들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는 자들도 바로 그런 자들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 아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네 힘과 능력과 경험만을 맹신하지 말고 너의 약함과 무능함과 한계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셔야 하지 않겠느냐?”
“네 마음 중심을 네가 좌지우지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네 마음 중심의 통치권을 내어드릴 때 하나님께서 네 가운데 계셔셔 역사하지 않겠느냐?”
“60세에 달한 바울이 멜리데 섬에서 곧장 로마 내륙으로 가지 못한 채 3개월 11일이 걸린 것도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하도록 하기 위함이지 않았더냐?”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어도 10년 넘게 인생 역경을 거친 것도 그 마음 중심을 하나님께 복종하는 과정으로 삼으신 것 아니더냐?”
“오늘을 사는 네가 모세처럼 바울처럼 다윗처럼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마음 중심에 하나님의 통치권을 모시고 살 때 어찌 네 삶에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겠느냐?”
(찬양)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성화)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돈 궤를 맡은 청지기였습니다.
돈 궤를 맡았다는 것은 총무 역할을 했던 것이죠.
아무한테나 총무 역할을 맡기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12 제자들 가운데 가롯 유다를 신임하고 또 신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무한 신뢰를 받은 가롯 유다였지만 도리어 예수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자기 죄악과 탐욕과 우상숭배라는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 채 예수님을 은전 30냥에 팔아넘긴 것이었습니다.
삼손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나실인으로 선택받은 자였습니다.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산다면 그 힘은 일평생 사라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과 결혼하여 사는 게 부모의 기쁨이자 하나님의 기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블레셋의 들릴라는 이방 여인에게 빠져 그녀의 유혹 앞에 머리카락이 잘려나갔고 급기야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때까지도 삼손은 자기 힘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줄 알았지만 힘을 잃고 나서야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처럼 자기 탐욕과 교만이라는 죄악은 우상숭배처럼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지 못하는 죄악의 원흉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예화)한 선비가 나룻배를 타고 건너는데 갑자기 폭풍이 불어 닥쳤습니다.
배가 심하게 흔들리자 겁에 질린 선비의 얼굴이 새하얗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사공이 무서우냐고 묻자 선비는 그만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선비는 사공을 향해 허세를 부리기 시작했죠.
“사공 총각! 당신 혹시 논어를 읽어봤소?”
“아니오. 논어는 들어보지도 못했는데요.”
“어허 한심하군! 남자로 태어나 논어를 모른다면 1/4은 죽은 생명이요. 그렇다면 맹자는 읽어봤소?”
“아니요. 그것도 처음 듣는 소린걸요.”
“허허 큰일이군! 그렇다면 당신은 반(半)은 죽은 목숨이요. 어떻소? 혹시 시경은 알고 있소?”
“선비님. 미안합니다. 그것도 처음 들은 것인데요.”
“이거 정말 큰일이군! 그렇다면 당신은 3/4이나 죽은 생명이요.”
폭풍은 계속 불어닥쳤고 배는 더욱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잠시 후 이번에는 사공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선비님, 혹시 헤엄칠 줄 아십니까?”
“아니오, 난 공부하느라 헤엄 같은 것은 배우지도 않았소.”
“그렇다면 선비님 목숨은 완전 죽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그 사공은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배는 이미 물이 새고 있었고 배는 점점 가라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아무리 가진 것이 많고 아는 것이 많다 할지라도 생명의 진리를 알지 못한다면 죽음 목숨과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영원한 생명의 진리를 모른다면 이 땅에서 아무리 떵떵거린 채 산다 한들 지옥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원성)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고 응답해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가롯 유다가 예수님의 신임을 받았어도 자기 죄악과 탐욕이라는 교만을 내려놓지 못할 때 심판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네요..”
“태어나기 전부터 나실인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삼손도 자기 힘의 근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죄악과 탐욕이란 우상숭배에 빠져 살 때 형편없는 인생으로 끝나고 말았네요.”
“아무리 논어와 맹자와 시경을 다 알고 있다 해도 수영을 모른다면 배가 가라앉을 때 자기 생명을 건질 수가 없는 일이네요.”
“아무리 가진 게 많고 아는 게 많아도 영생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중심에 모시지 못한다면 지옥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네요.”
“주님 모세처럼 바울처럼 다윗처럼 나의 연약함과 무능함과 부족함을 하나님께 겸손하게 아뢰며 하나님을 제 마음 중심에 모시고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리하여 나의 나된 것은 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백하며 살 때 약함 가운데 능력이 되시는 주님의 능력을 매일매일 경험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찬양)약할 때 강함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주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십자가 죄사하셨네 주님의 이름 찬양해 주 나의 모든 것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죄와 탐욕과 우상숭배라는 교만한 자의 심령 속에는 거하지 않는 분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죄인됨을 겸손하게 고백하고 하나님의 통치권을 온전히 모시는 자의 심령가운데서 거하시는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모세처럼 바울처럼 다윗처럼 내 약함과 무능과 부족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의지할 때 주님께서 친히 우리 가운데 계셔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줄 믿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가롯유다나 삼손이나 그 선비처럼 가진 것과 아는 것과 경험을 자랑치 않고 주님의 주권을 겸손하게 모시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자들의 심령가운데 주님은 항상 함께 거하실 것이고 그런 자들을 통해 주님의 능력을 친히 베푸시사 구원의 손길을 펼쳐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총의 주인공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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