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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17세기 대표적인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는 수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성경을 모티브로 한 작품들입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돌아온 탕자〉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요구해 집을 나가 모두 탕진한 후에 집으로 돌아오는데 멀리서 아들을 알아본 아버지가 달려가서 목을 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그 그림의 제목은 〈돌아온 탕자〉라고 붙이기 보다는 ‘아버지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란 제목이 더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자식이 속을 썩이고 세월을 탕진하며 산다 해도 자기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을 어느 부모가 모른 척할 수 있겠습니까?
렘브란트는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통해 명성이 자자했고 많은 부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자기 뜻과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4명의 자식 중 3명이 어린 나이에 죽었고 사랑하는 아내도 사별했고 마지막 아들 하나마저 자신이 죽기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인생 마지막 무렵에는 물감 살 형편도 안 되는 아주 궁핍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 그가 죽기 1년 전에 그린 〈돌아온 탕자〉라는 작품은 실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그려 넣은 것 아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 재능을 이전까지는 자기만을 위해 사용했는데 이제라도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 용서받고 싶은 심정으로 말입니다.
그 작품에서 탕자가 신은 신발은 다 해지고 낡았고 벗겨졌습니다.
여태 자신이 살아온 삶의 모습이 그토록 온전치 못했음을 묘사한 것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탕자의 어깨 위에는 아버지의 오른손과 왼손이 다르게 묘사돼 있습니다.
아버지의 왼손은 힘줄이 드러난 남성의 강한 손처럼 그렸습니다.
오른손은 가련한 어머니의 손 같은 여성의 손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지난 세월 자신은 철부지와 같은 형편없는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강함과 부드러움을 품어주고 계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깨달음)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저 인자한 표정으로 이뻐 죽겠다고 하는 표정만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를 바라보면서 분노하시고 슬퍼하시는 감정이 섞여 있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죄악을 바라보면서 불쌍히 여기시고 안타까워 하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자식이 탕자처럼 제멋대로 굴고 부모를 거역하며 사는데 그런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처럼 하나님도 그런 모습으로 바라보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 가운데 넘어지고 쓰러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모습 그대로를 바라보시고 품으시는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나의 죄악을 보고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분노 가운데서도 나를 긍휼히 바라보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때문에 우리가 넘어지는 죄악 중에서도 하나님을 갈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속 탕자도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고 〈돌아온 탕자〉를 그린 렘브란트도 죽기 1년 전에 하나님 앞에 돌아갔던 것입니다.
(적용)물론 우리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내 삶의 모든 일이 순탄하게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를 합니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이 닥쳐오면, 내 힘과 노력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하나님은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 걸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 모양 이꼴일까?”
그런 의문과 함께 구원의 감격마저도 흔들리게 됩니다.
경남 진주에서 목회한 어떤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 교회 청년들이 말레이시아로 단기선교를 갔는데 마지막 날 물놀이를 하던 일부 청년들이 급류에 휩쓸렸습니다.
당시 성균관대 2학년이던 목사님의 아들이 수영을 해서 두 명의 청년을 구해내고 자신은 익사하게 됐습니다.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이었겠습니까?
결국 그 목사님의 아들은 의사자로 인정되어 현충원 국립묘지에 안장됐습니다.
받은 보상금으로는 그 아들의 이름을 따서 ‘요한선교회’라는 선교회를 만들었고 10년간 성도들과 함께 그 땅에 다섯 개의 교회를 건축해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은 아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조기 은퇴를 하고 교단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급성 뇌종양이 생겨 수술을 했습니다.
뇌암 4기로 진단을 받고 30번의 항암치료를 받고 완쾌되어 아들이 못다 이룬 선교지로 떠난 것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을 사랑하신다면 그 목사님의 가정에 좋은 일이 일어나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내 가정과 자녀들에게도 좋은 일이 일어나야 되는 게 아닙니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온 가족들이 건강하고 직장과 사업도 잘 되고 자녀들도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고 어디를 가더라도 자랑할만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 목사님의 아들은 다른 친구들을 살려냈지만 죽었고 그 목사님도 조기 은퇴를 통해 선교지로 떠났습니다.
우리가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그 상황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그 목사님은 그런 아픔과 고통과 환란을 당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믿고 선교지로 떠났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 제물로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누가 감히 자기 아들을 제물삼으면서까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망나니 같은 탕자요 부모를 거역하며 사는 형편없는 자식이라 할지라도 그 자식을 십자가에 제물로 내놓을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제물로 삼으면서까지 나를 사랑해주신 분입니다.
그 사랑이 그 목사님의 심령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아들을 기꺼이 천국으로 보낼 수 있었고 아들이 못다한 삶을 이루고자 선교지로 떠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흔들리고 환경이 어려울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 것입니까, 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나를 이 모양 이 꼴로 내버려두고 계시는 것입니까,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일어난 그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은 내 편이 되어주시고 나를 잠잠히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탕자와 같은 이들을 분노 가운데서도 긍휼로 품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절망과 좌절 속에 있는 이들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품으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내가 변덕을 부리고 내 믿음이 흔들릴 때에도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제물삼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내 심령에 확신을 불어 넣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랑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스바냐는 남왕국 유다의 14대 왕 므낫세의 통치와 아들 아몬의 통치에 이어 16대 왕 요시야가 다스릴 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선지자입니다.
므낫세는 아버지였던 히스기야와 달리 우상숭배의 길을 걸었고 이사야 선지자를 톱으로 켜 죽였다는 전승이 내려올 정도죠.
그의 아들 아몬도 아버지 므낫세가 걷던 우상숭배의 길을 따라 걷다가 2년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 무렵에 8살 된 요시야가 왕으로 등극했고 통치 18년 즈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좇아 행했습니다.
굳게 닫힌 성전의 문을 열었고 무너진 성전제단을 다시금 쌓아 올린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성전을 수리하면서 모세의 율법책도 발견했는데 그 말씀을 토대로 각종 절기와 제사까지 복원시켰습니다.
요시야 왕이 성전제단을 정화시키고 수축하던 그 무렵인 B.C.622년에 하나님의 말씀이 스바냐에게 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겠습니까?
어린 요시야 왕이 새로 왕에 등극했다 해도 기득권층에 속한 이들은 이전의 제도와 방식을 더 선호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보다 사회적인 불의를 좇아 살고 우상과 타협하며 사는 모습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스바냐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선포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 앞에 구하지도 않는 교만한 자들을 진멸하도록 하신다는 게 그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약한 자들을 억업하고 불의를 좇는 자들을 멸하시겠다는 게 그것입니다.
더욱이 바알이라는 우상을 좇고 암몬 나라의 몰렉신과 같은 우상을 좇아 사는 자들에게 심판하도록 명하신 게 그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스바냐서에서 계속 강조하는 ‘여호와의 날’ 곧 심판의 날입니다.
물론 그 심판의 날에도 하나님에 의해 감춤을 받는 사람, 하나님의 의해 구원받는 자들이 있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이방 세력의 침략에 의해 멸망당할 때 그 속에서도 건짐받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판의 날에 산으로 도망칠 게 아니라 함께 모여 회개하고, 공의를 구하고, 겸손한 모습을 회복하도록 요구하신 것입니다.
온갖 죄악과 탐욕과 우상에 빠져 수치를 모르는 자들은 ‘여호와의 날’에 심판하시지만 겸손하게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구원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숨김받는다, 하나님의 의해 구원받는다, 스바냐의 이름 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여호와의 날, 그 심판의 날에 죄악과 탐욕과 우상을 좇는 이스라엘 백성만 심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 북쪽 앗수르 제국과 주변 이방 세력들조차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자 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억압하지 말고 겸손하게 살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전개)스나뱌 3장 후반부는 여호와의 날 곧 그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걸 바라보며 기뻐하도록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지난 2주간에 살펴본 말씀은 ‘여호와의 날’ 곧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밝혀주는 말씀이었습니다.
15절에서도 또 17절에서 계속 반복되는 말씀이 ‘너의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모든 정사와 권세와 주권을 살피시는 지존자 하나님이지만 동시에 이 땅의 사람들 사이에 그 사람들의 심령가운데 친히 거하시는 하나님이란 사실입니다.
(원해)‘가운데’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케레브’(קֶרֶב)인데 ‘-사이에’ ‘-중간에’ ‘-안쪽에’라는 뜻이 있다고 했죠.
인간의 몸 중심을 말하는 ‘복부’를 가리키기도 하고 감정과 생각의 중심을 말하기도 합니다.
레위기에서는 짐승의 번제물을 드릴 때(offer) 그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깨달음)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너의 가운데 계신다’는 의미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감정까지도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내어드리며 사는 자들의 중심에 하나님께서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번제물로 내어드리듯이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온전히 복종하며 사는 자들의 심령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 막내 아들 다윗을 왕으로 선택해 기름을 붓게 하신 것도 같은 이치였습니다.사무엘 선지자는 아들들의 외적인 모습에 치중했지만 하나님은 속 중심을 보신다(삼상16:7)고 했죠.
그 중심이란 배다른 막내 아들로 양치기에 내몰린 환경속에서도 원망치 않고 모든 주권을 갖고 있는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삶, 그 너머 하나님의 통치권을 온전히 복종하며 사는 순종의 모습이어죠.
바로 그런 자들의 심령 가운데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거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적용)그것은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 차원으로 성전 문을 열고 제단을 수리하고 절기와 제사를 복원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런 마음으로 회복하라는 차원이지 않겠습니까?
그 전까지만 해도 요시야의 아버지 아몬을 따라 또 그 할아버지 므낫세의 치세 시절 모두가 하나님을 마음 속에서 없애버린 채 죄와 탐욕과 우상을 좇던 마음 중심으로 살았으니 말입니다.
더욱이 사회적으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짓밟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아보지 않는 자기 중심적인 마음만 갖고 살았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요시야의 종교개혁과 함께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령에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권을 모실만한 마음 그릇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자아와 의로움과 고집으로 똘똘 뭉쳐 있는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죄인을 고백하며 탕자의 모습처럼 주님 앞에 나아오도록 말입니다.
그래야 여호와의 날 곧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 너희를 감싸주시고 덮어주시고 구원해주지 않겠냐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탕자를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죄악 가운데 있는 자녀를 진노 가운데서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줄 믿습니다.
(본문)오늘 본문 17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원해)여기에 ‘전능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기보르’(גִּבּוֹר)는 ‘강함’ ‘거대함’이란 뜻입니다.
다른 영문번역판은 ‘승리의 전사자’(victorious warrior)로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홍해에서 애굽 군대를 몰살시킨 능력도 그렇고 앗수르의 18만 5천명 대군을 하룻저녁에 전염병으로 몰살시킨 능력도 그렇죠.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이 죄악과 탐욕과 우상숭배의 길을 내려놓고 나아온다면 이방세력들을 다 몰살시켜주지 않겠냐 하는 것입니다.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께 탕자와 같은 네가 돌아온다면 그 기쁨을 무엇에 비할 수 있겠느냐 하는 뜻입니다.
그런 너로 인해 즐거워하시고 기뻐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라는 부분은 영문번역판에서 여러 의미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더이상 너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NIV) “더이상 지난 죄를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AMP)로 번역합니다.
또한 “그의 사랑으로 너를 갱신할 것이다”(NET)하는 번역도 있습니다.
이전에 탕자처럼 자기 죄악과 탐욕과 우상숭배에 빠져 방탕한 삶을 살던 자가 하나님 앞에 돌아온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지난 죄를 비난하거나 언급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43:25)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103:12)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히10:17)
(깨달음)자기 죄와 탐욕을 좇아 우상숭배자처럼 살아가던 백성이 탕자처럼 주님 앞에 돌아오는데 어찌 주님께서 용서해주지 않겠냐 하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흐느끼며 돌아올 때 그 아버지가 동구밖까지 나가서 목을 끌어안고 우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주님의 주권과 통치권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나아오는데 어찌 새롭게 갱신해주지 않겠냐 하는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갱신될 수 있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탕자가 아버지 앞에 돌아왔을 때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이는데 첫째 아들이 왜 그렇게 극성을 부리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그 아버지가 뭐라고 대답을 했습니까?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15:24)
아버지의 품을 떠나 방탕하게 살던 그 자식은 실은 잃어다가 다시 얻은 아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다가 탕자처럼 돌아온다면 새롭게 갱신된 아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자녀들을 품으시고 새롭게 하시는 사랑의 주님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당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없었다면 죄인인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새로운 자녀로 갱신될 수 있었겠습니까?
죄와 사망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로 새롭게 갱신된 것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 사랑 때문인 줄 믿습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잠잠히 사랑하시되 당신의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그 사랑으로 갱신해주신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천부적인 달란트를 갖고 수많은 명작으로 명성을 날린 렘브란트였지만 자식들 죽고 아내마저 사별하는 아픔을 겪지 않았더냐?”
“렘브란트가 죽기 1년 전에 ‘돌아온 탕자’를 그린 것은 자신의 죄악과 탐욕과 교만한 내면을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한 것 아니겠느냐?”
“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 뒤늦게 회개하고 아버지 품에 돌아갈 때 아버지가 먼저 나와 목을 끌어안고 품어주며 잃었다가 얻은 아들이라고 그를 갱신시켜주지 않았더냐?”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호와의 날 그 심판의 날에 그들이 죄와 탐욕과 우상숭배의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얼마든지 품어주고 새롭게 해 주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하나님은 네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너를 사랑하시는 분이요 매일매일 너를 새롭게 하시는 분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하나님은 네가 승승장구하는 그 때에는 물론이고 네가 아픔과 고통을 겪는 순간에도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는 분임을 말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십자가에 재물로 삼기까지 너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바 아버지이지 않더냐?”
“그 사랑을 네가 기억하고 가슴에 새긴다면 어찌 탕자처럼 하나님을 등지고 네 탐욕을 좇아 세상 길로 갈 수 있겠느냐?”
“설령 네 죄와 탐욕을 좇아 우상숭배의 길로 들어선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돌아서길 잠잠히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찬양)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예화)한 전도사님이 도자기 공장 지대에 사는 한 성도님을 방문했습니다.
그 성도님은 젊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신앙심을 갖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자기 힘과 자기 건강만 믿고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전도사님은 그 집에 도착해서 유리 상자 속에 든 두 개의 좋은 꽃병을 보고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이야. 너무나 멋있는데요. 아주 귀한 것이겠죠?”
그때 그 성도님이 대답을 했습니다.
“네 제게는 너무나고 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파시는 거예요?”하고 전도사님이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그 성도님은 고개를 휘저으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네. 이 세상 돈을 다 준다고 해도 저는 이 두 개의 꽃병은 절대로 팔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술주정뱅이에다 노름꾼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마귀에게 제 영혼을 맡겨 놓고 다녔던 것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교회의 집회에 참석했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쓰레기 더미에서 흙 한 무더기를 발견했습니다.”
“누군가 쓸 데가 없어서버린 흙 무더기였죠.”
“저는 그걸 집에 가져와서 반죽을 하고 모형을 만들어 구웠는데 이토록 예쁜 꽃병이 나오는 거였어요.”
“그날 저는 다짐을 했습니다.”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가지고 똑같은 일을 하실 수 있을 거야’하고 말예요.”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인 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상황과 처지에 있든 간에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우리를 새롭게 갱신시켜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죄의 자리에 있다면 그 자리에서부터, 실패의 자리에 있다면 그 자리에서부터, 힘겨운 고난의 자리에 있다면 그 자리에서부터 탕자처럼 아버지께 돌아가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새롭게 빚어주시고 품어주시는 아바 아버지이신 줄 믿습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주님은 내가 승승장구할 때도 그렇지만 내가 힘겨운 역경에 처할때도 함께 하시는 분임을 믿어요.”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되 독생자까지도 아끼없이 십자가에 제물삼기까지 나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새 자녀로 삼아주신 줄 믿어요.”
“그런데도 내 죄와 탐욕을 좇아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의 주권을 모시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살 때가 많아요.”
“주님. 그런 죄의 자리에 있을 때도, 실패와 좌절의 자리에 있을 때도, 고난의 자리에 있을 때도,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돌아가면 그 멋진 유리병처럼 저를 새롭게 빚어주시고 갱신시켜 주실 믿어요.”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갈망하고 의지하는 저를 바라보시고 잠잠히 사랑하시며 새롭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찬양)언제나 내 모습 너무나 부끄러워
무릎으로 주님께 기도로 가오니
나 홀로 서 있는 죽은 내 영 깨우사
주님만 나를 세워 내 영 살게 하소서
주님 내 안에 주님 내 안에 내 안에 계시고
주님 내 안에 주님 내 안에 나를 세워 주소서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내가 승승장구할 때도, 내가 역경에 처할 때도, 내 심령 가운데 시는 분이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죄악 가운데 있을지라도, 실패의 자리에 있을지라도, 그 자리에서부터 하나님께 나아가기면 하면 친히 새롭게 빚어주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죄와 탐욕과 우상숭배의 자리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와의 날에 심판하시겠다는 것도 그 뜻이요, 그런 그들이 언제라도 돌아오면 탕자를 품는 아버지의 사랑처럼 품어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나는 약하고 무능하지만 모든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온전히 의지할 수 있기 바랍니다.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하지라도 그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를 온전히 새롭게 갱신시켜주시는 은총으로 빚어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렇게 나를 바라보시며 잠잠히 사랑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런 은총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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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동영상_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습3:14-17)_2024.9.29. (1) | 2024.09.28 |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습3:14-17)_2024년 9월 29일 주일설교문 (3) | 2024.09.27 |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습3:14-17)_2024년 9월 22일 주일설교문 (7) | 2024.0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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