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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내 약함을 드러낼 때 하나님께서는 강함으로 역사해 주실 것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내 겸손함을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는 존귀함으로 세워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내 무능함을 아뢸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유능함을 친히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홍해 앞에 선 모세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역사하신 전능하신 능력이었습니다.
스바냐는 남왕국 유다의 14대 왕 므낫세의 통치와 아들 아몬의 통치에 이어 16대 왕 요시야가 다스릴 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선지자입니다.
므낫세는 아버지였던 히스기야와 달리 우상숭배의 길을 걸었고 이사야 선지자를 톱으로 켜 죽였다는 전승이 내려올 정도죠.
그의 아들 아몬도 아버지 므낫세가 걷던 우상숭배의 길을 따라 걷다가 2년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 무렵에 8살 된 요시야가 왕으로 등극했고 통치 18년 즈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좇아 행했습니다.
굳게 닫힌 성전의 문을 열었고 무너진 성전제단을 다시금 쌓아 올린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성전을 수리하면서 모세의 율법책도 발견했는데 그 말씀을 토대로 각종 절기와 제사까지 복원시켰습니다.
요시야 왕이 성전제단을 정화시키고 수축하던 그 무렵인 B.C.622년에 하나님의 말씀이 스바냐에게 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겠습니까?
어린 요시야 왕이 새로 왕에 등극했다 해도 기득권층에 속한 이들은 이전의 제도와 방식을 더 선호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보다 사회적인 불의를 좇아 살고 우상과 타협하며 사는 모습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스바냐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선포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 앞에 구하지도 않는 교만한 자들을 진멸하도록 하신다는 게 그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약한 자들을 억업하고 불의를 좇는 자들을 멸하시겠다는 게 그것입니다.
더욱이 바알이라는 우상을 좇고 암몬 나라의 몰렉신과 같은 우상을 좇아 사는 자들에게 심판하도록 명하신 게 그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스바냐서에서 계속 강조하는 ‘여호와의 날’ 곧 심판의 날입니다.
물론 그 심판의 날에도 하나님에 의해 감춤을 받는 사람, 하나님의 의해 구원받는 자들이 있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이방 세력의 침략에 의해 멸망당할 때 그 속에서도 건짐받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판의 날에 산으로 도망칠 게 아니라 함께 모여 회개하고, 공의를 구하고, 겸손한 모습을 회복하도록 요구하신 것입니다.
온갖 죄악과 탐욕과 우상에 빠져 수치를 모르는 자들은 ‘여호와의 날’에 심판하시지만 겸손하게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구원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숨김받는다, 하나님의 의해 구원받는다, 스바냐의 이름 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여호와의 날, 그 심판의 날에 죄악과 탐욕과 우상을 좇는 이스라엘 백성만 심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 북쪽 앗수르 제국과 주변 이방 세력들조차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자 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억압하지 말고 겸손하게 살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3:17)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너의 가운데에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가운데’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케레브’(קֶרֶב)인데 ‘-사이에’ ‘-중간에’ ‘-안쪽에’라는 뜻이 있습니다.
인간의 몸을 빗대서는 ‘복부’를 가리키기도 하고 또 감정과 생각의 중심 부분을 말하기도 합니다.
레위기에서는 짐승의 번제물을 드릴 때(offer)도 이 단어가 쓰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너의 가운데 계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사는 자들에게 친히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생각과 감정까지도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드리며 사는 자들에게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번제물로 내어드리며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에 복종하는 자들에게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새의 8명의 아들들 가운데 막내 아들 다윗을 왕으로 기름붓게 하셨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이새의 장자 엘리압의 준수함을 보고 이가 하나님께서 선택한 왕이구나 생각하고 기름을 붓고자 했죠.
그러나 그가 아니라고 할 때 둘째 아들 아미나답 셋째 아들 삼마를 보고 외적인 기준으로 왕으로 기름붓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게 있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그때의 ‘중심’이란 바로 ‘내적인 권위’(authority inside)를 말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는 중심을 말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주권에 온전히 복종하는 마음 중심을 말한 것입니다.
그만큼 다윗도 자기 생각과 감정까지도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드렸던 것입니다.
그런 다윗이었기에 골리앗을 죽인 후 사울의 칼날에 도망쳐다닌 10년간에도 하나님은 늘 그의 심령에 거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에 계신 지존자로서 하늘과 땅과 땅 아래 모든 정사와 권세를 다스리시는 통치자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이 땅에 사람들 사이에 계시되 그 마음 중심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며 사는 자들에게 좌정해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죄악과 탐욕과 우상을 좇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분이시지만 자기 연약함과 부족함을 알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자들의 심령 가운데 친히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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