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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이제 예루살렘교회의 우두머리인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비롯해 교회 장로들에게 ‘들어가’ 인사를 올렸죠. 그러자 야고보를 비롯한 초대 교회 지도자들이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줍니다. 물론 바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따뜻한 환대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전도할 때 이방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조상들의 신앙과 율례를 떠나라고 권했다는 잘못된 괴소문 곧 헛소문이 나돌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바울에 대해 반감을 가진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인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어떻게 매듭을 짓게 합니까? 교회 지도자들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반감을 달래기 위해, 야고보는 바울에게 그렇게 하도록 권면했죠. 이른바 가난한 네 사람이 나실인의 서원식을 행할 때 사도 바울이 동행하고, 그들의 비용까지 대 줄 것을 말입니다.
만약 그런 상황에 우리가 처했다면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아마도 저는 그 헛소문과 괴소문의 진위를 파악하는 게 먼저 해야 할 일이지 않겠냐고 대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야고보 사도가 조율하고자 하는 데로 기꺼이 수락을 하게 되죠. 왜 그렇습니까?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고 함이요,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해, 주님의 화평을 좇아 그렇게 순종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유대인들의 오해와 편견을 해소하기 위해 정결예식을 다 마쳤습니다. 그러면 이제 모든 원망이 사라지고 바울에 대한 오해도 다 풀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은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로 인해 또 다시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본문 27-29절입니다.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여기에서 말하는 ‘아시아’는 3차 전도여행의 중심도시인 에베소 지방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베소가 과연 어떤 도시였습니까? 에베소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수리아 안디옥’과 더불어 로마제국 4대 도시 중의 하나였죠.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항구도시로서 무역의 중심지였기에 그 당시 인구만 해도 25만 명이 살고 있던 도시였습니다. 우리 목포시 인구보다 더 많이 살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시리아, 인도, 이집트 등지에서 몰려온 상인들이 각종 식료품과 보석과 노예까지 끌고 와서 사고파는 동양 최대의 시장이 세워진 곳이었죠.
더욱이 그곳 에베소에는 24개의 유방이 달린 여신상 곧 ‘아르테미스 신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신상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무려 4배나 큰 신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세계 7개 불가사의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 온 무역상들과 잡상인들도 그곳 아데미 신상에 나가 자신들의 소원을 빌고 빌었겠죠. 그 까닭에 에베소 사람들 중에 은세공업자들은 금과 은으로 그 여신상을 만들어 팔면서 많은 수입을 거둬들이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곳 에베소의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3개월 가량 주님의 복음을 전했었죠. 하지만 그들 중 누구 하나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훼방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주님의 제자들을 따로 세워서 티란노스의 스콜레를 빌려 점심 낮잠을 취하는 시간에 2년간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역을 했죠. 그리고 그 즈음에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네 번에 걸친 편지도 보내서 해결을 짓기도 했죠. 더욱이 그 즈음에 바울을 통해 성령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펼쳐주셨는데, 바울이 천막 만드는 일을 할 때 쓰던 손수건과 앞치마를 통해 귀신도 떠나가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는 일이 일어났죠. 그러자 그곳의 무당과 마술사들도 바울처럼 흉내를 내 보지만 오히려 귀신에게 압도당하는 일을 겪었죠. 그 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전하는 주님의 복음을 믿고, 주님을 영접하기 시작했죠.
그런데 그때 에베소의 은장색들, 그 중에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이 아데미 여신상을 만들어 파는 것으로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었는데, 그 수입원이 끊길 것을 염려해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바울 일행인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끌고 연극장으로 가서, 2시간 넘게 소란을 피웠죠. 이른바 바울이 아데미 신전을 무시하고, 바울이 신전 자체를 우상이라고 규정한다면서 말입니다. 물론 그것을 일깨우기 위한 게 데메드리오와 많은 은장색들의 목적이 아니라 자기 돈벌이 때문에 그렇게 한 짓이었죠. 그날 서기장이가 나서서 그 모든 일을 정리하고, 그들을 해산시킨 일이 있었죠.
바로 그때 일들을 생생히 목격한 에베소의 유대인들이 지금 성전 안에 있는 바울을 알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안에 있는 모든 유대인 무리들을 충동시키셔 바울을 붙잡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말하는 것이죠. “저 바울이란 자는 우리 유대인들과 율법을 비방한 자였다”하고 말이죠. 더욱이 “유대인이 아닌 헬라인 곧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와 거룩한 전을 더럽힌 자였다”고 유대인들을 선동을 한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결코 그렇게 한 적이 없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에베소에서 바울에게 행했던 것과 똑같이 그를 잡고 폭행을 가하고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31절에서 보여주듯 천부장이 그 소식을 듣고 군사를 동원해 그곳에 들어가는데, 그때서야 그들이 바울 때리는 것을 그쳤다고 32절에서 전해주죠. 그때 천부장은 그들의 내막을 알 수가 없는 까닭에, 왜죠?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34절의 말씀처럼 천부장은 그들로부터 바울을 떼어내 성내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어떻습니까? 바울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 쉬지 않았겠습니까? 백성들로부터 두들겨 맞아 죽어가고 있는데, 천부장이 나타나 자신을 격리시켜 보호해 주면서 층계로 데리고 올라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도 군중들은 바울을 향해 소리치고 있는 모습입니다. 본문 36절 말씀처럼 “그 자를 없애 버려라”하고 말이죠. 그러자 바울은 자신을 영내로 끌고 가는 천부장을 향해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하고 묻죠. 그러자 천부장은 “당신은 그리스 말을 할 줄 아시오?”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얼마 전에 폭동을 일으키고 사천 명의 자객을 이끌고 광야로 나간 그 이집트 사람이 당신 아니오?”하는 상황이죠.
그때 바울은 39절-40절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말로 말하니라”
무엇을 생각하는 상황입니까? 바울은 지금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목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면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성령님께서 영감을 통해, 또 에베소의 제자들을 통해, 그리고 가이샤라의 전도자 빌립의 집에 온 예언자 아가보를 통해 이미 깨닫고 있던 바울이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사실을 생각하면서 할 수만 있으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바울의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맞아 죽을 위기에서 이제 보호를 받으며 영내로 끌려가는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22장은 동족 유대인들에게 히브리 말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모습으로 비춰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와 같은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지금은 바울을 증오하고 죽이려는 자들로부터 격리돼 한 숨을 돌릴 수 있는데도, 그런 상황조차도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고 있는 바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바울이 자기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음으로 양으로 그를 돕는 자들을 붙여주신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사명자는 자기 사명을 다할 때까지 죽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오늘도 주님께서 이끄시는 사명을 다하는, 가정과 일터와 주어진 속에서 주님의 사명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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