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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사도행전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행7:44–60)

by 똑똑이채널 2024.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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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은 공회 앞에서 설교한 스데반 집사의 마지막 진술과 더불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한 최후의 모습을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자신을 공회 앞의 심문대에 세운 공회원들에게 ‘부형들이여’하면서 예의를 갖추며 말하기 시작했었죠.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이삭과 야곱을 허락하시고, 또 야곱의 가족들이 기근 속에서 애굽에 내려간 것도 미리 요셉을 하나님께서 보내셨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유골을 애굽이 아닌 가나안 땅에 묻은 것도 먼 훗날 그 땅이 하나님의 약속이 땅이었기 때문이라고 설교했죠. 이른바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케 하시고, 그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신 것, 지금 나와 여러분들이 발로 밟고 있는 이 성전의 땅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약속의 성취속에 있는 일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후에 스데반 집사는 모세에 관한 이야기를 전했죠.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애굽에서 가나안 땅까지 인도해 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선택하신 일이었다고 말이죠.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모세를 볼 때 ‘누가 너를 우리의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면서 모세를 거부했다고 했죠. 그런데 그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한 공회원들의 태도와 똑같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이야기와 더불어 스데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40년 삶에 대해 말했는데, 그것을 광야교회의 삶이라고, 다시 말해 성막과 함께 한 그 삶을 광야교회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동식성막을 중심으로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 민족을 보호하시고 당신의 날개로 감싸주셨다는 것이죠. 그런데도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곧 황금송아지와 같은 우상숭배에 빠져들었다고 했습니다. 실은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공회원들의 심령 속에도 그와 같은 우상숭배의 마음이 깃들어 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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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스데반 집사는 마지막 진술을 해 나가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사실 이 진술을 하기 위해 여태껏 뜸을 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가 행한 이 최후 진술로 인해 그는 그들이 던진 돌에 맞아 최후를 맞이하게 되죠. 본문 44절입니다.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여기에 나오는 ‘증거의 장막’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후 모세를 통해 광야에서 성막을 만들게 했습니다. 그 성막이 바로 ‘증거의 장막’인 것입니다. 그 성막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적인 장소이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께서 만나는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그 성막안에는 십계명이 새겨진 모세의 돌판 즉 ‘증거판’을 넣어두도록 했는데, 그 증거판은 조막목으로 만든 법궤 곧 ‘증거궤’ 안에 두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성마을 일컬어 ‘증거의 장막’이라 부른 것이었죠. 물론 그 증거의 장막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막’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이 만나는 곳이라 해서 이름을 붙인 게 ‘회막’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만든 그 회막, 다시 말해 ‘증거의 장막’이 언제까지 존속했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이방인의 땅 곧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까지, 여호수아가 함께 그것을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른바 모세 때에 만들어진 그 증거의 장막이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전까지인 거의 480년 동안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의 시대에 이동식 성막, 곧 증거의 장막을 폐하고 붙박이 성전을 지었습니다. 사실 다윗이 그 성전을 짓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이 전장에서 피를 많이 흘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을 것 같아서, 자기 대에서는 붙박이 성전을 짓지 않았죠. 더욱이 하나님께서도 다윗 왕의 시대에 선지자였던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그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여태껏 너희들과 함께 동행하지 않았느냐? 내가 언제 너희들더러 붙박이 성전을 지어달라고 한 적이 있더냐?’(대상17:6)하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너의 아들의 시대에 “그가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대상17:12)이라고 말씀해 주셨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와 같은 사실을 알게 하셨을 때, 다윗은 성전건축에 관한 모든 재료들, 인부들을 다 준비해 놓았고, 솔로몬이 그 성전 곧 붙박이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죠. 총 7년에 걸친 공사기간 동안 동원된 연 인원만 해도 18만3천3백명이었습니다. 짐꾼 7만명, 채석공 8만명, 그리고 중간관리자가 3천3백명이 7년 동안 붙박이 성전을 건축하여 완공했던 것이죠. 마치 우리교회 예배당 건물처럼 3층 높이의 건물로서, 그 당시에는 최고로 으리으리한 건물이었죠. 그렇게 성전 건물을 완공한 이후에 솔로몬이 봉헌기도를 드리면서 이렇게 고백한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8:27) 그 당시 최고 수준의 최고 화려한 건물이었는데, 그런 성전조차도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모시거나 제한할 수 없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어찌 인간이 만든 건물 안에 제한시킬 수 있겠느냐는,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겸손한 고백이었죠.

바로 그 사실을 스데반 집사가 본문 48절의 이사야 선지자의 고백을 재인용하면서 공회원들에게 밝혀줍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무슨 뜻입니까? 스데반 집사 역시 솔로몬의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피조물인데, 어찌 성전의 건물로 하나님을 모실 처소로 제한시킬 수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최종진술, 그 공회원들 앞에 최후 설교를 하는데, 본문 51-53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스데반 집사의 최후설교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구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예고한 선지자들을 죽인 장본인이 당신들이고, 그들이 예언한 의인 곧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여 살인한 자들이 너희들이고, 그런 너희들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본문 54절에 그들이 마음에 질려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았죠. 그렇지만 스데반은 그때에도 천사의 얼굴과 같은 모습으로 성령에 충만하여 하나님을 주목하여 보는데, 성령님께서는 성령충만한 영적인 눈을 열어주셔서 하나님 우편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신 예수님을 보고 있노라고 말을 하죠. 그때 그 공회원들은 일제히 달려들어 스데반 집사를 끌고 나가 돌로 쳐 죽입니다. 그 일의 증인으로 청년 사울이 그 자리에 있었음을 본문 58절에 증언을 해 주죠.

 

오늘 이와 같은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공회원들과 유대인들은 이 땅에 참된 성전이요 참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이요, 성전이라는 건물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두려고 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종교 행위 자체로 자신들의 신앙심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이들이었죠.

오늘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주님의 참된 성전으로 우리 각자를 부르셨습니다. 그 분의 부르심 앞에 참되게 응답하며 사는 것이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향해 깨어있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예배당에 가두고 신앙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예배당 안에서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듯이, 예배당 밖에서도 그런 삶을 살아가는 자 그 사람이 참된 성전이요, 하나님의 성령을 모신 성전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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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BR 그 속에서 페르시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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