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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2005년에 KBS에서 연기시상식이 있을 때 최진실 씨가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대상을 받지 못한 그녀에게 어떤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조금 서원하시겠어요”하고 말이죠.
그러자 최진실은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최우수상에 만족합니다. 장미빛 인생은 내게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을 만큼 매 장면마다 후련하게 열정을 쏟았습니다.”
“뭔가 꽉 막힌 것을 발산한 느낌이었죠. 나는 그것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깨달음)어떤가요?
최진실 씨의 대답이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한 때 우리 사회에서 매장당할 뻔한 연기자가 ‘장밋빛 인생’이라는 드라마 주인공으로 선택된 것 자체가 보상 아니겠습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 감당해서 연기자로서 재기하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면 그것 자체가 보상 중의 보상이죠.
그보다 더 큰 상급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상이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었겠습니까?
연기대상을 목적으로 했다면 거기서 끝났을지 모르지만 그녀는 더 겸손하게 더 진실되게 연기에 몰입했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상받을 수 있었던 것이죠.
물론 그녀의 안타까운 죽음은 우리 사회를 혼란케 했짐나 그 당시의 그 모습은 어떤 삶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지를 일깨워준 부분이었습니다.
(적용)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죄와 사망의 구렁텅이에 버려졌던 우리에게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으로 빚어주시고 주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것 자체보다 더 큰 보상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에게 남은 것이 있다면 주님의 자녀다운 삶으로 내 손과 발이 주님의 복음의 도구로 살아가는 삶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2절을 통해 자신이 주님의 사도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란 헬라어로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인데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는 아닐지라도 너희들에게 만큼은 내가 사도이지 않냐 하고 말한 것입니다.
왜 바울이 그렇게까지 말한 것이었습니까?
그 당시에 사도 바울을 가리켜 사도가 아니라고 하는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옹호하는 사람들만 있었던 게 아니라 바울을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가롯 유다가 죽고 맛디아를 사도로 뽑을 때 주님과 동행한 자요 부활의 목격자를 그 기준을 뽑았는데 바울은 그렇지 못한 자가 아니냐, 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바울은 체포조를 동원해 다메섹 도상을 가는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왔고 그 주님을 목격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눈이 멀어 식음을 전폐하고 있을 때 다메섹의 아나니아에게 바울에게 찾아가라고 하면서 주님이 말씀하셨죠.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행9:15)하고 말이죠.
그래서 바울의 사도성을 부정하는 이들 앞에 바울은 그만큼의 정당성이 있는 것이죠.
나는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자요, 주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도라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종노릇하는 바울이라면 이렇게까지 밝히기보다 그냥 포용하고 수용하면서 넘어가도 되지 않겠습니까?
굳이 자신의 사도성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당당하게 밝힌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자기 자신이 사도임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모함을 가만히 내 버려 두면 사도로서 전한 복음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죠.
복음의 순수성과 완전성이 그들에 의해 훼손되는 것을 막고자 당당하게 사도성을 밝힌 것입니다.
더욱이 바울이 전한 복음이 훼손되면 복음 위에 세워진 교회가 훼손될 수 있기 때문에 당당하게 밝힌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은 일하는 소에 망을 씌우지 않는 것처럼 주님의 일을 하는 자를 교회가 부양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바울도 얼마든지 다른 사도들처럼 먹고 마실 권리가 있었죠.
구약을 보면 성전에서 섬기는 자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듯이 교회를 섬기는 자는 교회에서 경제적으로 책임져주는 게 당연한 일이죠.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도 명하신 바였습니다.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마10:10)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눅10:7)
주님은 제자들에게 전도여행을 보내면서 복음전도자들은 그 삯을 받는 게 마땅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도 그런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밤낮없이 애쓰면서 복음을 전하면서 고린도 교회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권리가 있지만 참는다고 했습니다.
주님께 부름받은 사도지만 자신의 대접받을 권리만 주장하면 자칫 복음의 순수성이 훼손될까 싶어 권리를 사용치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바울은 사랑의 종노릇하는 관점으로 자기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서도 바울은 우상의 음식을 먹을 수 있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가 실족할 수 있기 때문에 평생 먹지 않겠다고 했죠.
그때도 사랑의 종노릇하는 관점으로 우상의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포기하겠다고 했는데 지금도 사랑의 종노릇하는 관점으로 자기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적용)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내가 속한 곳에서 나의 권리만 주장하지 말고 주님 앞에 내 권리를 내려놓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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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오늘 본문 15-19절을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깨달음)우리는 알다시피 바울은 고린도 시장에서 텐트를 팔면서 자비량으로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텐트를 팔아서 경제적으로 모든 수요가 충족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죠.
고린도후서 11장 9절에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마게도냐에서 온 사람들겐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당시 헬라 문명이 우상의 신전들이었기 때문에 신전 사제들이 다 물질적으로 타락했습니다.
바울은 그들과 스스로 구별하기 위해서 경제적인 도움을 받지 않고자 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당대에 헬라 철학을 설파한 사람들은 그걸로 자기 밥벌이를 하고 있었는데 바울은 밥벌이 차원에서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경제적인 지원을 받지 않으려 했던 것입니다.
셋째로 고린도 교회에 바울바 게바파 그리스도파 같은 파벌이 있었는데 그들로부터 책잡히지 않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복음이 훼손당하지 않기 위해서 한 것입니다.
그만큼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본문 15절 후반부에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누구든지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자랑’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 복음이 훼손당하는 일이 있다면 차라리 죽겠다는 식으로 경제적인 지원을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다고 말한 것도 그런 뜻입니다.
(원해)‘부득불’이라는 헬라어 ‘아나케’(ἀνάγκη)는 ‘반드시’(necessity) 해야 하는 걸 말합니다.
왜냐하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아나니아를 통해 당신의 택한 그릇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이죠.
그전까지는 세상의 눈 먼 자였지만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죽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반드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해2)그래서 ‘화’란 헬라어로 ‘후하이’(οὐαί)인데 불행 슬픔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말을 잘못 생각하면 ‘미신’이나 ‘저급한 것’으로 이해하기가 쉽겠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저주하셔서 화를 내리시는 분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 자체가 슬픔이요 불행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것 때문에 자신을 선택하셨고 그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인데 반드시 그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절에서는 상을 받고자 자기 권리를 쓰지 않고 계속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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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2)본문 19-23절까지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깨달음)사실 바울은 다소에서 태어난 헬라파 유대인으로 해외파였습니다.
그 반면에 이스라엘 사회에서 태어나 전통적으로 히브리 말을 하고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히브리파 유대인 곧 국내파로 불렀죠.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해외파였지만 유대인을 만나면 유대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유대인을 얻고자 함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인 율법주의자들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 자체가 무용하고 무의미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잘못 안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의 의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한 것이었죠.
하지만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우리의 능력으로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허물을 더 알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율법의 문자보다 율법의 정신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더 알아야 하는 것이죠.
그걸 잘 알기에 바울은 복음으로 구원받은 자신이지만 율법아래에 있는 자들을 만나면 그들을 얻고자 자신도 율법 아래에 있는 자처럼 처신했다는 뜻입니다.
(원성)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이 2차 선교여행 때 바울이 루스드라에 가서 디모데를 제자로 삼습니다.
그런데 디모데 어머니는 유대인이고 아버지는 헬라인 곧 이방인이었습니다.
그 집안에는 이방인 아버지 곧 헬라인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디모데는 성인이 될 때까지 할례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그 디모데를 데리고 제자를 삼아 루스드라를 떠날 때 유대인들 앞에서 할례를 행한 것이죠.
루스드라에 있는 유대인들이 자칫 할례도 행치 않는 아들을 제자 삼는 걸 이단으로 여길까봐, 그 유대인들 앞에서 할례를 시행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과 접촉점을 갖고자 율법 아래에 있는 자처럼 행동했다는 것이죠.
(원성)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바울이 아덴에 간 장면이 나옵니다.
그 시가지에 우상이 가득 찬 걸 보고 분개했습니다.
그런데 파르테논 신전 아래에 있는 아레오바고에 가서 거기에서 철학들과 변론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죠.
그때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문구가 우상 앞에 쓰여 있었는데 바울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걸 가리켜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그들 앞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율법 없는 자처럼 그리스 아테네 사람들에게 다가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22절에서는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되었다,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약한 자’란 신체가 아니라 믿음과 심령이 약한 자입니다.
고린도에서 우상 제물을 먹는 걸 보고 우상에게 어떤 신적 능력이 있는가 보다, 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과 같죠.
그래서 바울은 심령이 약한 자가 실족할까 봐 우상의 음식을 평생 먹지 않겠다고 한 것이었죠.
그만큼 그 약한 사람들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적용)그런데 자칫 잘못 생각하면 바울을 기회주의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 율법 있는 자처럼, 율법이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처럼 여러 모양으로 나타났다고 한 것 말이죠.
하지만 바울은 복음의 본질에서만큼은 죄의 문제에서만큼은 확고부동했습니다.
지금 이야기는 것은 형식에 관한 것으로서 상대적인 사람들을 복음 안에서 얻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유럽 온 세계를 다 누비고 돌아다니면서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바울이 소망한 게 무엇입니까?
온 유럽의 복음화, 내 생에 십만 명 전도화, 그런 게 아니라 단 몇 사람이었습니다.
민족 복음화란 말이 참 좋지만 그렇게 큰 구호를 가지면 진실성이 결여됩니다.
큰 이벤트로 끝나버리고 말죠.
바울은 온 평생을 돌아다니면서도 단 몇 사람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족하다고 했습니다.
(원성3)물론 그것이 바울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죠.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2:5-7)
바울은 예수님께서 하신 그대로 쫓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인간들과 같이 이 땅에 내려 오셨던 그 모습 그대로 말이죠.
그래서 바울은 주님의 생명에 참여코자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품고 섬겼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런 방식으로 복음을 전한 근본 목적과 이유가 주님의 참 생명에 참예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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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복음의 본질안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복음으로 얻는 은혜를 베푸시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인생에 실패속에서 누군가 다시 일어설 기회를 준다면 그를 평생 잊지 못하는 것 아니겠느냐?”
“비록 대상과 같은 큰 상급을 받지 못해도 재기하는 것 자체를 보상으로 여길 수 있지 않겠느냐?”
“지옥갈 백성인 너에게 에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너를 구속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면 그것 자체가 큰 보상이지 않겠느냐?”
“그런 너에게 새 생명을 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고 베푸는 것 부득불 해야 할 일로 여길 수 있지 않겠느냐?”
“바울도 그를 위해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율법 있는 자처럼 율법이 없는 자들에게는 또 그들의 모습처럼 한 것 아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복음의 본질 안에서 한 영혼이라도 더 얻고자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누군가에게 다가선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겠느냐?”
“바울이 선교여행을 떠나기 전 루스드라에서 유대 율법주의자들 앞에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시행해 데리고 다닌 것처럼 말이다.”
“또 아테네에서 알지도 못하는 신을 숭배하는 그들에게 그 신을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며 복음을 전한 것도 그들을 품고자 한 것 아니었더냐?”
“지금 네게 주어진 삶 속에서 천하보다도 귀한 한 영혼이라도 품고자 여러 모양으로 애를 쓴다면 그것 자체를 주님께서 귀히 여기지 않겠느냐?”
(찬양)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산 것이라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장례식이 있어서 함께 예배를 드리며 유가족들을 위로했습니다.
유가족 중에는 주님을 믿지 않는 분들도 있었지만 그를 통해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이죠.
바울은 그렇게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들처럼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들처럼 복음으로 그들을 얻고자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다가간 것이었습니다.
아무쪼록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나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그 사랑에 응답하는 마음으로 한 영혼이라도 더 얻고자 애쓰는 그 삶을 주님께서 복내려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총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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