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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오늘 정남철 집사님이 5번 척추 디스크 파열로 인해 시술하는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오전 11시쯤 찾아갔고 11시 50분 경에 시술하러 들어갔는데 12시 20분 경에 수술실에서 나왔습니다.
시술한 의사는 잘 됐다고 말하는데, 경과를 좀 지켜보고, 좋으면 토요일 즘에 퇴원한다고 했습니다.
그 사이에 정 집사님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사실 동준건설 대표인데, 그 자리가 막중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19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는데, 요즘 건설경기가 안 좋아, 직원들 월급도 줄 수 없어서, 직원들을 정리할까 생각했다는 거죠.
그런데 전반기가 끝나기 한 주 전에 하나님께서 함평군에서 하는 56억짜리 공사에 입찰을 해서 낙찰받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깨달음)그 와중에 2월달부터 감기에 기침에 여러 몸살을 앓고 심장 부정맥으로 쓰러지기도 했는데 그 모두가 스트레스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회사가 어려워지니까 직원들을 정리하고 싶어도 막상 결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움 가운데서도 함께 살아갈 길을 찾고자 멈칫멈칫했던 것이고 그 와중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셨다고 고백을 한 것이죠.
곡성에 개발원을 건설할 때 그 공사가 50억 공사였는데 그때 하도급 업체 사장이 자살하는 일로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조사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회사는 결국 무혐의로 판명이 났는데, 만약 그런 일로 인해 위반이 나온다면 8개월가량 입찰에 참여할 수 없는 제제를 받는다고 하더군요.
그만큼 집사님은 회사 대표로사 회사를 지키고자 철저하게 준비를 해서 관리감독을 받아 무혐의를 받았을 때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그 모두가 회사를 지키고 직원들을 지켜 함께 살고자 하는 데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적용)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교회를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단 사이비들이 우리 교회를 향해 걸고 넘어지고 여러 시비를 걸어올 때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세상은 요지경이라고 퀴어 축제를 벌이고 동성애를 조장할 때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적인 가치관 대척점에 있고 또 우리의 자녀들이 이성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그 또한 맞서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길이고 그것이 교회를 지키는 길이기 때문이죠.
만약 동성애에 대해서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유럽이나 미국처럼 순식간에 우리나라를 동성애 물결을 이루고 말 것입니다.
그런 점들이 미연에 방지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영적으로도 기도할 뿐만 아니라 뭔가 행동해야 할 때 함께 해야 하는 것이죠.
만약 이단 사이비들이 저를 삯꾼목사라고 걸고 넘어지거나 기성교회를 강도의 소굴로 비난한다면 결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만일 그런 시비에 사랑으로 품는다면서 가만히 있으면 복음이 훼손당하고 교회가 훼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지키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변론하고 맞서서 행동하는 게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7610049
(역배)고린도 교회의 우상 제물을 먹을 수 있느냐, 먹을 수 없느냐, 하는 문제로 격심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사람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먹을 수 있다고 주장을 했죠.
물론 유대 율법 관습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먹을 수 없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들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지식들을 동원했습니다.
그래도 결판이 나지 않자 결국 에베소에 있는 사도 바울에게 편지를 써서 어느 쪽 논리가 정당한지를 물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편지를 받고 양 진영의 이야기를 다 들은 뒤에 어느 쪽 논리가 맞다고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출발점이 잘못 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죠.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출발점을 자신들의 지식으로 삼았습니다.
지식으로 출발점을 삼는 한 지식에 근거한 논쟁은 또 다른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은 결론을 얻지 못하게 되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바울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을 지식이 아닌 사랑의 관점임을 일깨워줬습니다.
그 사랑의 관점은 다름 아닌 자기 자유를 자발적으로 제한하여 상대방을 위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것이었죠.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 13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깨달음)바울이 채식주의자라서 그런 말을 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죠.
바울은 우상이란 쇠붙이나 나무 조각에 불과할 뿐 신적인 존재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은 자기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고 한 것이죠.
하지만 그런 자유가 있을지라도 자신이 그걸 먹으므로 인해 믿음이 약한 자가 누군가 실족할 수 있는 것이죠.
‘저렇게 믿음 좋은 바울도 신전의 음식, 우상의 음식을 먹네. 바울도 저 신전 앞에서 비는가 보다. 저 신전을 두려워하는가보다.’하고 말이죠.
그런 일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바울은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이 아닐지라도 공동체 사람들이 실족치 않도록 하고자 절대로 입에 대지 않겠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믿음이 연약한 자를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곧 자기의 자유를 자발적으로 제한한 일입니다.
(본문)오늘부터 살펴본 고린도전서 9장은 8장의 연장선상에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 1-2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원해)바울은 자기 자신이 주님의 사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로 번역된 헬라어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일명 ‘메신저’(messenger)입니다.
(깨달음)바울은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내가 사도니라, 하고 말합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당시에 사도 바울을 가리켜 사도가 아니라고 하는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바울을 옹호하는 사람들만 있었던 게 아니라 바울을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의 사도성을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사도성을 명백하게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자유자’다 하고 말했는데 그것은 로마 시민권자로서 자유인의 권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죠.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구원받은 자로서 ‘영적인 자유자’였습니다.
더욱이 바울은 ‘내가 사도가 아니냐’하면서 사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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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용)그런데 왜 그들이 바울의 사도성을 부정하는 것입니까?
가롯 유다가 목매어 죽고 사도를 보선하는 가운데 맛디아가 뽑혔습니다.
그때 기준이 있었는데 그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와 늘 함께 하던 자’였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바울이 사도가 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제자들처럼 주님과 함께 한 자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보내신 자가 주님이고, 자신은 주님의 메신저 역할을 하는 자이기에 충분히 사도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사도 바울도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목격한 자 중의 하나죠.
사도행전 9장을 보면 다메섹 도상을 가고 있는 바울에게 주님께서는 찾아와 만나주셨죠.
그때 다메섹의 아나니아를 향해 바울에게 찾아가라고 하면서 주님께서 그렇게 말했죠.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행9:15)하고 말이죠.
(원해2)그만큼 바울은 주님을 만났고 주님께 보냄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강조하는 바가 또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자신의 사도됨을 인친 것은 너희니라, 하고 말이죠.
여기에 ‘인치다’는 헬라어 ‘쉬라기스’(σφραγίς)는 ‘도장을 찍다’(a seal)는 말입니다.
(깨달음)옛날에 도장은 권위를 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 그 시신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장사했죠.
그랬더니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막고 봉인했습니다.
그때 ‘봉인하다’는 게 인쳤다는 뜻입니다.
만일 그것을 찢으면 처벌을 받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무덤을 깨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위 앞에서는 그 어떤 인간의 권위도 필적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의 권위로 바울의 사도됨을 인친 것이 너희들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이 타락한 고린도 도시에 주님의 이름으로 교회가 세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가 고린도라고 하는 타락한 곳에 있다고 하는 사실 자체가 주님께서 당신의 권위로 나를 인쳐 주신 것이라고 표현한 것이죠.
(적용)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도 바울처럼 정말로 주님께서 인쳐 준 신앙인가,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사람들이 나를 보면 확실하게 그리스도인 같고, 또 내가 확실하게 복음을 뿌렸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주님의 인을 나는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요한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이 세상에 억만금을 가진 자기 아니라 주님께서 인을 쳐준 자죠.
왜냐하면 그런 자는 이 세상의 권위로 어쩔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 생명과 영혼을 보장해주시기 때문이죠.
(본문2)본문 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원해)여기에 ‘비판하다’는 헬라어 단어는 ‘아나크리노’(ἀνακρίνω)이고 ‘변명하다’는 헬라어는 ‘아폴로기아’(ἀπολογία)입니다.
둘 다 법정 용어인데 죄인을 날카롭게 심문하고 질문하는 것, 마치 검사가 죄인을 다루듯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이 ‘아나크리노’죠.
거기에 변호사가 피의자를 끝까지 변호하는 것이 ‘아폴로기아’입니다.
(깨달음)그렇다면 여기에서 질문을 하나 할 수 있지요.
평소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과 이 부분에서는 어긋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평소 사랑을 강조한 바울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부정하고 아무리 사도가 아니라고 비판한다 할지라도 바울은 그냥 흘러보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뭐라고 떠들고 비난하던 간에 그냐 품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바울은 사도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이렇게 자기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반론하고 있는 것일까요?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이 사도임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모함을 가만히 내 버려 둘 경우 사도로서 전한 복음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면 복음의 순수성과 완전성이 그들에 의해 훼손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또 다른 하나는 바울이 전한 복음이 훼손되면 복음 위에 세워진 교회가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만큼 바울의 사도성을 비난하는 이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변론하는 것은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복음을 위해 모든 걸 버릴 수 있지만 동시에 복음을 위해 싸울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나 개인의 문제일 때는 얼마든지 혼자 당하는 것으로 끝낼 수 있지만 나의 문제를 넘어 교회 공동체의 문제가 될 때 적극적으로 맞서서 지켜야 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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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께 인친 자의 은혜를 누리며 복음과 교회를 보호하도록 적극적인 행동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시는 바가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회사의 대표도 회사를 살릴 길과 직원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게 당연하듯 교회의 대표도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설립자와 같았는데 그를 향해 사도성을 공격할 때 왜 바울이 적극적으로 변론했는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났고 주님께로부터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주님의 부름받은 자였지 않더냐?”
“만약 바울의 사도성을 비난하고 험담하는 이들 앞에 사랑한다면서 가만히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바울의 사도성만 문제되는 게 아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도 그리고 바울이 세운 교회도 그 정통성이 훼손되는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우리 사회가 동성애로 흘러가는 것을 느낄 때 크리스천이 연대하여 함께 나설 때는 같이 행동해서 그 물결을 막아야 되지 않겠느냐?”
“그들도 사랑할 대상임은 맞지만 그 물결에 맞서지 않으면 성경의 가치관도 지킬 수 없고 우리의 후손들도 성정체성이 무너질테니 말이다.”
“이단 사이비들이 기존 목회자들을 삯꾼이라고 또 기존교회를 강도의 소굴이라고 비난할 때 그때도 함께 맞서야 하지 않겠느냐?”
“그때도 사랑한다면서 가만히 있으면 복음의 정통성이 훼손되고 교회의 근간도 훼손될 수 있으니 적극적으로 맞서 변론하고 행동할 때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겠느냐?”
“바울은 주님의 복음이 훼손당하지 않도록 자신이 세운 주님의 교회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지키고자 자신의 사도성을 적극적으로 변론했던 것 아니겠느냐?”
“오늘 주님께서 너에게도 그런 것을 원하실때가 있다면 기꺼이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걸 기뻐하지 않겠느냐?”
(찬양)주의 진리 위해 십자가 군기 하늘 높이 들고서 주의 군사 되어 용맹스럽게 찬송하며 나가세
나가세 나가세 주 예수만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치고 싸움터로 나가세
원수들이 비록 강할지라도 주의 군기 붙잡고 주의 진리 위해 용기 다하여 분발하여 싸우세
나가세 나가세 주 예수만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치고 싸움터로 나가세
산과 들과 바다 가는 곳마다 주의 군기 날리며 반갑고도 기쁜 승리의 소식 온 세상에 전하세
나가세 나가세 주 예수만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치고 싸움터로 나가세
원수들은 이미 예수의 손에 하나 없이 패하고 주의 군기만이 영광스럽게 온 누리에 날리네
나가세 나가세 주 예수만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치고 싸움터로 나가세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사의 대표는 회사를 집어삼키려는 세력으로부터 지키고 직원들의 생계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노심초사하죠.
바울도 그런 입장처럼 주님의 복음을 지키고 주님의 교회를 지키고자 자신의 사도성을 헐뜯는 이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변론한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지만 그런 험담하는 세력들 앞에 참고 온유하면 복음도 교회를 그 정통성이 훼손되고 마는 것이죠.
우리가 주님의 인친받은 자로 개인의 구원이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 사회적인 동성애나 혐오스런 일을 조장할 때 그리스도인으로 함께 맞서야 할 때는 기꺼이 맞서는 그리스도인을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경적인 가치관을 지킬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교회를 계속 세워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런 마음과 자세로 자신의 사도성을 변론하고 지켜나갔듯이 저와 여러분들도 그렇게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761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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