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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나예)어렸을 적 시골교회에 다닐 때 권사님 한 분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 분은 상여가 나갈 때 나눠주는 떡도 먹지 않았죠.
돼지고기는 구약의 율법으로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또 상여가 나갈 때 주는 떡은 우상 앞에 드린 제물이라 먹지 않았던 것입니다.
(깨달음)그래서 저도 어렸을 때는 돼지고기는 먹지 않는가 보다 생각했고 상여 음식은 절대 먹지 않아야 되는가보다 생각했죠.
하지만 성경을 읽고 신학을 공부하면서 정리한 게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은 당시에 이교도의 제물로 많이 바쳐진 게 돼지고기라 먹기 말하고 한 것이죠.
하지만 신약시대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대속을 이루실 때 구약의 음식법까지 모두 해소시켜주셔서 뭐든지 다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적용)상여가 나갈 때 나눠주는 음식은 또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우상의 제물이라고 생각하면 먹지 못하겠지만 그냥 음식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는 것이죠.
실은 우상도 본래부터 존재한 게 아니라 인간의 욕심과 탐욕이 형상으로 빚어낸 게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믿음이 연약한 자 앞에서는 성숙한 크리스천은 조심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인지 헤아리는 것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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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고린도전서 7장은 결혼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결혼하지 않는 총각이나 처녀가 결혼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또 상처한 남편이나 아내가 있을 때 재혼해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말이죠.
바울은 그 모두를 향해 임박한 종말론으로 인해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기에도 빠듯한데 어찌 결혼하여 그 마음을 빼앗길 수 있겠느냐, 하고 답변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답하거나 주님의 명령이라고 말하지 않고 자신의 개인적인 관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2천년 당시에 결혼관은 특별한 시기의 관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부터 살펴 볼 고린도전서 8장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와 관련한 고린도 교인들의 질문에 대한 바울의 답변입니다.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을 수 있는가 혹은 없는가 하는 문제를 전문적인 용어로 ‘아디아포라’라고 칭하죠.
‘아디아포라’라는 말은 대수롭지 않는 일을 뜻하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하지 말라고 금하거나 또 하라고 명령을 한 예가 없는 일들을 말하는 것이죠.
그럴 때는 사회적인 상황과 문화적인 상황과 개인적인 신앙 양심에 따라서 행동하면 되는 것이죠.
말하자면 그가 행하는 일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그것을 함에 따라서 결과적으로 긍정적으로 또 부정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 ‘아디아포라’입니다.
1492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남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서 담배를 처음 알게 되었죠.
그 담배가 대서양을 거쳐 유럽에까지 알려지게 됩니다.
그 전까지는 유럽 사람들은 담배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그리스도인들이 담배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죠.
쉽게 말해 2천 년 전 신약성경을 쓸 때는 담배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담배를 피워도 된다 혹은 피지 말라 하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믿음의 사람이 담배를 피워도 됩니까? 아니면 안되는 것입니까?
우리나라는 어떨지 모르지만 유럽 사람들은 담배 피는 것을 문제 삼지는 않습니다.
가톨릭 신부들뿐만 아니라 유럽에 있는 개신교 목사들도 그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국교회에는 담배를 안 피우는 것이 신앙 전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담배를 피우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아니면 그른 것입니까?
담배 피우는 크리스천을 향해 죄를 범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어려운 문제인데 그것을 ‘아디아포라’라고 말하는 것이죠.
(깨달음)2천년 전 고린도 교회에서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심각하고도 미묘한 ‘아디아포라’였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우상의 음식을 먹고 안 먹고를 대단하게 생각지 않지만 2천년 전 고린도에서는 8-11장까지 그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2천년 전 시대에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했는지 알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2천년 전 고린도에는 고린도 내에 수많은 신전이 있었습니다.
아폴로, 헤라클레, 아프로디테 신전 등 12개의 신전이 있었죠.
그 신전에 사제들이 있는데 그들은 제사만 드린 게 아니라 관혼상제도 치뤘습니다.
당시 신전에서 결혼식도 하고 폐백도 하고 피로연도 치렀습니다.
당연히 신전의 음식이 나오는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걸 먹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갈등한 것이죠.
그만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우상의 제물에 갇힐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걸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부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우상의 제물도 먹어도 죄될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 가운데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주님의 은혜로 구원은 받았지만 여전히 유대인의 사고 곧 율법주의에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죠.
그래서 우상에게 받친 제물을 먹는 것 자체를 죄악시한 그들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양 진영에서 논쟁이 붙을 수밖에 없었겠죠.
당시에 고린도 교인들은 지식이 강했으니까 자기 지식을 동원해 이성적으로 지성적으로 주장하는 것이죠.
그래서 쉽게 결론이 나지 않자 에베소의 바울에게까지 편지를 써서 해결책을 제시한 것입니다.
(적용)그런데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는 단순히 고린도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모두가 헬라문명에 속하기 때문에 교회가 있는 곳은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걸로 서로 갈등과 고민이 많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도 그것은 마찬가지였죠.
유대인 율법교사가 와서 그리스도인이라도 할례를 행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들에게 할례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절대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일로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그리스도인 간에 마찰이 생겼고 옥신각신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에 가서 문제를 제기했는데 첫 번째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린 배경이었죠.
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이 모여서 할례가 구원의 조건인가 아닌가 논쟁했는데 A.D.45년 경이었죠.
그때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의장이었는데 그는 사도행전 15장 19-20절을 통해 판결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방인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걸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게 첫 번째 판결입니다.
이방인이 주님께 돌아오는 것을 괴롭게 한다는 것이 실은 할례의 문제였죠.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받는 것을 더 이상 문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주문합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과 음행과 죽은 것과 피는 유대인들의 율법적인 전통이기 때문에 그것도 존중하라 하는 뜻입니다.
그만큼 야고보는 유대인과 헬라파 모두를 품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것을 첫 번째 공의회에서 다룬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요구하는 바를 방식으로 풀어나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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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과연 어떻게 그것을 다루고 있는지 본문 1-2절 말씀을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깨달음)바울은 우상의 제물에 대해 모두가 지식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고린도교회 내부에서 그 문제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어느 쪽이 옳다거나 다른 쪽이 옳다고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든지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면 교만을 불러오고 다툼만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은 1차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보여준 지식의 관점을 내세운 게 아니라 상대방을 수용하는 사랑의 관점을 지니도록 주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과학기술로 달에 우주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엊그제 뉴스에서는 중국이 우주선을 달에 보내 달의 표면 흙을 채취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실 달에는 희귀 금속들이 많아서 그것만 개발해도 인류는 수많은 먹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죠.
그런데 인간이 달에 착륙하고 표면을 채취했다면 자랑하지만 끝도 없는 우주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겠습니까?
우주의 관점에서 달에 착륙하고 표면을 채취하는 것이 실은 먼지 하나를 걷어낸 것처럼 보이겠죠.
의학기술로 인간의 질병을 많이 고치고 수명도 늘어났는데 그것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의학기술로 인간의 자부심이 강하겠지만 인간의 무지와 무력감도 더 많이 깨닫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뉴튼은 “참된 학자, 참된 과학자는 자기가 서 있는 저편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자다”하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자기 분야도 그렇지만 그 분야 밖의 것에 대해서는 겸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바울이 우상의 제물에 대해 논리나 지식으로 다투기보다 겸손하게 사랑의 관점으로 다가서면 풀 수 있다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본문2)본문 3-4절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깨달음)바울은 지금 우상의 제물을 말하면서 그 출발점을 지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놓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뜬금없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사람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그 사랑의 원천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원천으로 삼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나의 이기심으로 그치기 때문이죠.
그 이기심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인간을 사랑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그때의 사랑이란 실은 자기식의 사랑이기 때문이죠.
그런 상황에서 인간을 사랑하면 오히려 상처를 주고 엉뚱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인간을 사랑하면 그 인생을 바로 세워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하나님의 마음과 자세로 사람을 사랑할 때 “하나님도 아신다”하고 말하는 것이죠.
(원성)더욱이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느냐 못 먹느냐 하고 따지기 전에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상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우상의 실체에 대해 시편 115편 4-8절에 아주 명쾌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깨달음)아무리 우상이 멋져도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원하고 욕망하는 것을 형상으로 만들어낸 것 말이죠.
그러니 실은 우상의 형상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욕심과 탐욕이 우상을 만든 것 뿐입니다.
내가 이런 것을 만들면 나한테 이런 복을 주리라는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 낸 것 말입니다.
그런 우상을 믿는다는 것은 실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과 똑같은 것이죠.
그래서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테에 전도하러 갔을 때도 그곳에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행17:23)라는 제단도 있을 정도였죠.
다른 신전은 이름이 새겨 있었지만 그곳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드린 제단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인간의 욕망이 수많은 신전을 만들어낸 것이고 심지어 이름조차 없는 신전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적용)그래서 바울은 4절 후반부에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하고 말하는데 무슨 뜻입니까?
이 세상에서 신이라고 경배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내가 땅 위에 있든지 하늘에 있든지 땅 속 지하에 있든지 나와 동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성령으로서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고 보혜사 성령으로서 내가 가야할 길을 바르게 인도하시는 분이시죠.
그 분은 내가 욕망하는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시기 때문에 내 마음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길도 성령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아디아포라 앞에서 내가 모든 걸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다른 사람의 덕을 위해 절제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님의 뜻을 좇아 우상의 제물 앞에 서로가 옳다고 따지기보다 사랑으로 덕을 세우며 서로를 세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 문제가 해결되고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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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술과 담배와 우상의 제물에 대해 자기 지식의 관점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사랑의 관점으로 다가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뭐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어렸을 적 돼지고기나 상여나갈 때 나눠주는 떡이나 음식에 대해 거부했지만 지금은 주님의 은헤로 다 먹고 마시지 않느냐?”
“바울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우상 앞에서 나온 신전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갈등하는 성도들에게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 아니냐?”
“1차 예루살렘 공의회에서는 지식의 관점으로 판결했다면 바울은 지금 사랑의 관점으로 상대방을 수용하도록 권면하고 있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누군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본다면 네가 어떻게 대해야 할지 이제는 알 수 있지 않느냐?”
“그 사람이 믿음의 공동체에 덕을 세우기 위해, 그보다 믿음이 연약한 자가 보는 앞에서는 술과 담배와 우상의 음식조차 먹지 않는 것이 덕을 세우는 일이지 않겠느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그리스도인에게 있지만 주님께서는 믿음의 공동체가 실족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을 기뻐하시니 말이다.”
“누군가 술과 담배를 먹고 피울 때 함부로 정죄하지 말고, 또 너도 그렇게 할 자유가 있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가 실족하지 않도록 주변 사람을 살피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로 인해 99마리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주님께서 돌아오고 믿음이 깊어진다면 주님은 더욱 기뻐하시지 않겠느냐?”
(찬양)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와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자매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와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우리의 모임 중에 임하신 하나님 영광 아름다와라
존귀한 왕이 여기 계시니 사랑하며 섬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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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술과 담배의 문제 심지어 우상 앞에 드린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아디아포라의 문제입니다.
그것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지만 그걸 먹는 걸 보면 누군가는 믿음이 실족할 수도 있는 것이죠.
그렇기에 돼지고기도 상여음식도, 술과 담배도 그 모든 것을 먹고 마실 자유가 그리스도인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누군가 믿음이 실족하고 넘어질 수 있다면 될 수 있는한 절제하며 사는 것을 주님께서 더욱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 사이에 그 문제로 갈등하며 해결책을 원할 때 사랑의 관점으로 상대방을 수용하고 세워주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내 믿음이 작든 크든 내 방식을 고집하기보다 상대방을 수용하여 품는 주님의 관점으로 대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런 사랑 속에서 서로를 더 이해하고 품을 수 있고 교회는 주님의 몸된 교회로 세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런 은총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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