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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4장 26절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죠.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깨달음)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면 부모와 남편과 자녀들을 미워하며 살라는 뜻입니까?
그래야 주님의 제자로 받아주겠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죠.
이 말씀의 뜻은 너의 배우자와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라는 뜻이죠.
내가 내 배우자와 내 자식들을 사랑하는 게 나 자신의 의에 나서 나온 것이라면 그 사랑은 온전할 수가 없죠.
나의 이기적인 사랑일 뿐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사랑의 출처가 우리 주님이라면 내가 부족해도 주님께서 그 사랑으로 감싸고 세워주실 수 있는 것이죠.
(적용)그만큼 배우자에 대한 부분이나 자식에 대한 부분보다도 그 우선순위를 주님께 두며 살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그 사랑과 섬김이 주님 안에서 영원한 사랑과 섬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고린도전서 7장부터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질문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변이 기록돼 있습니다.
1-16절까지는 결혼여부의 원칙 곧 사별한 독신자의 재혼문제나 기혼자의 이혼문제에 관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질문에 바울이 답변했죠.
177-24절까지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인 신분에 관한 사도 바울의 답변이었습니다.
결혼 문제나 이혼문제에 대해서는 바울이 2천년전 고린도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답변을 해 줬습니다.
그래서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하고 답을 하지만 또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견해라고 이야기를 했죠.
지난 주에 살펴 본 사회저인 신분에 관한 답변은 시대가 변해도 누구에게나 적용(17절)될 수 있는 삶의 전반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살라고 답변한 게 하나가 있었는데 바로 할례와 무할례에 관한 답변이었습니다.
할례를 받았는데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면 굳이 무할례가 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었죠.
또 무할례로 주님의 구원을 받았다면 굳이 할례를 받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었죠.
왜죠?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할례를 받기 이전에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해 준 것이고, 할례는 그 증표 차원에 받도록 한 것이었죠.
바울은 할례를 받고 안받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명 곧 말씀을 좇아 사는 삶으로 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부르심 그대로 좇아 살라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종으로 부름받은 것과 자유인으로 부름받은 것이었죠.
종 곧 노예로 구원받은 자라면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좇아 자유인이 되려고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영적인 자유인이 된 것을 기뻐하며 살라는 것이었죠.
반면에 자유인으로 더욱이 신분이 높고 가진 게 많은 자로 너를 부르셨다면 그 은혜에 빚진 자답게 종과 노예와 연약한 자를 섬기는 주님의 종으로 살라고 답변해줬죠.
내가 사람의 종으로 그 사람을 모시는 것과 그리스도인의 소명으로 사람을 모시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사람을 섬기면 자존심에 상처받을 일도 없고 열등감이 생길 일도 없죠.
(적용)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때로는 경제적인 빈곤으로, 때로는 신체적인 연약함 속에 집어넣으실 때가 있죠.
이유는 우리 삶의 거품을 빼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상황에서만 우리가 중심으로 주님을 향할 수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빚어내실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을 주셨든지 우리는 위장하지 말고, 척하지 말고, 부르신 그래도 그리스도인으로 걸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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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오늘 읽은 본문 역시 결혼에 대한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질문과 사도 바울의 답변이 기록된 내용입니다.
이 결혼에 관한 내용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두 가지의 사전 이해가 필수적이죠.
1-16절을 읽으면서 살펴본 그 시대의 특징이었죠.
첫째는 고린도에 만연한 쾌락주의와 영지주의 영향으로 쾌락에 대해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은 것이었죠.
에피쿠로스 철학은 인간을 단순한 원자의 결합으로 보기 때문에 죽음은 물질이 해체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존재적인 불안 곧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인간의 본능인 쾌락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고 본 것이죠.
더욱이 극단적인 영지주의자들은 영혼과 육을 철저히 분리해서 육체를 아무렇게 살아도 고귀한 영혼에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온갖 쾌락의 노예로 살았던 것이죠.
둘째는 극단적인 금욕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결혼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결혼한 사람의 경우 방을 따로 쓴다든가 별거한다든가 이혼한다든가 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자들이었죠.
셋째는 철저한 남성중심의 가부장제로서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로 여기던 사회였죠.
넷째는 팽배한 종말 사상으로서 그들의 시대에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것을 믿고 살았죠.
그러니 결혼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고 바울에게 물어볼 때 바울은 그냥 지내는 게 낫다고 답변한 것이었죠.
물론 바울은 그 모든 답변을 그 시대의 특수한 상황속에서 한 답변이었고 그래서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밝혔죠.
본문 25-40절까지도 그 시대적인 특별한 상황 속에서도 팽배한 종말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제기한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이 담겨 있습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종말 사상에 깊이 젖어 있었는지를 알지 않으면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본문을 통해 답변하는 바울이 25절에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하고 말이죠.
여기에서도 절대적인 주님의 명령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17-24절까지는 확정적으로 주님의 명령으로 말했지만 여기서는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으로 말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당시 사람들은 당대에 종말이 오리라 생각했는데 종말이 오지 않았다면 바울이 답변한 내용이 무의미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답변은 성경에서 빼어버려도 상관없지 않은가 하는 점 말입니다.
하지만 종말에는 우주적인 종말과 개인적인 종말이 있죠.
우주적인 종말은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역사가 끝나는 종말이고 개인적인 종말은 우리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죠.
오늘 본문이 담고 있는 정신은 개인적인 종말을 맞이해야 할 우리 자신에게는 언제나 유효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두 번째 사전 이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결혼의 큰 뜻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죠.
결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인간이 원해서 한 게 아니라 인간이 독처하는 게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기에 하나님께서 결혼을 허락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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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그런 차원을 생각하면서 본문 25-28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깨달음)7장 1절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함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결혼하지 않는 남자의 경우를 두고 말한 것이고 오늘 읽은 25절은 결혼하지 않은 처녀에 관한 권면입니다.
바울은 처녀가 결혼하는 것이 좋은지 좋지 않는지, 주님께 들은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주님의 종으로서 내 의견을 말하는데 임박한 환난을 생각한담녀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 하고 답한 것입니다.
주님의 종말을 대비해야 할 때인데 구태여 결혼해야 되겠느냐, 그러니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내 생각에는 좋다고 한 거죠.
물론 종말을 대비하기 위해 결혼하지 않는 게 좋겠다, 하면 오해할 사람들이 있을까 봐 27절에서 그렇게 말하죠.
네가 아내에게 매였다면 놓이기를 구하지 말고 또 아내에게서 놓였다면 아내를 구하지 말라, 하는 것이죠.
네가 기혼자라면 기혼자로서 종말을 대비하는 게 좋겠고, 미혼자면 미혼의 상태에서 종말을 대비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8절에서는 뭐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장가가는 것도 죄짓는 게 아니고 처녀가 시집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다만 결혼하게 되면 주님의 재림 앞에 육신적인 고난이 있을 것이니 그걸 아끼는 차원에서 너희가 결혼하면 고난이 커진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2)이것은 29절도 마찬가지인데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원해)여기에 ‘때’라는 것은 헬라어로 ‘카이로스’(καιρός)입니다.
시간이 연대기적으로 흘러가지 않고 위에서부터 임하는 결정적인 시간 곧 종말의 때를 말하는 것이죠.
그 종말의 때가 단축하여 졌다는 뜻은 헬라어로 ‘쉬스텔로’(συστέλλω)인데 ‘끌어 당기다’는 의미입니다.
그 종말이 지금 코끝에 다가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다 죄가 아니지만 내일이라도 종말이 왔을 때 그 환란 앞에 사람들이 더 고난을 당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특수한 상황 속에서 바울이 답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깨달음)그래서 29절 하반절에 뭐라고 말합니까?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라고 말하죠.
결혼한 사람은 마치 결혼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라 하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종말이 임박했으니 우선순위를 종말에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결혼보다도 남편과 아내에게 얽매여 사는 것보다도 지금은 주님의 재림 앞에 더 깨어 있어서 주님의 종말을 맞이하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게 더 시급한 문제 아니냐 하는 뜻이죠.
(적용)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어떤 적용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바울이 결혼하지 않는 자처럼 살라고 말한 것은 우선순위를 일컫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장 26절을 통해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죠.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너희들이 내 제자가 되고 싶다면 너희들의 부모와 너희 남편 너희 아내 너의 자식을 미워해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면 절대로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역설법이죠.
네 아내를 미워하고, 네 부모를 미워하라는 게 아니라, 네 남편과 아내를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장 37절에서도 말씀하셨죠,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예수님과 내 배우자가 있는데 우선순위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보다 내 아내와 내 남편과 내 자식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좋은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원천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나에게 있는 것이죠.
내가 사랑의 원천일 때 그 사랑은 결국은 허망하게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공동묘지에서 끝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주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 아내와 남편과 자식들을 사랑하면 주님의 생명 속에서 영원한 가치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죠.
내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주님의 방법으로 배우자를 사랑할 때 그 사랑이 영원으로 연속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은 지금 우선 순위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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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주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믿음의 수선순위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 배우자와 자녀들을 사랑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러헥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결혼은 부모를 떠나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요 서로 돕는 배필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그런데 결혼을 통해 서로 얽애며 주님의 사랑을 등한시한다면 그 사랑의 주체는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 아니겠느냐?”
“주님께서 배우자보다 자식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라는 것은 주님의 그 사랑으로 배우자와 자식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이 영원하다고 말한 것 아니겠느냐?”
“지금 바울도 결혼하지 않은 처녀라면 임박한 종말론 앞에서 그냥 지내는 게 좋겠다고 말한 것도 그런 연유때문이지 않더냐”
“결혼해서 배우자에게 얽매이는 것보다 주님의 재림을 믿음으로 더 깨어 준비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만큼 믿음은 결혼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선순위의 문제임을 주님께서 바울의 답변을 통해 일깨워주는 것 아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믿음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지 지금도 점검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배우자에 대한 사랑이 강하다면 너에게 그 원천이 있는 것이지만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배우자와 자식을 사랑한다면 그 원천은 주님께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 주님을 우선순위로 사랑하고 그 사랑에 힘입어 배우자와 자식들을 사랑하는 걸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겠느냐?”
“우주적인 종말을 언제 맞이할지 아무도 모르지만 너의 개인적인 종말 앞에 주님의 그 사랑을 새기며 사는 자로 가족을 사랑하는 걸 주님께서 기뻐하실 테니 말이다.”
(찬양)너 어디 가든지 순종하라 너 어디 있든지 충성하라
주 너의 하나님 왕 되신 주 영원히 주님만 찬양하라
너 무엇하든지 진실하라 너 무엇하든지 성실하라
주 너의 하나님 도우시리 어디를 가든지 정직하라
너 어느 때든지 기도하라 너 어느 때든지 감사하라
주 너의 하나님 돌보시리 너 어느 때든지 기뻐하라
너 고난 속에서 평화하라 너 핍박 속에서 감사하라
주 너의 하나님 함께하리 승리의 주님을 찬양하라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천년 전 특수한 상황에서 바울은 결혼하지 않고 사는 것이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데 깨어 있을 수 있지 않겠냐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결혼의 대원칙을 제정하신 하나님께서는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해 돕는 배필로 결혼케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가정과 자녀들이 일굴 가정의 원칙은 오직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 힘입어 배우자와 자녀들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이 영원으로 승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그 사랑에 힘입어 결혼생활을 할 때 주님의 기쁨이 되는 가정을 섬기는 저와 여러분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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