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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아주 오래전에 매우 절친하게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분이 신학공부를 하고 10년만에 어렵게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중국집 2층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사역을 하다가 갑자기 그 지역이 재개발되면서 보상을 받게 된 것이었죠.
그렇게 보상받은 돈으로 신도시 지역에 조립식이지만 교회당을 지어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서로가 잊고 있다가 한 5년만에 이전에 ‘형’이라고 불렀던 그 목사님에게 안부 전화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변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신도시 입주가 시작되면서 성도들이 많이 늘어났고 교회가 커지면서 그 목사님이 영적인 우월감에 도취돼 있었단느 것입니다.
이전에 중국집 2층에서 목회할때 보여줬던 그 겸손은 오간데 없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중요한 것은 그런 영적인 우월감은 부부사이에도 나타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남편이든 아내든 기도를 많이 하고 때로는 금식을 하면서 주님과 가까이 할대 영적우월감에 도취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나 기도하고 금식하는데 당신은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느냐 하면서 말이죠.
그로 인해 부부관계마저도 죄악시 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에 빠지는 부부도 있습니다.
(적용)극단적인 금욕주의란 영지주의의 한 형태로서 영은 거룩하고 육은 무익하기 때문에 영적인 것만을 최고로 여기는 걸 말하죠.
자신처럼 그렇게 금욕을 하지 못하는 남편과 아내를 향해 죄악시하는 영적 우월주의에 빠진 이들이죠.
주님은 부부지간에도 일시적으로 금욕하고 기도할 수 있지만 늘 그렇게 지내길 원하는 분이 아닙니다.
부부는 한 몸을 이루며 부부관계를 통해 늘 아름다운 관계로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이요 그래야 사탄이 틈타지 못하는 법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레루야. 축복합니다.
(역배)고린도전서 6장은 고린도교회의 분열과 대립, 그리고 도덕적 무질서에 대한 바울의 책망과 당부와 권면이 들어 있었죠.
고린도전서 7장부터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사도바울에게 서신으로 질문했던 내용에 대한 답변이 나옵니다.
7장 1-8절까지는 그리스도인의 결혼여부와 부부생활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8-16절까지는 재혼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답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답변서를 써 보낸 2천년 전의 고린도의 시대적 배경을 아는 게 중요하다고 했죠.
2천년 전 고린도는 성도덕이 문란한 사회였죠.
그곳의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섬기던 1천명의 여사제들도 밤에는 고린도에 내려와 매음을 하던 창녀였다고 했죠.
그런 괘락주의가 만연케 된 이유가 있었죠.
인간은 단순한 원자의 결합체요 죽음은 물질의 해체이기 때문에 공포나 죽음을 극복할 길은 쾌락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 쾌락주의는 영과 육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는 이원론 사상의 영지주의도 한 몫 했죠.
물론 그런 쾌락주의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극단적인 금욕주의도 있었습니다.
그들도 영지주의자들처럼 주님께 더욱 가까이 하기 위해 금욕을 하는데 문제는 다른 육체의 삶을 죄악시하는 것이고 부부관계도 그렇게 여긴 것이었죠.
또하나가 있다면 고린도는 남성 위주의 사회로서 남녀관계가 평등관계가 아니라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에 불과한 사회였죠.
마지막 하나는 임박한 종말론 사상이었는데 그러니 결혼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었죠.
바로 그와 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결혼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결혼하면 부부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한 것이었죠.
나는 홀아비이고 과부인데 재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고 질문한 것이었죠.
그에 대해 바울이 답변을 하는데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지 명령은 아니다’(고전7:6)하고 개인적인 의견을 제시한 부분도 있습니다.
물론 다른 부분에서는 ‘내가 명하노니(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고전7:10)하면서 주님의 명령임을 밝히죠.
그렇기에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질문한 것에 대해 답변을 써 주는 내용을 통해 우리는 분간할 수 있는 것이죠.
그 답변 중에는 절대불변의 주님의 명령이 있고 다른 부분에서는 2천년전 특수한 고린도의 상황에 대한 바울이 개인적인 답변도 있다는 걸 말입니다.
그만큼 우리 시대에는 그 내용 그대로 적용하기보다 절대불변의 주님의 명령과 우리 시대의 상황을 고려해서 잘 참조하면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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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그래서 지난 시간에 나눈 7장 1-2절 말씀을 통해 깨달은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것은 임박한 종말론이 대두되고 있으니 결혼하지 않는 게 좋다는 뜻이었죠.
또 음행을 피하기 위해 남자나 여자나 아내와 남편을 두고 사는게 좋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 시대의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결혼제도는 부부가 한 몸을 이뤄 거룩한 관계로 엮어나가는 것인데 그저 음행을 피하기 위한 결혼생활이라면 다분히 동물적인 관점이기 때문이죠.
바울이 답변한 그것은 2천년 전 고린도의 특수한 상황을 감한한 답변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1)오늘 본문 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원해)여기에 ‘의무’란 헬라어로 ‘아포디도미’(ἀποδίδωμι)인데 ‘채무’ ‘빚’(a debt)을 뜻하는 말입니다.
물론 의무를 다하라는 게 열심히 봉급받아 부양하라는 차원이 아니라 육체의 관계에서 남편으로서 의무를 다하라는 거죠.
이 권면은 2천년 전 시대 상황에서 볼 때 혁명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여자는 철저히 성적 노리개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남자들을 향해 그 의무를 다하라고 하는 것은 성적인 노리개로 취하지 말고 온전한 아내의 몸으로 여기라 하는 거죠.
(깨달음)그런데 아내도 남편에게 그렇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 당시 여자는 성적 노리개처럼 항상 의무를 다하고 있었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극단적 금욕주의에 빠져 있는 아내들을 향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여성들은 마치 남편과 관계 맺는 것 자체를 불결하게 여기고 죄악시 했기 때문입니다.
(본문2)본문 4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깨달음)극단적 금욕주의에 빠져 남자와 잠을 자는 것 자체를 금기하는 여자를 향해 ‘네 몸은 네 몸이 아니다.’하는 것입니다.
또 남편이 아내 몸을 자기 몸처럼 하려는 남자에게도 ‘네 몸은 네 몸이 아니다’하고 말하는 것이죠.
부부관계에 있어서 일방적인 만족감을 취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상대에게 헌신하듯 한 몸을 이루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적용)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나게 하시고 서로 부부가 되게 하셨고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상대를 도구로 여기면 불행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상대를 도구로 여기지 않고 제 몸처럼 존중할 때 두 사람의 부부관계는 아름다워지는 법이죠.
만약 상대의 몸을 도구로 전락시키면 가장 추악하게 됩니다.
변태란 말도 실은 자기만족에서 나온 말입니다.
얼마나 자기만족이 극단화되면 오늘날 부부스와핑이란 말까지 나왔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부부가 한 몸이 되어 상대방을 위한 헌신의 도구가 되어야 진정으로 행복한 부부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권면한 것이죠.
(본문3) 본문 5-6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원해)‘서로 분방하지 말라’는 헬라어로 ‘μὴ ἀποστερεῖτε ἀλλήλους’(메 아포스테레이테 알레로우스)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상대의 권리를 강탈해서 물리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너의 권리만을 위해서 상대를 짓밟지 말라’는 의미죠.
우리 개역개정에서 ‘분방하지 말라’고 번역했는데 잘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면 부부가 어쩔 수 없이 분방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체질상 남자는 여름에 에어컨을 틀고 자야 하고 아내는 여름에도 이불을 덥고 자야 하는 경우가 그렇죠.
또 남편이 출근하면 부인이 퇴근하고 부인이 출근하면 남편이 퇴근하는 경우도 있죠.
그런 경우는 분방하며 잠을 잘 수밖에 없습니다.
(깨달음)그러나 그렇게 잠을 따로 자는 것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관계를 완전히 차단한 채 홀로 거룩하다고 여기는 영적우월감에 빠져 있는 남편이나 아내를 말하는 것이죠.
여기도 극단적인 금욕주의자들을 향해 던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극단적인 금욕주의자들이 남편과 아내가 부부관계를 갖는 것 자체를 죄악시했는데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목적이라면 분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 그렇다고 말한 것은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식음을 전폐하고 하는 기도죠.
그때는 얼마 동안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그 시간이 끝나면 반드시 합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금욕주의를 실시하는 것이 더 좋은 신앙인이 되는 거야, 하고 혼자 생각하고 실시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내 남편이 어디 나가 외도를 하게 된다면 결국은 내가 죄를 짓게 하는 꼴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금욕주의가 틈타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적용)그런데 그것 권면조차도 6절에서는 권도요 명령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절대 규범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허락해서 수용하고 지킨다면 더 좋은 것이다, 하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의 개인적인 견해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위대한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확실하게 이야기하지만 나머지 것은 개인적인 사견이라고 밝힌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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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극단적인 금욕주의에 빠져 부부관계 자체를 죄악시하는 영적우월감에 빠지기보다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 한 몸을 이루는 부부가 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렇기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중국집 2층에 개척한 목사가 재개발이 돼 신도시에 성도가 몰려오고 부흥할 때 영적인 우월감에 빠질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부부관계에도 극단적인 금욕주의에 빠진 남편이나 아내가 그런 영적 우월감에 빠질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로 인해 그 목사의 목에 힘이들어가듯 영적우월감에 빠진 남편이나 아내도 금욕을 행하지 않는 상대방을 무시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부부가 한 몸이 되어 부부관계를 엮어나가길 원하시는 주님 아니시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극단적인 금욕주의에 빠져 부부관계를 소홀해하고 그걸 죄악시하여 영적우월감에 도취되는 것은 사탄이 부부사이를 갈라놓는 길임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서로가 서로의 몸을 존중하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 헌신하는 자세로 부부관계를 엮어나가는 것이 가장 영적인 일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2천년전 그런 특수한 상황속에서 성령님께서 바울의 음성을 통해 오늘 너에게 권면하는 것 중에 깊이 깨닫고 실천해야 할 것이 있지 않겠느냐?”
(찬양)당신은 소중한 사람 당신은 존귀한 사람
이 세상에 하나뿐인 당신은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
그런 당신을 사랑해요 그런 당신을 축복해요
사랑 받기에 합당한 당신을 주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서로 다른 남녀가 부부로 만나 한 몸을 이루며 자식을 낳고 번성케 되는 걸 기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것이 가장 거룩하고 그것이 가장 고상한 일이요 그것이 실은 영적인 주님의 뜻을 받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2천년 전 영지주의의 아류인 극단적인 금욕주의자들이 영적우월감에 빠져 부부관계마저 저급하고 죄악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이단사상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들은 한 몸을 이루며 서로가 서로의 몸을 존중하여 온전한 부부관계를 이루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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