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설교열기)(성화)요한복음 11장을 보면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남매 이야기가 등자합니다.
어느 날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립니다.
나사로의 누이들이 멀리 있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죠.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요한복음 11장 4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지금 사람이 죽어 가는데 주님께서는 그의 병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 아들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째 된 날이었죠.
그때 예수님께서는 무덤의 문을 열고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살리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깨달음)그렇다면 언뜻 보면 과연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인가, 하고 오해할 수 있죠.
왜냐하면 그냥 그 즉시 와서 낫게 하고 죽었다면 당장 와서 살려주시면 될텐데 굳이 나흘을 기다리게 한 이유가 뭔가 하는 거죠.
우리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중병을 주시고, 사람을 죽여 놓고, 나흘째 되는 날, 떡 하니 살려 놓는 것과 같죠.
그러면서 너희들 봤지, 나는 이런 사람이야, 하고 영광을 받으시는 모습 말입니다.
만약 그런 예수님이라면 우리 인간과 주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인간 세상에서는 남이 불행해야 내가 출세하게 됩니다.
송흥민 이강인 김진수 같은 선수는 같은 동료 중에 누군가 다치거나 중병에 걸려야 무대를 계속 뛸수 있는 것이죠.
인간 세상의 영광이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로를 불행하게 만들고 또 죽여 놓고 당신의 위대함을 보여줬다면 그런 선수들의 불행을 통해 영광을 취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적용)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는 그 영광이란 세상의 영광과는 다른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관련하여 영광을 말할 때 헬라어로 ‘독사’(δόξα)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독사죠’(δοξάζω)입니다.
거기에는 세 가지 깊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생각한다’(to think)는 것입니다.
짐승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생각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이성적인 인간은 생각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 삶이 하나님을 ‘찬양한다’(to praise)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그 삶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돼야 한다는 것이죠.
그 손과 발이 주님을 드러내는 손과 발이 되는 게 그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to honour)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만 예배당 밖에서 내 삶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낼대 영화롭게 하는 삶이 된다는 것이죠.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중병에 걸려 죽어 가는 나사로를 보고 하나님과 아들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말씀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인간의 상대적인 영광을 좇은 게 아니죠.
그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영원토록 세워주시고 영원토록 행복한 인간으로 세워주신 것이었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내가 계획한 것이 무산되고 내가 생각한 것들이 뒤틀릴 때도 성령님의 뜻을 좇아 잠잠히 기다리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사지백체로 내 영광을 위해 몸부림치면 단순한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지만 성령의 뜻을 좇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이죠.
그것이 성령의 전답게 살아가는 삶이요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삶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60620580
(역배)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초반부에서 성도 간의 개인적인 대립문제를 세상 법정에까지 가지고 가는 것을 질타했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승리자인데 성도가 그렇게 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이미 영적으로 패배한 자이기 때문이죠.
그로 인해 복음의 문이 막히고 세상의 비웃음과 조롱거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죠.
중요한 것은 그 당사자와 당사자가 그런 일을 벌일 때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왜 잠잠했냐 하는 것입니다.
이미 고린도교회 성도들 대부분이 불의 속에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그렇게 타락하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주님을 만나 구원은 얻었지만 육신의 소욕을 쫓아 사는 영적인 미숙아였기 때문이죠.
그러다 보니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세상 것으로 왕 노릇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 기준이 없고 자기 본능을 좇다보니까 그렇게 타락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죠.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6장 후반부인 12-17절까지 살펴본 말씀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성도의 자유에 대한 부분을 짚어줬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을 통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죠.
그 자유가 있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면 그 자유를 절제하며 사는 것도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지난 시간에 살펴본 15-17절 말씀을 통해 바울이 주님의 뜻을 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리스도의 지체로 어찌 창녀의 지체를 만들 수 있겠냐는 것이었죠.
창기와 합한 자는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고 주님과 합하는 자는 주님과 한 영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몸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도 우리의 몸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창기와 합한 육체는 헬라어로 ‘소마’(σῶμα)가 아니라 ‘사르크’(σάρξ, flesh) 곧 고깃점과 같다고 했죠.
그렇기에 주님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구원받은 자녀라면 주님과 한 몸 주님과 한 영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거울과 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죠.
그것이 성도의 자유지만 그 자유로운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본문 18절 말씀을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원해)여기에 ‘피하라’는 헬라어 ‘쉬고’(φεύγω)는 ‘도망가라’(to flee away)는 말입니다.
내가 죄를 이길 수가 없을 때는 ‘도망가라’는 것이죠.
그런데 내가 이길 힘도 없는데 도망가지 않고서 버틴다면, 그래서 세상이 악해서 어쩔 수 없이 그랬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처럼 미련스러운 것도 없는 모습이겠죠.
(깨달음)성경에 음행의 죄악을 범하려는 그 순간에 그 현장을 도망간 사람이 있습니다.
누굽니까?
요셉이 그 주인공이죠.
보디발의 아내가 잘 생긴 훈남 요셉을 유혹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요셉이 어떻게 했습니까?
단호하게 거절했죠.
주인이 맡긴 것은 재산과 소유물 전부지만 딱 하나 주인의 아내만큼은 맡기지 않았다면서 말이죠.
그래도 아무도 없는 장소에서 또다시 요셉을 유혹하면서 옷을 잡으려고 하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요셉은 옷을 벗어두고 ‘쉬고’ 도망쳐버렸죠.
왜 요셉이 도망갔겠습니까?
자신의 절제력으로는 여인의 유혹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 현장을 도망친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 일로 인해 요셉은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죠.
하지만 그 일이 힘들고 고달픈 것이지만 그 과정을 통해 생명을 얻고 국무총리라는 새로운 지위를 얻는 계기가 된 것이죠.
(원해2)그런데 사람이 죄를 범할 때 몸 밖에 범하는 것이고 음행은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몸 ‘밖’이란 헬라어로 ‘엑토스’(ἐκτός)로 ‘아웃사이드’(outside)로 바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몸에’ 할 때 ‘에’는 헬라어로 ‘에이스’(εἰς)로 ‘안에’(in to)를 뜻하는 말입니다.
돈을 훔치거나 욕을 하거나 사람에게 상처를 준 일들은 모두 자기 몸 밖에 짓게 되는 죄악입니다.
하지만 음행은 그 몸을 통해서 몸 안에 짓는 죄악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음행은 자기 몸 안에만 짓는 죄악입니까?
성적인 관계를 맺는 타인의 몸 안에도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고, 자기 가족과 타인의 가족에게도 상처를 주는 일이죠.
다윗이 음행을 저질렀을 때 자기 몸은 물론이고 밧세바의 몸 안에도 죄를 짓게 만든 것이고 그 남편 우리아에게도 상처를 주는 일이 된 것이죠.
그 일로 다윗은 침상을 적시는 눈물로 회개했고 용서를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죄의 후유증을 10년 가까이 겪게 하셨죠.
그만큼 몸 밖에 짓는 죄악은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질 수 있지만 몸 안에 짓는 음행의 죄악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음행이라는 죄의 유혹이 밀려드는 현장을 만들지 않는 게 중요하죠.
남녀가 함께 밀폐된 공간에 있게 될 때는 반드시 문을 열어 놓고 만나는 게 음행의 죄악을 예방하는 차원이 돠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그래도 그런 유혹이 밀려들 때 그 현장을 도망치는 게 죄악을 이길 수 있는 길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하는 것이죠.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60619796
(본문2)본문 19-20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원해)여기에 ‘성령의 전’이란 헬라어로 ‘나오스’(ναός)입니다.
성전 속에 있는 지성소를 뜻하는 말입니다.
성령님께서 내 속에 거하시면 나는 성령의 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원성)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 세례를 더욱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밖에 계시지 않고 내 안에 살고 계시면 그분이 내 주님이 되시고 주님과 호흡하게 되는 것이죠.
그때부터 그분이 내 주인이 되고 내 손과 발은 그 분의 손과 발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고깃덩이와 같은 사르크스의 몸둥이가 아니라 전인적인 몸 성령을 모신 성전의 소마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사실 우리 자신은 볼품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시면 나의 사지 백체를 통해 진리의 빛이 온 세상을 비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가 삶 속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우리 몸이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산 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으로 음행과 같은 죄악된 몸에 맡길 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몸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정체성을 갖고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 몸은 주님을 위해서 존재하고 내 몸 자체가 그리스도의 지체요 내 몸 자체가 성령의 전이라는 걸 알면 어떻겠습니까?
모든 게 가하나 모든 게 유익하지 않다는 걸 알고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기 위해 끊을 건 끊고 사는 것이죠.
그때에만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 그때에만 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진리의 등불이 될 수 있는 것이죠.
(적용)그렇다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타락한 근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성령의 전이라는 사실, 자신들 속에 성령께서 내주하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귀한 주님의 지체로 소마여야 할 몸으로 사르크스 곧 고깃덩이로 전락시키는 삶을 산 것이었죠.
그만큼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성령의 전답게 정체성을 회복하라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그런 정체성과 함께 한 가지 더 추가적으로 요구하는 게 있습니다.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게 그것이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로마서 12장 1절에 있는 말씀을 좇아 사는 걸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구약시대의 제물은 제단에 태워드리는 것이죠.
제물을 태워드리면 보이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보이게 되죠.
그것이 제사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제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 제물이 된다면 우리는 산 제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내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산 제물이 되는 것 뿐만 아니라 예배당 밖 삶속에서도 하나님만 드러나는 삶으로 사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썩어 없어질 고깃덩어리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지체가 되도록 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승화시키는 삶이요, 그것이 주님 앞에 산제물로 사는 삶입니다.
(주문)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우리가 성령의 전답게 음행과 같은 죄악 앞에서는 도망치고 주님의 사랑을 보여줘야 할 일에는 주님과 손과 발로 영화롭게 하는 삶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주님께서 성령의 음성을 통해 우리에게 친히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음행의 유혹 앞에서는 요셉처럼 도망치는 게 죄를 짓지 않는 길이요 주님의 손과 발을 필요로 할때는 너의 지체를 주님께 드려서 영화롭게 해 드려야 하지 않겠는갸?”
“네 사지백체로 음행을 좇는 삶은 고깃덩어리 사르크스에 지나지 않지만 네 손과 발 네 몸으로 주님의 사랑을 드러낼 때 네 몸은 소마요 성령의 전을 모신 몸이지 않겠느냐?”
“네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다시 태어났다면 너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의 몸이 되는 걸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주님께서 네 몸으로 영광을 받으신다고 할 때 병들어 죽은 나사로를 기억하면서 네 때를 고집하지 말고 주님께 내어맡길 줄 알았으면 좋겠구나.”
“하나님께서는 네가 바라고 원하는 것보다 더욱 선하고 좋은 때에 너를 통해 영광을 받으실 테니 말이다.”
“그만큼 매 순간순간 네가 말씀을 좇고 성령님의 뜻을 좇아 순종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손과 발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찬양)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
그 빛난 영광 온 하늘 덮고 그 찬송 온 땅 가득해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찬송 가운데 서신 주님
주님의 얼굴은 온 세상 향하네 권능의 팔을 드셨네
주의 영광 이곳에 가득해 우린 서네 주님과 함께
찬양하며 우리는 전진하리 모든 열방 주 볼 때까지
하늘 아버지 우릴 새롭게 하사 열방 중에서 주를 섬기게 하소서
모든 나라 일어나 찬송 부르며 영광의 주님을 보게 하소서
주의 영광 이곳에 가득해 우린 서네 주님과 함께
찬양하며 우리는 전진하리 모든 열방 주 볼 때까지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값으로 산 바 된 몸입니다.
그 몸으로 고깃덩이와 같은 육체의 죄악 음행과 같은 죄악에 맡겨 살 것이 아니라 성령을 모신 전답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몸으로 살 수 있기 바랍니다.
때로 내 뜻이 성취되지 않고 내 바람대로 되지 않아도 주님께서 영광받으실 일이 있다면 기필코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를 위해 내 사지백체로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거울처럼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주님의 축복의 통로로 사는 비결이요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인 줄 믿습니다.
그런 은총의 주인공으로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116349
728x90
반응형
LIST
'수요설교WednesdaySermon > 고린도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로 분방하지 말라(고전7:3-6) (0) | 2024.05.22 |
---|---|
음행을 피하기 위해 아내를 두고 남편을 두라(고전7:1-5) (0) | 2024.05.15 |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고전6:15-17) (2) | 2024.05.01 |
모든 것이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고전6:12-14) (1) | 2024.04.24 |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6:6-11) (1) | 2024.04.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