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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김유신 장군이 젊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술집에 드나들면서 ‘천관녀’라는 기생에게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가 하루는 그를 불러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나라의 기둥이 될 화랑이 이게 무슨 짓인가? 술과 여자에 빠져서야 어찌 장수가 되겠으며 나라에 충성할 수 있겠는가?”
어머니의 꾸중을 들은 김유신은 다시는 그 술집에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유신이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너무 피곤해서 말등에서 졸던 김유신이 눈을 떠보니 술집 앞에 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급히 말에서 뛰어내려 차고 있던 칼을 뽑아 그 말의 처버렸다는 것입니다.
말의 피가 하늘을 치솟았고 천관녀는 새파랗게 질려 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뒤부터는 그와 같은 유혹을 철저하게 뿌리쳐고 그것이 훗날 삼국 통일의 주역으로 만든 근간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깨달음)신앙생활이란 불의하고 죄악 되고 진리에 위배되는 유혹과 욕구를 용감히 거절하는 데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소돔왕이 주는 불의한 재물을 실 한 올이나 신들메 하나라도 취하지 않고 용감히 거절했습니다(창14:21-23).
용모가 준수한 청년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동침하자고 요구하자 겉옷을 벗어 던지고 도망치는 거절을 보였습니다(창39:3-13).
모세는 바로의 공주에게서 아들의 영광을 얻을 수 있었고 애굽의 1인자가 될 수 있었지만 그 유혹을 거절한 채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종살이하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히11:24-26).
어린 나이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이 주는 진미와 포도주를 거절하고 채소만 먹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왕이 두라 평지에 세운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아니하면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 죽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단3장).
예수님은 ‘돌로 떡을 만들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내 앞에서 절하라’는 사탄의 유혹을 말씀을 물리치며 거절하셨죠.
(적용)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의 유혹에 쓉쓸릴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특별히 육체의 정욕에 눈이 멀게 되면 몸도 마음도 다 빼앗기게 되는 법이죠.
그런 것에 취하면 취할수록 몸도 영혼도 피폐해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기에 그런 유혹이 밀려들 때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절할 것을 거절하지 못하면 범죄에 이르게 되고 무서운 시험에 빠져 사탄의 포로가 되기 때문이죠(약1:14-15).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렇기에 날마다 제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죽는 사람이요 그때에만 비로소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화)고린도의 성채 위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 신전 안에는 무려 일천 명이나 되는 여사제들이 있었죠.
그녀들은 낮 동안에는 그 신전에서 시중들다가 밤이 되면 고린도 시내에 내려와 몸을 팔았습니다.
그만큼 고린도 시에는 음행이 성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어땠을까요?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도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오용해서 자기 몸을 음행에 내맡기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에 만연한 이원론 사상과 에피쿠로스 쾌락주의가 교회 안에도 침투해서 성도들의 신앙을 흐려놓은 것이었습니다.
영은 거룩하지만 육은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이원론 사상이 그것이죠
더욱이 인간의 몸은 육체와 영의 결합이고 죽음은 그것의 분리이기 때문에 그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육체로 있는 동안 쾌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죠.
(깨달음)그런 두 가지 사상이 고린도교회에까지 파고 들었으니 교인들 중에도 창기들과 음행에 빠진 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런 성도들을 봤을 때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음행하는 자와 한 몸이 될 수 있냐고 질책하지 않겠습니까?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합한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게 그것이죠.
그것이 주님 오실때까지 영과 혼과 몸을 흠 없게 보전하는 길(살전5:23)이기 때문이죠.
(적용)그것은 바울이 로마서 6장 13절을 통해 권면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도 늘 거룩한 영혼 거룩한 유체를 단장하며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다시 사는 길인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초반부에서 성도 간의 개인적인 대립문제를 세상 법정에까지 가지고 가는 것을 질타했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승리자인데 성도가 그렇게 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이미 영적으로 패배한 자이기 때문이죠.
그로 인해 복음의 문이 막히고 세상의 비웃음과 조롱거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죠.
바울은 그래서 세상 법정에 나가 다투는 자나 음행이나 우상숭배자나 동성애자나 모두가 같은 죄를 범하는 자라고 말하죠.
나는 비록 세상 법정에가서 성도의 문제를 소송했지만 간음도 안하고 동성애도 안하고 토색도 않했다면서 깨끗한 자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당사자와 당사자가 그런 일을 벌일 때 교회 성도들은 왜 잠잠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미 고린도교회 성도들 대부분이 불의속에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그렇게 타락하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주님을 만나 구원은 얻었지만 육신의 소욕을 쫓아 사는 영적인 미숙아였기 때문이죠.
그러다 보니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세상 것으로 왕 노릇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 기준이 없고 자기 본능을 좇다보니까 그렇게 타락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죠.
지난 시간에 살펴본 고린도전서 6장 후반부인 12-13절을 통해 살펴본 말씀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성도의 자유에 대한 부분을 짚어줬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을 통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죠.
그 자유가 있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면 그 자유를 절제하며 사는 것도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라는 것이죠.
꽃뱀이나 제비족이 돼서 그 날밤은 즐길지 모르지만 다음날이 되면 어떻습니까?
누군가 돈을 요구하고 또 누군가는 신고한다고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일이죠.
그런 삶에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죠.
우리가 살아가는데 돈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내가 돈 위에서 살아가느냐, 아니면 돈의 지배를 받는 노예로 살아가느냐, 그것에 따라 내 삶의 결과는 달라집니다.
그 또한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돈의 지배를 받는 노예로 살지 않기 위해서 절제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13절을 통해 살펴본 음식과 배도 마찬가지였죠.
식물을 배를 위해 필요한 것이고 배는 몸의 한 부분이죠.
그런데 주님의 종말과 심판의 때에는 그 모든 것들이 필요없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이었습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것은 영혼만을 구원코자 함이 아니라 육체의 구원을 위함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심판하실 때 무덤에 묻힌 영혼도 에덴동산의 아담처럼 최초의 몸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주님 재림할때까지 그 몸을 단순한 고깃덩이와 같은 사르크스로 여길 게 아니라 인간다운 인간 곧 전인적인 인간의 몸인 ‘소마’의 몸을 가꿔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때에만 그리스도인의 육체를 정욕에 내주지 않을 수 있고 모든 것이 가하나 육체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 절제하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오늘 본문 그 이후의 말씀인데 15-16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원해)예수님께서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몸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당신을 누구를 통해 보여주시겠습니까?
우리를 통해서죠.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어떻게 보여줄 수 있습니까?
바로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해서 우리의 몸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자신의 손과 발과 몸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화면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줘야 할 화면인 우리의 몸으로 어찌 창기의 지체를 만들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죠.
그래서 ‘둘이 한 육체가 된다’고 할 때 ‘육체’는 헬라어로 ‘소마’(σῶμα)가 아니라 ‘사르크’(σάρξ, flesh) 고깃덩이를 사용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로 몸을 함부로 얽매이지 않고 주님 오실때까지 흠 없이 보전되기를 바라는 육체는 ‘소마’입니다.
인간다운 인간, 전인적인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리스도의 지체로 창기와 연합하는 몸이 된다는 것은 단순한 살점만 지닌 사르크스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깨달음)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지 않습니까?
정말로 하나님의 지체답게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고 또 하나는 창기로 곧 썩어 없어질 고깃덩이로 전락시키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모든 것이 가능한 삶을 살 수 있지만 주님을 위하고 함께 사는 이들을 배려하면서 절제하면서 사는 것 말입니다.
(본문2)오늘 본문 17절은 놀라운 사실을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원해)여기에 ‘합하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콜라오’(κολλάω는 마치 아교로 붙인 것처럼 뗄 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결합돼 있다는 뜻입니다.
이미 16절에도 쓰인 단어인데 창기와 합한 자는 창기와 한 몸을 이루고 주님과 합한 자는 주님과 한 몸을 이룬 자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는 것이요 그것 자체가 신빌운 연합이 지속된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16절에서는 창기와 합할 때 ‘한 육체’라는 표현을 썼는데 본문에서는 ‘한 영’이란 표현이 썼습니다.
창기와 합한 것은 성적인 결합을 염두에 둔 것이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영적인 연합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창기와 연합하는 것은 스스로를 창기와 같은 음란한 몸으로 만드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성령 안에서 주님과 하나되는 거룩한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과 합하는 자는 주님 안에서 신령한 영적 존재로 승화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살라는 주문입니다.4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우리의 육체로 창기와 합하는 고깃덩이가 아니라 주님과 합한 전인적인 육체로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김유신이 술집에 빠져들고 여인의 치마폭에 빠져들 때 어떻게 대의를 좇아 살 수 있었겠느냐?”
“고린도의 아프로디테 신전을 섬기던 천명의 여사제들도 밤에는 고린도시 내려와 매음을 하던 창기들이지 않았더냐?”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이원론에 물들고 쾌락주의에 물든 이들이 그런 창기들과 육체의 즐거움에 빠져들지 않았더냐?”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창기와 한 몸을 이룰 수 있냐고 탄식한 것 아니더냐?”
“그리스도인은 오직 주님과 하나된 영적인 존재임을 잊지 말라는 것 아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예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너의 몸으로 육체의 쾌락을 좇기보다 주님과 합한 영적인 존재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너의 육체로 불의의 병기로 내 주기보다 의의 병기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방향으로 말이다.”
“육체의 소욕을 좇는 사는 사망의 길로 내닫지만 성령의 소욕을 좇는 자에게는 생명과 평안함이 다가오는 법이니 말이다.”
“혹여라도 너의 육체로 불의의 병기로 사용하는 것이 있다면 김유신처럼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의의 병기로 주님께 내어드리는 소마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구나.”
(찬양)너 어디 가든지 순종하라 너 어디 있든지 충성하라
주 너의 하나님 왕 되신 주영원히 주님만 찬양하라
너 무엇하든지 진실하라 너 무엇하든지 성실하라
주 너의 하나님 도우시리 어디를 가든지 정직하라
너 어느 때든지 기도하라 너 어느 때든지 감사하라
주 너의 하나님 돌보시리너 어느 때든지 기뻐하라
너 고난 속에서 평화하라 너 핍박 속에서 감사하라
주 너의 하나님 함께하리 승리의 주님을 찬양하라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받은 자녀들이 불의의 병기로 육체를 내주기보다 의의병기로 사용하길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죄와 사망의 길로 치닫지 않는 길이요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보장하는 길인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입니다.
그때에만 그가 머문 자리가 평강의 자리요 성령님의 임재가 함께 하는 자리가 될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간에 그리스도의 지체로 성령님과 함께 할 때 놀라운 축복의 통로로 삼아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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