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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논지)지난 시간 ‘아디아포라’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뭔가를 해도 선이나 악이 되지 않는 걸 말하죠.
그런데 그 결과가 선이 되기도 하고 또 악이 되기도 하죠.
(깨달음)우리식으로 말하면 여름철에 슬리퍼를 신고 배꼽티를 입고 교회에 오는 것도 마찬가지죠.
또 술과 담배를 하는 것도 그렇고요.
이 모든 게 실은 다 가능한 일이죠.
그것 자체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그것 자체가 죄도 아니고 뭣도 아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로 인해 누군가 불편해하고 마음을 상하게 된다면 하지 않는 게 낫겠죠.
신부들은 다 담배를 피우고 술도 마시죠.
개신교단내에도 담배를 피우는 목사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인도하고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운다면, 은혜받은 성도가 실족하지 않겠습니까?
(적용)금세기 우리나라 최고의 선사라고 불리는 성철 스님이 있습니다.
그 분이 살아 있을 때 젊은 스님들이 합천 해인사까지 찾아가서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 중이 고기를 먹으면 안 됩니까?”
“이제는 세상이 바뀌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이제 고기를 먹어도 되는 것 아닙니까?”
그때 성철 스님이 뭐라고 대답했겠습니까?
“안 된다. 중이 고기 먹는 것은 고기 먹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중이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모든 계율을 어기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먹으면 안 된다”
우리 크리스천들도 살면서 내가 의도하지 않지만 죄로 연결되는 일들도 많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고린도전서 8장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와 관련하여 바울이 답변하는 내용입니다.
그것을 아디아포라라고 했는데 2천년전 고린도교회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게 심각한 ‘아디아포라’였죠.
그래서 8-11장까지 그 주제를 놓고 바울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먹는데 자유하다는 사람 곧 헬라파 그리스도인도 있고, 먹지 말아야 한다는 유대계파 그리스도인이 있었죠.
서로가 갑론을박 다투는데 그 문제를 에베소에 있는 바울에게까지 편지를 써 자문을 구한 것이죠.
중요한 것은 1-2절 통해 살펴본 것처럼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지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코자 했죠.
하지만 바울은 사랑의 관점으로 그걸 풀어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게 있었죠.
우상이란 실은 본래부터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죠.
우상이란 인간의 마음속 욕망이 빚어낸 형상이기에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4절 후반부를 통해 이 세상에 신이라고 경배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이 땅의 우상은 다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형상일뿐 진정으로 경배할 분은 하나님이라고 한 것이죠.
삼위일체 하나님은 내가 땅에 있든지 하늘에 있든지 땅속 지하에 있든지 나와 동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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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오늘 본문 5-6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깨달음)헬라 문명에는 하늘의 신과 불의 신과 바다의 신 등 많은 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신은 실은 실체가 없는 것들에 불과할 뿐입니다.
오직 신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6절을 통해 아버지가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란 우상과 대비되는 말이죠.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인격이 없는 단순한 물체에 불과할 뿐이죠.
나무나 금속이나 다른 어떤 모양의 형상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인간이 욕망하는 것을 빚어 만든 것이죠.
그러니 우상이라고 섬기는 나무 조각이나 돌부처 같은 것들은 단순한 물체에 불과할 뿐 인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는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고 나의 작은 기도에도 귀 기울여주시는 인격적인 분이시죠.
(적용) 바울이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함으로써 무엇을 일깨워주고자 하는 것입니까?
그와 같은 단순한 물체에 불과한 우상에게 받친 음식은 신이 아니므로 못 먹을 게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주장을 하면서 여기에서 끝내버렸다면 바울도 우상에 관한 문제를 지식으로 해결하려는 자와 다를 바 없는 셈이 되죠.
하지만 바울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끝내버린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계속 이야기합니다.
(본문2)본문 7-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깨달음)‘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게 아니다’ 하는 게 무슨 말입니까?
이 지식을 깨닫는 사람들이 모두가 다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상이 나무 조각이고 쇠붙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어서 그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졌다는 것입니다
사실 모두가 우상은 쇠붙이와 나무 조각에 불과하니 그것에게 바친 것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먹어도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우상을 신적인 존재로 믿고 있고 자신이 먹는 우상의 제물을 신의 하사품이라고 여기는 그리스도인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마다 한편으로는 주님께 죄를 범하는 것같아 양심에 거리끼게 되는 것이죠.
또 안 먹으려고 하면 이 우상의 신에게 저주를 받을까봐 두렵기도 하고요.
(원해)8절에 ‘내세운다’는 헬라어 ‘파리스테미’(παρίστημι)는 ‘가까이 놓다’(to set at hand)는 뜻입니다.
내가 음식을 잘 먹는다고 해서 하나님께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내가 음식을 잘 먹는다고 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설령 내가 음식을 못 먹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도 하나님 앞에 못 서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음식은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는데 아무런 요인이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적용)그만큼 나는 내 믿음의 자유로 우상의 제물이 있을지라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9절의 ‘자유’라는 단어도 헬라어로 ‘엑수시아’(ἐξουσία)인데 ‘권리’(the power of authority)를 뜻하는 말입니다.
내 권리로 내가 우상의 음식을 먹는데, 인격체가 없는 사물에 불과한 우상의 음식을 먹는다 한들, 하나님과 멀어지겠느냐, 하는 것이죠.
그런데 9절에서 내 행위로 인해 누군가 실족하게 된다면 도리어 그 권리를 써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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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본문 10-12절을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깨달음)여기에서 ‘담력’은 부정한 의미에서 사용된 말입니다.
이를테면 내 친구의 자녀가 결혼을 하는데 신전에서 하게 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상한테 바친 제물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지식적으로 알죠.
저것은 쇠붙이요 곧 나무에 불과하기 때문에 인격체가 없는 물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얼마든지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하면서 먹는데, 그런 믿음과 그런 지식에 이르지 못한 자들이 나를 보고 어떻게 해석을 하겠습니까?
‘저렇게 믿음 좋은 사람도 우상의 실체를 인정하네.’
‘저 사람도 먹고 우상한테 무언가를 비는가 보네.’
그렇게 생각하면서 양심이 부정적으로 담대해져서 우상을 인정하는 쪽으로 먹게 되지 않겠느냐,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11절에 만약에라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그를 위해 죽으신 믿음의 형제를 실족시키는 것이요 그의 믿음을 허물어트리는 것이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적용)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질문을 제기할 수 있지요.
사도 바울이 그 우상의 제물 하나를 먹는 것 가지고 믿음이 무너진다고 확대해석하고 과장되게 이야기하는 것 아니냐, 하고 말이죠.
하지만 엄밀하게 믿음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과장도 아니고 확대해석도 아닙니다.
(성화)다윗이 남의 아내를 데려다가 간음하고 죽였습니다.
그런데 간음하고 살인한 것은 그 두 계명만 범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죠.
한 가지 죄를 범하면 다른 죄들이 연쇄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것이죠.
간음죄를 범했는데 살인죄로 연결됐고 또 안식일에 제사를 드리지만 하나님을 속이는 제사라 안식일도 범하는 것이죠.
그로 인해 다른 십계명 모두를 범하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죠.
(깨달음)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자신을 찾아온 젊은 중들에게 성철 스님이 ‘그래. 이제부터 고기를 먹어라’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다른 모든 것들도 다범하면 부처를 모시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살게 되겠죠.
그래서 이제 여름철에 교회에 올 때 슬리퍼를 신고 배꼽티를 입고 껌을 쫙쫙 씹으며 전날 술 마신 그대로 와도 돼.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경건의 모양을 취하고 경건의 능력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죠.
만약에 누군가가 고기를 먹는 걸 보고 실제로 우상으로부터 복을 받아야 되겠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은 고기만 먹는 게 아니라 이제부터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우상의 지배를 받는 것이 되죠.
그래서 너의 행위로 인해 누군가 실족한다면 그것은 그 계율을 범하는 게 아니라 믿음 자체를 허물어트리는 것이다,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12절에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3절을 통해 내가 먹는 걸로 누군가 실족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입에 대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죠.
종종 채식주의자들이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바울은 채식주의자이기 때문에 이 구절을 쓴 게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자들이고 바울도 마찬가지였죠.
그런데 바울은 지금 헬라 문명에 들어가서 말하는 것입니다.
내게는 그것이 우상의 제물일 수 없지만 내가 우상의 제물을 먹으므로 누군가 실족한다면 나는 앞으로 입에 대지 않겠다고 말이죠.
왜 바울이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믿음이 약한 자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나와 그리스도의 지체를 이루고 있는 교회 공동체의 형제자매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적용)그만큼 바울은 어떤 관점으로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사랑의 관점이죠.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우상의 제물과 음식에 대해 지식으로 다퉜지만 바울은 사랑의 관점으로 접근하길 원한 것입니다.
그렇담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사랑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자기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기 권리를 스스로 통제하는 것이 사랑이죠.
복음 안에서 얻어진 자유를 자신을 위해 마음껏 쓰고 누릴 수 있지만 그 자유를 사랑의 종노릇 하기 위한 도구로 쓰는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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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다면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 주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지만 그 자유를 나보다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을 위해 제한하며 사랑의 종노릇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성령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모든 죄와 구약의 율법까지 완성하셨으니 이제는 우상의 음식조차 먹고 마실 수 있는 자유가 있지 않겠느냐?”
“그러나 너는 자유하다면서 마음것 먹고 마실 수 있지만 너로 인해 누군가 실족하여 우상을 숭배한다면 그것은 죄 짓는 꼴이 되지 않겠느냐?”
“주님께서 너에게 모든 자유를 주셨지만 도리어 누군가를 실족하게 한다면 그것은 그 영혼을 죽이는 꼴이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꼴이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주일날 여름철에 덥다고 반바지에 배꼽티를 입고 올 수 있고 남몰래 술도 먹고 담배도 피울 수 있는 자유가 있지 않겠느냐?”
“하지만 그 자유로 인해 누군가 믿음이 약해지고 덕스럽지 못하다면 그 자유를 다른 성도를 위해 종노릇하는 마음으로 절제해야 되는 것 아니겠느냐?”
“바울도 주님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모든 것을 먹고 마실 수 있었지만 누군가 믿음이 연약해진다면 평생 먹지 않겠다고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만큼 주님은 네가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을 위해 사랑의 종노릇하는 자세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걸 기뻐하지 않겠느냐?”
(찬양)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자매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우리의 모임 중에 임하신 하나님 영광 아름다워라
존귀한 왕이 여기 계시니 사랑하며 섬기리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는 죄로부터 자유케 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먹고 마시는 음식에 대한 것도 자유케 하셨습니다.
더 이상 구약의 율법이나 형식에 치우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술과 담배를 하고 여름철에 슬피러를 신고 배꼽티를 입고 예배당에 나온다면 어떻겠습니까?
목회자도 술과 담배로부터 자유한다고 하니 술과 담배를 먹는 모습을 성도들에게 보인다면 어떻겠습니까?
바울은 우상의 음식은 우상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먹을 수 있지만 누군가 먹는 문제로 실족하고 진짜 우상을 섬기게 된다면 그 영혼을 죽이는 꼴이요 주님께 죄 짓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누군가의 영혼을 실족지 않도록 사랑의 종이 되는 관점으로 우리의 자유를 절제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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