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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 나타내주신 예수님의 7가지 표적 중에 마지막 7번째 표적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 표적이란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주님께서 살려내주신 표적이죠. 그 표적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만 천하에 알려주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계신 분임을 알려주시는 것 말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서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르다와 마리아가 주님께 보인 태도에 초점을 맞춰주고 있습니다. 어제 읽은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깨닫게 해 준 부분은 마르다가 주님을 믿는다는 태도에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셨다면 자기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라도 주님께서 역사하시면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들어주실 것을 믿는다고 고백을 했죠.
그때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하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물론 그 말씀은 지금 당장 살려주실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셨습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자기 관점으로 생각을 했죠. 어떻게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주님께서 다시 살려줄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주님께서 보여주신 관점과 마르다가 생각한 관점이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할 때에도 마찬가지죠.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방식, 내 고집을 강요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연약한 우리 자신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포기하지 않고 더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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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런 마르다의 신앙 자세는 여동생인 마리아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관점으로 마르다도 대답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8절입니다.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여기에서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어제 살펴본 것처럼 이미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말씀을 하셨죠. 뭐라고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하고 말이죠.
그때 마르다는 뭐라고 대답을 했습니까?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하고 대답을 했죠.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놓쳐서는 안 될 주님의 고백, 당신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고백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을 통해 7가지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셨다고 했습니다. 이른바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하는 표현이 그것이라고 했죠.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8:12), “나는 양의 문이다.”(요10:7), “나는 선한 목자다”(요10:11,14), 그리고 다섯 번째로 오늘 본문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11:25)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마르다야 네가 이것을 믿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 물은 마르다를 향한 말씀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의 정체성을 만방에 알린 말씀이셨습니다.
그때 마르다는 그 즉시 “주님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십니다. 곧 메시아이십니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하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물론 그 고백은 빌립보 가이샤라에서 베드로가 한 고백과 똑같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하고 고백한 것 말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아닌데도 그런 고백을 했다는 것은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도 우리 주님을 메시아로, 구원자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마르다가 최초로 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신앙고백이 아닐 수가 없죠.
마르다가 그렇게 예수님을 향해 신앙고백을 한 뒤에, 곧바로 이제 마르이라를 향해 한 말이 그것입니다. 본문 28절 후반절에 있는 것처럼 “마리아야 예수님께서 너를 부르신다”하는 것 말입니다. 그때 마리아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29절에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마리아는 즉각적으로 일어나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물론 30절을 보면 예수님은 아직 그 마을 입구에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동네 밖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이고, 그 소식을 집안 하인에게 알려서 마리아에게 전달토록 했던 것이죠. 그래서 마리아는 그 즉시 동네 밖으로 뛰쳐나갔던 것이고요. 더욱이 마리아가 그렇게 뛰쳐나갈 때, 동네 사람들은 혹시라도 죽은 오라버니의 무덤으로 가서 통곡하려고 가는 것으로 생각을 했죠. 그 상황을 31절에서 그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동네 밖에 나간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32절에 나옵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이 고백은 어제 읽은 21절에서 마르다가 똑같이 예수님께 고백한 말입니다. 그만큼 마르다나 마리아나 예수님을 똑같이 의지하고, 똑같은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 모습임을 알게 하죠. 그런데 약간 다른 모습이 나옵니다. 마르다는 그 말을 하고 “이제라도 주님께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하고 말했는데,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하고 말한 뒤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울자 온 유대인들이 울었다고 본문 33절에서 증언해주죠.
어찌 보면 마리아가 더 심성이 여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감성적인 여인이었던 것이죠. 그때 예수님께서는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하고 33절에서 전해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시는 모습을 본 유대인들이 어떻게 생각합니까? 본문 36절에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그만큼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면서 우신 그 모습 앞에 마리아와 온 유대인들의 마음이 녹아내렸던 것입니다.
누군가 고통에 처했을 때 가장 큰 위로는 함께 울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일날 오후에도 말씀드렸지만 추상미 영화감독이 산후우울증으로 수많은 자살충동을 느꼈다고 했죠. 그런데 그런 고통을 어떻게 이겨냈는가?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만져주시고 안아주시는 그 사랑 속에서 이겨냈다고 했죠. 그리고 그때 이후부터 누군가 자신과 동일한 처지 속에 있는 분을 만나면 아주 자연스럽게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경험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우리 주님께서 마리아와 유대인들을 향해 그렇게 우셨을 때, 큰 위로의 시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 주님은 눈물만 흘려주시는 것으로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곧 하나님이심을,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알려주시는 것으로 더 큰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 동굴 무덤 속에서 시체 가운데 썩어가고 있는 그 나사로를 살려내 주신 것으로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인간의 위로와는 다른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과연 어떤 방법으로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려주셨습니까? “나사로야 나오너라”하시는 말씀으로 죽은 나사로의 영혼을 불러내셨습니다. 마치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살려주신 하나님의 방법처럼 말입니다. 그때 에스겔에게 “대언하라”하셨는데, 그 대언을 한 에스겔도 실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선지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내 심령이, 나의 영적인 상태가 죽은 나사로와 같고, 마르다나 마리아와 같다면, 우리가 누구를 붙잡고 의지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나의 영혼을 새롭게 살리고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실 분은 오직 생기를 불어넣어 살리신 아버지 하나님, 죽은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부르신 주님의 말씀뿐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심령 위에도 그와 같은 은총의 역사가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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