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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에서 밝힌 예수님의 일곱 가지 표적 중에 마지막 표적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일곱 가지 중 첫 번째 표적은 물로 포도주를 만든 표적(요2:1-12)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질을 초월케 하는 능력을 지닌 분임을 알린 사건이죠. 둘째 표적은 왕의 신하가 앓고 있는 병을 직접 가지 않고 말씀으로 고친 사건(요4:46-54)입니다. 공간을 초월케 하시는 능력을 지닌 분임을 알린 사건입니다. 셋째로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친 기적(요5:1-9)입니다. 시간을 초월케 하시는 능력의 주님이심을 알게 한 사건이죠. 넷째로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인 표적(요6:1-14)입니다. 양을 초월케 하시는 능력입니다. 이때 “나는 생명의 떡이다”하시면서 육적인 떡을 넘어 영생의 떡이신 주님의 살과 피를 마시는 것을 일깨워주셨죠. 다섯째로 물 위를 걸으신 표적(요6:16-21)입니다. 이것은 자연법칙을 초월케하는 능력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여섯째로 날때부터 소경인 사람을 고친 사건(요9:1-7)이죠. 타고난 운명까지도 바꾸시는 능력의 주님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 표적은 죽은 지 나흘이 돼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입니다(요11:1-44). 죽음까지도 초월케 하시는 능력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물론 오늘 읽은 내용은 그 사건을 일으키기 전 단계의 배경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3Km 떨어진 베다니라고 하는 도시에 나사로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위중한 병에 결려있었습니다. 그는 마리아의 오라버니였죠. 마리아는 우리가 읽어봤듯이, 예수님께서 베다니의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값비싼 향유 옥합을 가져와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던 여인(막14)이었죠. 그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그녀의 행동에 대해 제자들은 꾸짖고 책망했던 일이 있었죠.
그런데 바로 그녀의 오빠인 나사로가 병에 걸린 것입니다. 예전에 나병에 걸린 시몬을 예수님께서 치유해주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사건을 목격한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께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어서 오셔서, 오라버니의 병을 고쳐주시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의아스러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과 마리아의 가족관계에 대해 요한복음 11장 5절에서 이렇게 밝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고 말이죠. 그만큼 예수님과 나사로 가족들은 매우 친밀한 관계였는데, 그렇다면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당장에라도 가서 나사로를 고쳐줘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결코 서두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4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죠.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함이라” 그러면서 이틀을 더 머물고 계셨죠. 그 후에 이제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때서야 “내가 깨우러 가야겠다”면서 11절에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죽을 때까지 예수님께서 뜸을 들이신 것입니까? 본문 4절에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나사로의 그 병을 통해, 그의 죽을 병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 성자 하나님으로서 죽어있는 사람의 생명까지도 주관하시는 분임을 온 세상에 천명하고, 그 일을 통해 성부 하나님께서도 영광을 받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 가지 않고 뜸을 들이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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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와 같은 병세 속에서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보여준 예수님처럼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가 있을 것을 간구하면서 일반 병원에는 데리고 가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요? 특별히 암과 같은 몹쓸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분이 있다면, 오늘 본문의 나사로와 같은 상황처럼 며칠간이 되었든지 간에, 묵묵히 기다리는 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일까요?
신앙인 중에는 간혹 극단적인 방법을 추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병이 고침받는다고 믿는 사람들 말입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없잖아 있죠. 하지만 기도만이 병을 치료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한 신앙입니다. 만약 기도하는 것만으로 모든 병이 치유된다면 우리 주위에 환자들은 기도를 하지 않아서 낫지 않는 일이 되죠. 더욱이 기도는 했는데 호전되지 않거나 치유되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이 약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병에 걸렸을 때 주님께 기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의학적인 도움을 받아서 치료하는 길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의학이라는 분야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지혜의 결과요, 하나님의 간접적인 손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사의 손길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얼마든지 믿고 맡기는 자세가 참된 신앙인의 자세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의학만이 병을 치유하는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는 것도 올바른 신앙관은 아닙니다. 아무리 최첨단을 자랑하는 의학이라 할지라도 못 고치는 병이 이 땅에는 수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의술을 다해도 고치지 못하여 죽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인간에게 죽음은 두려운 일이지만, 그것이 이 세상과는 단절일 수 있지만, 저 영원한 세상으로 입성하는 관문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신앙인에게 죽음이란 영원한 천국을 향한 새로운 시작점이요, 관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른바 죽음 너머의 영생을 향한 발걸음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은 바로 그와 같은 믿음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 처할 지라도 주님의 그 말씀을 믿는 믿음의 삶, 바로 그런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시고,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상황 속에서는 예수님께서 죽은지 나흘된 나사로를 기꺼이 살려내셨다는 점입니다. 나사로가 죽었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었습니다. 그의 영혼이 천국에 영원토록 입성하여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은지 나흘된 나사로의 영혼을 그의 육체속으로 불러오신 예수님이십니다. 그야말로 죽음까지도 초월케 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만 천하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5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15) 무슨 말씀입니까? 만약 예수님께서 거기 계셨더라면 당장에라도 고쳐주지 않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더욱 크게 영광받지는 않았을 것이란 사실이죠.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지 않아서 죽은지 나흘째 되는 날에 그를 살려내서, 더 큰 영광의 사건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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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사의 때를 주관하시는 분이시고, 당신이 정한 때에 친히 영광을 받으시고자 놀라운 역사를 펼친다는 것입니다. 어제 극동방송을 듣는데, 배우 추상미가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 사회자가 물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고등학교 때인가 세례까지 받았는데, 잠시 주님을 잊고 배우로서 탄탄대로를 걷다가, 오빠의 사업이 망하고 그걸 보증 선 자신도 망가지고, 그렇게 승승장구할 것 같은 영화배우로서의 길도 다 막혀버리자, 그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다시금 회개하며 무릎을 꿇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타이밍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이지 않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런 타이밍의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금 그 영이 살아나면 하나님께서 넘치는 회복의 은혜를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그와 같은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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