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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니에 살던 나사로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나사로가 어떤 사람인지는 요한복음 11장 5절이 이렇게 기록이 돼 있습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나사로뿐만이 아니었죠. 그의 두 여동생들 곧 마르다도 그리고 마리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처럼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집안 식구들을 그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습니다. 대체 언제부터 예수님께서 그 집 식구들과 관계를 맺었던 것일까요? 우리가 이미 읽었던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환히 알 수 있습니다. 그때는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이제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실 때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이 바로 베다니의 나사로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0장 38절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을 영접하더라.” 그 집이 나사로의 집이기도 했지만, 실은 ‘마르다’의 집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그 집에 관한 실권을 마르다가 쥐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죠. 더욱이 오늘 읽은 요한복음 11장 19절을 보면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버니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하고 증언합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게 있겠죠? 평소 마르다의 집은 베다니에서 꽤나 잘 사는 부유한 층에 속한 집이었고, 그 지역에 많은 사람들에게 인심을 베풀고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동네를 지나가실 때 마르다가 예수님을 초청하여 자기 집에 영접하여 음식을 먹도록 권했던 것이죠. 바로 그런 대접을 받았고, 그 이후에도 그 집을 거점 삼아 예루살렘 선교를 펼쳐나가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서로의 신뢰가 쌓이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사로와 두 여동생들을 그렇게 사랑하고 아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지금 나사로가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예수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주님의 행동은 뜻밖입니다. 요한복음 11장 6절에서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우리 같으면 나사로가 죽기 전에 달려와서 그의 병을 고쳐주실 것으로 생각을 하겠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틀을 더 기다렸다가 나사로를 찾아가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기 위함이요, 그 일을 통해 아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신다는 뜻이었죠. 그래서 오늘 읽은 17절 말씀은 이렇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이제야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신 상황입니다. 그것도 죽은 나사로가 안치돼 있는 동굴 무덤에 ‘나흘’이 지나서야 오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요한이 세례 베풀던 베레아 지방에 계셨죠. 베레아는 나사로가 살고 있던 베다니로부터 약 30km 떨어진 곳입니다. 그 거리는 걸어서 하룻길 걸리는 거리죠. 마르다가 보낸 하인이 예수님께서 출발할 때만 해도 아직은 목숨이 붙어 있는 상태였죠. 그런데 그가 출발한지 나흘이 걸렸다는 것은, 그가 출발하자마자 나사로가 죽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하인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가 출발할 때만 해도 나사로가 살아 있는 상태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2천년 전 교통수단이 도보였음을 감안한다면, 나흘 길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죠.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와서 아직 병들었다고 말했을지 모르지만, 거기서 이틀을 더 머무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나사로가 죽은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시체 가운데 썩어가는 그 상황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실 일이 있음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 그때에 베다니에 가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황과 우리의 때를 고집하죠. 하지만 우리 인간의 모든 상황과 모든 때를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더 아름다운 적기의 때에 당신의 역사를 펼치셔서 영광을 받고자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9) 그래서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인간의 생각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한하신 하나님의 때에 내 생각과 내 뜻을 맡기는 것이죠. 그 분의 때와 그 분의 방법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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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본문 18절을 보면 “한 오리쯤 되었다”라고 증언합니다. 오리란 약 2km 떨어진 거리죠. 걸어서 30분 거리입니다. 그렇기에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위문하러 온 것이었죠.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과연 누가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의 슬픔을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어떤 말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의 슬픔에 위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나 어떤 말도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의 슬픔을 위로할 수 없는 법이죠. 오직 천국에 대한 믿음만이 위로를 받게 할 수 있습니다.
엊그제 광주에 사는 친구의 아버님이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몸 상태가 너무나도 좋지 않아 아버님의 장례식장에 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형제들에게, 지인들에게 보여주기가 싫었던 것이죠. 그런 자신의 몸 상태 때문에 너무나 괴롭고 힘들었는데, 그런데 그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금식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환상가운데 천사 둘이 와서 아버지를 이끌고 천국으로 가는 것을 보고 위로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죠. 이 땅에 죽은 유가족들의 슬픔을 어루만질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께서 천사를 통해 고인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해 가심을 알게 하시기 때문이죠. 그게 믿음의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의로요, 은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마르다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본문 21-22절입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함께 하셨더라면 자신의 오빠인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면서 이제라도 주님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것을 자신은 알고 있다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때 그녀의 고백들은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이때 마르다는 정말로 기뻐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마르다는 24절을 통해 뜻밖에 대답을 합니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지금 당장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실 때 그 마지막의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지금 주님께서 살려주실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마르다의 그런 모습이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믿음이 내 생각 속에 갇혀 있는 모습 말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고 믿음으로 고백하면서도, 실상은 나에게 허락한 현실을 거부하고 있는 내 모습 말입니다. 늘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면서도 내 뜻과 반하는 현실은 부정하는 모습 말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을 진정으로 믿는 자라면 하나님의 어떤 말씀도 다 믿는 자들이고, 주어진 현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가 돼야 한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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