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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남왕국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멸망해 포로로 붙잡혀갔습니다.
그들이 머문 곳은 바벨론 땅의 유프라테스 강 옆 그발 강가였죠.
당시 바벨론은 자기들의 땅을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기 위해 바벨론 지역에 관개수로를 정리했죠.
옛날 시골 논에 물 댈 때 다투기도 했지만 지금은 관개수로를 통해 물을 잘 공급하듯이 말이죠.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들은 그 강 옆에서 노동을 하며 살아간 것이었습니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그런 일을 하며 지낸다는 것은 피눈물 나는 고통스런 삶이었습니다.
그 옛날 화려했던 예루살렘 성전은 폐허로 남았으니 그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죠.
그들이 고향에서 가지고 온 하프를 버드나무 위에 걸어놨지만 더이상 노래 부를 소망도 없었죠.
그런데 바벨론 감독관들이 와서 그들이 쉬는 시간에 예루살렘에서 부르던 노래를 부르도록 하죠.
마치 군대에서 쉬는 시간만 되면 노래를 시키던 것과 같은 분위기입니다.
그때마다 유대인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나라 잃은 슬픔도 큰데 예루살렘에서 부르던 노래를 부르라고 명령하니 말입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그렇게 한탄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가 나라 잃고 바벨론에 끌려왔는데 무슨 노래가 나오겠냐? 무슨 노래를 부를 수 있겠냐?’
‘차라리 예루살렘도 잊고 수금 타던 재주도 다 잃었으면 좋겠다.’
‘노래할 수 있는 내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어 다시는 노래할 수 없었으면 좋겠다’하고 말이죠.
(역배)바로 이것이 시편 137편에 나오는 시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시137:1-9)
시편 137편은 당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의 서글픈 삶을 읊조린 시입니다.
그 세월을 무려 70년간 살았으니 두 세대가 흐른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는 동안 그들은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서 고향 땅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며 살았습니다.
한탄도 하고 원망도 하면서 말입니다.
과연 무슨 한탄을 했겠습니까?
“옛날 모세 할아버지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 10가지 재앙을 일으켜서 우리 선조를 애굽에서 빼냈는데 그게 사실일까?”
“그런 일을 그때 하셨다면 왜 지금은 못 하시는 걸까?”
“기드온 용사는 불과 300명 군사로 미디안의 12만 명을 죽였다는데 그때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셨다고 했지?”
그들은 그발 강가에서 관개수로를 놓으며 그렇게 한탄하고 탄식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정말 그랬을까? 아니야. 그런 일은 전설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었을 거야?’
“그때 그랬다면 왜 지금 하나님께서 우릴 도와주지 않는 건데?” 그렇게 한숨 짓는 것 말입니다.
(깨달음)그들이 그렇게 한탄하고 원망하지만 자기 백성의 역사 속에 함께 하신 하나님을 그리워한 것 아니었겠습니까?
그 하나님께서 다시금 포로 가운데 있는 자신들에게 찾아와 해방시켜 주시기를 말입니다.
그러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엎드려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기도했겠죠.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하고 말이죠.
그들에게는 함께 모여 제사드릴 성전도 없고 거룩한 옷을 입고 제사드릴 제사장도 없어졌습니다.
성전에서 찬양하던 레위인들의 성가대도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그 어떤 종교적인 도구도 없어졌습니다.
그런 그들이 돌아갈 곳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말씀뿐이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을 통해 그들의 존재의 목적을 재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행한 자가 율법학자로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에스라 선지자였습니다.
에스라는 바벨론 땅에서부터 토라를 묵상하고 연구하고 가르치기로 작정한 사람(스7:10)이었습니다.
그는 바벨론 강변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토라를 전하고 묵상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일할 때나 쉬면서 노래를 부를 때 시편을 노래로 만들어 함께 부르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시편을 찬양할 때 그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앙망하고 갈망하지 않았겠습니까?
시편 3편도 다윗이 아들 압살롬으로부터 쫓겨 갈 때 쓴 시인데 그들도 똑같이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시3:1)
그 시편을 소리내 찬양할 때 그들도 압살롬에게 쫓기는 다윗의 심정을 동일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그들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모든 말씀이 삶으로 기록된 고백임을 몸소 느끼게 되는 것이었죠.
바로 그런 시편들, 모세의 시편 다윗의 시편 솔로몬의 시편 아삽과 에단의 시편 작자 미상의 시편을 한데 모으고 편찬한 사람이 에스라였습니다.
에스라는 그 당시의 시편들을 한데 묶어 시편 150편으로 엮었고, 근간이 되는 말씀을 시편 1편에 둔 것이었습니다.
바로 복 있는 사람에 대한 고백이 그것입니다.
(적용)그러니 시편 150편이 어떤 상황 속에서 나왔는지 안다면, 시편 1편을 왜 앞머리에 둔 것인지 안다면, 어떻겠습니까?
포로에서 돌아온 그들과 후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복된 인생을 살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이죠.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인생이 복있는 인생이라는 것 말입니다.
그래야만 다시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한 삶을 겪지 않는다는 걸 말입니다.
그래야만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모든 일이 형통케 된다는 걸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전개)우리는 2주간에 걸쳐 시편 1편 1-2절을 읽어봤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깨달음)‘복’은 히브리어 ‘에쉐르’(אֶשֶׁר)의 원형 ‘아샤르’(אָשַׁר)는 ‘전진하다’ ‘정도로 나아가다’는 뜻이었죠.
‘복’이란 이쪽 저쪽 한눈팔지 않고 오직 목표를 향해 ‘똑바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세상 유혹에 이리저리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정조준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가 어찌 악인들의 꾀를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 들어서고 오만한 자리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소극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고 보다 적극적으로 행해야 할 바가 있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묵상하다’는 히브리어 ‘하가’는 사자가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린다’(growl, 사31:4)고 할 때 사용된 단어였죠.
비둘기가 ‘슬피 운다’(groan, moan, 사38:14, 사59:11)고 할 때도 쓰인 단어입니다.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utter, 시71:24, 잠8:7) ‘주절거리다’(사8:19) 할 때도 ‘하가’가 쓰였습니다.
‘묵상하다’는 말은 침묵이나 명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소리내서 심령과 삶에 새기는 것입니다.
그것도 주야로 곧 ‘데이앤나이트’(day and night)를 뜻하지만 기쁠때나 슬플때나 어떤 형편에 처할지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관개수로를 만드는 노동 현장에서도 말씀을 찬양으로 소리내 가슴과 삶에 새기듯이 말이죠.
그때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이 그들의 삶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체험한 그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이요 소년이라도 장정이라도 곤비치 않고 날개치며 올라가게 하시는 말씀이요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 치유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이죠.
(적용)오늘 우리도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소리내 가슴과 삶에 새길 수 있기 바랍니다.
그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곤비치 않게 하시고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시는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본문)오늘 집중해서 살필 말씀은 본문 3절입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원해)여기에 ‘시냇가’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펠레그’(פֶּלֶג)입니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계곡이나 하천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다듬은 시내와 운하(canal)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그발 강가에서 관개수로를 만들던 그 운하와 같은 격이죠.
그곳이 바로 ‘시냇가’입니다.
그만큼 본문의 ‘시냇가’란 하나님께서 최적의 환경과 상황을 만들어주신 곳입니다.
내 형편과 믿음을 아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특별한 곳으로 인도한 현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벨론 땅에서 관개수로를 만드는 그곳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세우는 최적의 시냇가였죠.
하나님과 멀어지고 말씀을 짓밟던 그들을 그 땅에 옮겨 심어 말씀을 묵상하는데서부터 그 믿음의 뿌리를 내리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냇가’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형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의 시내가 마르면 또 다른 시냇물이 공급되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세심한 하나님의 관심과 배려를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정도로 나를 위해 친밀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원해2)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을 주야로 소리내 묵상하는 자들을 시냇가의 심은 나무처럼 뿌리를 내리고 철 따라 열매를 맺게 하고 모든 일이 형통케 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형통하다’는 히브리어 ‘짤레흐’(צָלֵחַ)는 ‘돌진하다’(to rush) ‘나아가다’(to advance)는 뜻입니다.
형통이란 씨(seed)가 열매(fruit)를 맺기 위해 앞으로 돌진하는 것과 똑같은 형국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형통이란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해나가는 삶입니다.
하나님만을 유일한 소망이요 목적으로 삼는 자에게 형통케 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원성)바벨론에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처럼 요셉도 언제 죽을지 모를 노예의 상태였습니다.
그때 요셉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결코 붙들 게 없었습니다.
그런 요셉을 향해 성경은 그렇게 평가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창39:2)
이 말씀을 영어성경 NASB 번역본에서는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성공한 자가 되었습니다.”
(깨달음)요셉이 그 당시 어떤 삶을 살고 있었기에 형통한 자, 성공한 자라고 평가하는 겁니까?
야곱의 12아들 가운데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형들의 죄악을 낱낱이 일러 바친 자였습니다.
그 때문에 아버지가 채색옷을 지어줬는데 17살 요셉이 그 옷을 입고 양을 치러간 형들의 안부를 묻고자 갔죠.
시기심 가득한 형들은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하면서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가 미디안 상단에 팔아넘기죠.
그때 요셉은 애굽의 보디발 집에 노예로 들어가서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 환경은 요셉에게 결코 시냇가가 물가에 심은 나무가 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오히려 광야와 같은 척박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요셉을 향해 성경은 ‘형통한 자’ 곧 ‘성공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국무총리가 된 것도 아니고 온갖 허드렛 일을 하고 있는 그 상황인데도 말입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답답한 상황속에서도 하나님만을 자기 삶의 유일한 소망이요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향해 돌진할 때 그 후에 옥살이 과정을 통해 국무총리로 세워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야곱이 12아들을 축복할 때 요셉에게 ‘샘 곁의 무성한 가지’(창49:22)라고 축복한 것입니다.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오늘 본문의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그 결은 의미 아니겠습니까?
요셉은 삶이 흔들릴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해서 돌진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비록 낯선 애굽 땅에 옮겨 심겨진 나무와 같았지만 그곳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때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시냇가의 심은 나무로, 샘 곁의 무성한 가지로 형통케 하시고 성공케 하신 것입니다.
(원성)그래서 예레미야 17장 5-8절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17:5-8)
(깨달음)예레미야 선지자도 이스라엘 백성이 머잖아 바벨론에 멸망할 것을 환상 가운데 내다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애굽이라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바벨론에 항복하여 하나님께 바로 서도록 촉구한 예언자였죠.
하지만 왕도 백성들도 하나님께 돌진하기보다 애굽이라는 육신의 팔을 의지하다가 결국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만 것이죠.
바로 그것을 내다본 예레미야가 예언한 말씀이 그것입니다.
악인들의 꾀를 좇고 죄인의 길에 들어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하는 애굽이라는 육신의 팔을 힘으로 삼는 자들은 광야에 심겨질 나무와 같을 것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오직 하나님을 향해 돌진하며 신뢰하는 인생은 복을 받을 것이요, 그 사람은 물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뿌리를 뻗고 더위 속에서도 그 잎이 청청하여 가뭄 때도 결실이 그치지 않을 거라고 말이죠.
오늘 본문의 말씀과 정확히 일치하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척박한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돌진하고 신뢰할 때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고 형통케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렇기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그발 강가의 관개수로를 만드는 노예로 투입됐을 때 얼마나 비참하고 한탄했겠는갸?”
“그 속에서 모세 할아버지때 함께 하신 하나님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홍해를 가르신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들을 해방시켜주길 얼마나 갈망하고 탄식했겠느냐?”
“그런 그들에게 에스라가 나서서 모세와 여호수아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역하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찬양하고 묵상하도록 시편을 엮어 만든 것 아니었더냐?”
“그때 그들은 우리를 이곳 바벨론의 강가로 옮겨 심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죄악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해 돌진할 때 형통케 되는 길을 여시는 분임을 깨닫지 않았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요셉이 노예로 팔려 애굽 땅의 보디발 집에 옮겨 심겨졌을 때도 오직 하나님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 형통이듯이 너도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이라는 사람의 팔을 의지하다가 멸망당했지만 그들이 다시금 하나님을 향해 돌진하도록 바벨론 그발 강가에 옮겨 심은 것 아니겠느냐?”
“네가 지금 살아가는 삶이 요셉처럼 종살이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관개수로 현장에 투입된 상황 같아도 오직 하나님을 향해 돌진하고 정조준할 때 하나님께서 네 삶을 형통케 하시고 성공케 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네가 목표 삼아야 할 것은 세상의 형통과 성공 이전에 너의 구원자요 너의 창조자요 네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향해 돌진하고 그 분의 말씀을 정조준하는 삶 말이다.”
“그것이 지금 당장은 막혀 있고 답답할지라도 담장 너머로 뻗은 요셉처럼 네 인생과 네 자녀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시는 것 아니겠느냐?”
(찬양)너는 담장 너머로 뻗은 나무 가지에 푸른 열매처럼
하나님의 귀한 축복이 삶에 가득히 넘쳐 날거야
너는 어떤 시련이 와도 능히 이겨낼 강한 팔이 있어
전능 하신 하나님께서 너와 언제나 함께 하시니
너는 하나님의 사람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
나는 널 위해 기도하며 네 길을 축복 할거야
너는 하나님의 선물 사랑스런 하나님의 열매
주의 품에 꽃피운 나무가 되어줘
(성화)시편 63편은 시편 3편처럼 다윗의 일생 중에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쓴 시입니다.
권력에 눈이 먼 아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 목에 칼을 겨누고 왕궁으로 쳐들어오는 패륜이 일어난 것이죠.
아버지 입장에서 아들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달려오는데 이보다 더 절박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8년 전에 아들 압살롬이 이복 형 암논을 죽인 것도 벌하지 않고 눈감아줬고 그술 땅에 도망쳐 있던 그를 왕궁으로 데려와 아들처럼 대해줬는데, 그런 아들이 아버지의 은덕도 모른 채 칼을 겨눈다면 누가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불교의 법륜스님처럼 종교를 초월해서 멋진 강연을 하는 분으로 소문 난 가톨릭교회의 신부가 있는데 황창연 신부가 그분입니다.
그 분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늙어도 자식들에게 버림받지 않으려면 돈을 다 줘서는 안 된다고 말이죠.
미국에서는 자식들 대학도 자식들이 벌어서 다니고 결혼때도 2,700만원 정도만 지원한다고 하죠.
우리나라는 대학도 집도 결혼도 지원하는데 결혼식때도 평균 2억 7천만원을 지원한다고 합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늙어서는 남는 돈 자식들에게 주면 그때부터 버림받게 되니까 절대로 조금씩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자식이 부모 귀한 줄 안다는 것이죠.
다윗이 압살롬에게 간 쓸개 다 빼 줄 것 빼 줬는데, 늙은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쳐들어오니, 얼마나 억울하고 분했겠습니까?
그런데 63편 1절을 통해 다윗이 그렇게 읊조립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깨달음)여기에 ‘갈망하다’ ‘앙모하다’는 말은 ‘힘을 다해 애타게 찾는다’는 뜻입니다.
광야로 도망치는 그곳에서 다윗은 육신적인 필요를 위해 채워달라고 간구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갈망한다’고 ‘내 육체가 주님을 앙모한다’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요 영혼의 앙모함입니다.
오늘 본문의 ‘형통하다’ ‘젤라흐’와 같이 하나님을 향해 돌진하고 정조준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죠.
요셉이 노예 상황속에서도 오직 하나님과 함께 하심을 바라며 돌진하고 정조준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갈망함으로 그런 앙모함으로 도망칠 때 하나님을 향해 돌진하고 정조준했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압살롬도 압살롬과 함께 한 무리들도 다 죽고 다시금 왕궁으로 복귀하는 은혜를 다윗에게 베풀어주신 것이었죠.
(내기도)그렇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 하나님을 향해 갈망하고 앙망하는 심령, 하나님을 향해 돌진하고 정조준하는 심령 상태를 놓치지 않겠습니다.”
“자식에게 간과 쓸개를 빼주면서 사랑으로 품었는데도 압살롬이 칼을 겨누고 쳐들어올 때 아버지 다윗이 얼마나 처량했겠습니까?”
“내 가정에 그런 상황이 닥쳐올 때 자식들에게 기댈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향해 돌진하고 정조준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내 인생에 요셉과 같은 억울한 상황이 몰려와도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이 형통케 되는 삶이요 성공케 하시는 삶인 줄 믿습니다.”
“바벨론에 끌려가 그발 강가에서 심겨진 이스라엘 백성이 일할 때나 휴식하며 노래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돌진하고 앙망할 때 그들의 삶이 회복되고 후손에게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셨네요.”
“내가 기쁠 때나 슬플 때 좋을 때나 힘들 때도 오직 하나님을 향해 돌진하고 바라볼 때 형통케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찬양)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자녀 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를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를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주만 바라볼지라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곳은 하나님께 나를 그곳에 필요하시기에 심은 나무와 같은 줄 믿습니다.
비록 그 환경이 척박한 광야 같아도, 혹은 바벨론 포로의 그발 강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돌진하고 정조준하며 하나님을 갈망하고 앙망하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만 바라게 하시고 하나님께 돌진하며 정조준하는 그 삶이 형통한 삶이요 그것이 성공케 하시는 은총이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물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담장너머로 뻗은 나무처럼, 그런 형통의 복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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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요20:19-23)_2024년 4월 21일 부활후세번째주일설교 (1) | 2024.0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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