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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멸망 직전의 소돔 성은 너무나도 평온했습니다.
마치 홍수로 심판하기 직전의 세상과 똑같았습니다.
그 소돔 성읍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두 딸 그리고 사위도 함께 살고 있었죠.
그런 소돔 땅에 누가 들어갑니까?
하나님께서 보낸 두 천사 사람의 모습을 하고 들어가죠.
그때 롯은 자기 집에 온 나그네를 아브라함처럼 극진하게 대접하지 못한 채 형식만 갖춰 대접을 했죠.
문제는 그 집에 들어간 두 천사 곧 두 사람을 본 그 성읍 사람들이 보인 행패였죠.
그들은 롯의 집에 들어간 나그네가 있은 줄 알고 그 집의 대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유인 즉 그 나그네들을 상관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동성애를 즐기겠다는 것이요 그것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그런 물결에 취해 살고 있었던 것이죠.
(깨달음)그러나 그것은 소돔 성읍 사람들이 보인 죄악의 단면입니다.
더 큰 죄악은 나그네를 긍휼히 여기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극진히 대접한 창세기 18장의 모습과 달리 창세기 19장에서 롯의 대접을 통해 알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롯이 아브라함과 같이 있던 헤브론을 떠나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 땅 소돔 성읍에 동화된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소돔 성읍의 사람들 모두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 대해서는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갖고 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성읍 사람들은 나그네가 왔을 때 마음대로 짓밟아도 되는 양 그들을 상관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에스겔 16장에서도 소돔 성읍의 사람들이 보인 죄악은 동성애보다도 가난한 자에 대한 긍휼이 없다는 걸 밝혀주고 있습니다.
(적용)중요한 것은 이런 모습이 오늘날의 세상 사람들에게도 만연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다스리는 세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마음 먹기에 다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고 그래서 하나님을 믿느니 자기 힘과 능력을 믿고 살겠다는 것 말이죠.
그러나 그렇게 100세 안팎의 삶을 산다할지라도 그것이 끝이 아님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5:3)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이 세상이 평온한 것 같고 100세 안팎의 수명을 누리는 것 같아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떵떵거리고 모든 것을 쥐락펴락할지라도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이죠.
지금 알곡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서 모든 게 알곡처럼 보이지만 추수때에는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금은 모두가 동일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심판 날에 천국과 지옥으로 갈릴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노아의 홍수 심판의 때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심판이요 소돔 성읍의 심판도 그와 같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저와 여러분들은 이 땅 위에 사는 날 동안 악인의 길을 좇는 자가 아니라 복된 자의 길을 좇아 사시길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채 애굽이라는 사람의 팔을 의지하다가 결국 바벨론 제국에게 멸망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1차와 2차와 3차에 걸쳐서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갔죠.
그들은 바벨론의 그발 강가 옆에서 관개수로를 놓는 노예로 투입되어 일했습니다.
그때 바벨론의 감독관들은 그들이 쉬는 시간이면 수금으로 가지고 예루살렘 땅에서 불렀던 노래를 불렀지만 입천장에 다라 붙어 노래가 나오지 않기를 바랐죠.
나라 잃고 전답을 잃고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노예로 살아가는 게 너무나도 비참한 삶이었기 때문에 흥이 나올 수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그때 그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하나님의 행하신 역사와 능력을 되새김질하도록 한 선지자요 제사장이 있었죠.
바로 에스라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다가가 비록 성전도 잃고 제사장도 없고 찬양대도 없지만 우리가 이 상황에서 돌아가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라고 생각한 것이었죠.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선조와 함께 하신 역사를 떠올리며 율법의 말씀을 소리내서 읊조리며 찬양토록 했습니다.
그때 그 백성들은 그 율법의 말씀 앞에 자신들의 죄악을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탄식하며 기도했던 것이죠.
바로 그런 배경 속에서 나온 게 시편의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로부터 70년 뒤에 하나님께서는 포로로 끌려간 유다 민족을 다시금 고국 땅에 돌아와 살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때 에스라는 그 민족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포로기 때 읋조렸던 시편들을 모아서 엮었는데 그것이 150편으로 구성된 시편의 말씀입니다.
그 중에 에스라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말씀을 좇아 복된 인생을 살도록 시편 1편 말씀을 맨 앞에 둔 것이었죠.
(전개)우리가 3주 동안 살펴본 말씀의 핵심이 무엇이었습니까?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정조준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어서지 않고 남을 짓밟는 자리에 앉지 않는 자라고 말이죠.
나를 아는 사람이 1+1은 2가 아니라 10이요 100이요 1,000이 될 수 있다고 유혹해도 거기에 넘어가지 않는 자라고 말이죠.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가는 자들이 복 있는 자라고 말입니다.
그런 복있는 사람의 특징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말 ‘묵상하다’는 히브리어 ‘하가’는 소리내서 읊조리는 것이라고 했죠.
침묵이나 명상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내 심령에 울리고 들리도록 소리내서 읽을 때 살아계신 말씀이 나의 삶 가운데도 역사하신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주야로 곧 Day and Night 낮과 밤의 때분만 아니라 기쁠 때나 슬플때나 좋을때나 힘들 때 그 모든 상황의 때에도 묵상하는 자가 복있는 자라고 했죠.
그런 자에게 하나님께서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사시사철 열매를 맺고 형통케 하는 복을 내려주신다고 했습니다.
그 시냇가란 자연적인 계곡이나 냇가를 말하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간 유다 백성들이 관개수로를 놓듯이 그런 운하와 같은 시냇가를 말한다고 했죠.
그런 시냇가의 나무들은 때마다 열매를 맺되 풍성한 열매를 맺고 형통의 복을 부어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형통’이란 히브리어의 의미는 ‘돌진하다’는 뜻으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 애굽의 보디발의 노예로 살 때도 형통했던 이유가 그것이었죠.
아무 것도 기대거나 의지할 게 없는 노예였기에 그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나아갔던 것이죠.
그 믿음의 길 위에 하나님께서는 형통케 하셨고 그 과정을 거쳐 애굽의 국무총리로 사용하시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었죠.
그것이 바로 야곱이 12아들의 미래를 축복할 때 ‘담장너머로 뻗은 삶’의 형통이 된 것이었습니다.
(깨달음)그렇기에 지금 내가 걷는 이 길이 굽이 도는 것 같아도 희뿌연 안개가 끼어 있어 제대로 가는지 알 수 없어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고 내가 생명을 얻고 풍성케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돌진하라는 것이죠.
그때 설령 지금 막히고 두렵고 막막해도 그 길 위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의 길을 열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70년 포로생활로 끝내고 역사속에서 사라질 것 같은 유대 민족도 그 시냇가에서 다시 믿음의 뿌리를 내리게 하시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셨다가 그들을 포로에서 돌아와 새 길을 열어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그 하나님만 신뢰하고 그 하나님만을 향해 돌진하는 형통의 사람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본문)오늘 본문 4절을 집중해서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원해)여기에 ‘악인들’의 히브리어는 ‘라싸’(רָשָׁע)로 1절에 나오는 ‘악인들’과 같은 단어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소돔의 조카 롯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합니까’ 하고 기도하죠.
소돔 성의 악인이란 동성애자들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 대해 긍휼을 품지 않는 사람(창8:23, 겔16:48)을 가리킵니다.
출애굽기에도 악인이란 말이 나오는데 바로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할 때 스스로를 악인(출9:27)이라고 칭한 바 있습니다.
또 출애굽기에 보면 거짓말을 퍼트리고 위증하는 사람을 가리켜 악인(출23:1)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민수기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당을 지어 하나님 뜻에 반기드는 이들을 악인(민16:26)이라고 말합니다.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채 사는 사람을 악인(시9:17)이라고 칭합니다.
(깨달음)그렇기에 성경에서 말하는 악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살인죄를 저지르고 거짓을 일삼고 위증하며 속이는 사람도 악인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은 이방 백성들 곧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하죠.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 가운데도 악인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가난한 사람에 대해 긍휼을 품지 않는 사람, 가난한 사람과 먹을 것을 나누지 않는 사람이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불순종하여 당을 짓고 자기 고집으로 사는 자를 악인이라고 칭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잘 살아가는데 그것이 자기 공로인 양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는 크리스천이 악인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은 악인의 길이 아니라 복있는 자의 길을 좇아 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원해2)그 악인은 궁극적을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하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겨’란 히브리어로 ‘모쯔’(מֹץ)인데 ‘겨’(chaff) ‘티끌’ ‘쭉정이’를 칭하는 말입니다.
또한 죽은 식물 곧 바람에 휩쓸려가는 ‘지푸라기’ 같은 것입니다.
(깨달음)이 악인들을 바람에 날리는 겨로 묘사한 것은 3절에 의인들이 관개수로에 심겨 뿌리를 단단히 내린 모습과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뿌리를 내릴 게 없으므로 바람이 불면 곡식 낱알 껍질처럼 바람에 이리저리 무기력하게 휘날리고 밟히게 되죠.
그런 겨나 쭉정이나 지푸라기들은 추수 때 모아서 불사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원성)마태복음 3장 12절에도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2)
(원성2)마태복음 13장 30절에도 주님께서 친히 비유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깨달음)추수 때에 가라지 곧 쭉정이와 같은 것들은 모아다가 불사르고 알곡은 모아 곳간에 넣어두게 하신다는 것이죠.
주님께서 셈하시는 날에 주님께 인정받는 자들에게는 상급으로 셈하시지만 악인들은 심판의 영벌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종은 그 전에 가라지를 뽑기 바라지만 주님께서는 추수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렇게 상급을 주고 심판하겠다는 것이죠.
그러니 지금은 다 그렇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같아 보이지 않겠습니까?
때로는 거짓말하고 위증하고 남을 속이는 사람들이 더 잘 되는 것 같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말씀에 순종하기보다 자기 고집대로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난한 자에 대한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것보다 자기 개인적인 이득만 추구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주님 재림의 날 곧 백보좌 심판의 날에 그 마지막은 완전히 엇갈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으로 심판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이 아니라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철을 따라 열매맺고 형통케 되는 은혜의 주인공으로 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이 아니라 시냇가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고 형통케 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친히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멸망 직전의 소돔 성에는 하나님을 아는 롯도 있고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그 성읍 백성들도 살고 있지 않았더냐?”
“그 성읍 사람들은 마치 노아의 홍수심판 전에 다들 장가가고 시집가고 평온한 일상을 맞이하듯 살아가지 않았더냐?”
“그러나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해산의 고통이 따르듯이 소돔 성읍의 심판이 불현 듯 닥쳐온 걸 너는 알고 있지 않느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무슨 심판이 있냐고 그래서 자기 욕심대로 자기 이기적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악인들은 불의와 거짓과 위증을 하며 살면서도 그것이 악인 줄 모르고 사는 악인들이 얼마나 많이 있느냐?”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 가운데도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고집대로만 살고 말씀 앞에 불순종하는 그런 악인도 많이 있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 내 사랑하는 아들아.”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 이후에는 영생의 상급과 영벌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악인들의 삶이 지금은 다 똑같아 보여도 주님의 심판의 날에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이 땅에 살아 있는 날 동안 복된 인생 형통한 인생을 살고자 한다면 악인과는 반대되는 의인의 삶을 좇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무한신뢰하고 너의 고집보다 말씀에 순종하고 너에게 있는 것을 연약한 자와 나누며 살아가는 그 삶을 말이다.”
“그때 너의 삶도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따라 열매맺고 풍성케 하실 것이고 형통케 되는 인생의 과정을 맞이하게 하지 않겠느냐?”
(찬양)내가 걷는 이 길이 혹 굽어도는 수가 있어도 내 심장이 울렁이고 가슴 아파도
내 마음속으로 여전히 기뻐하는 까닭은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심일세
내가 세운 계획이 혹 빗나갈지 모르며 나의 희망 덧없이 스러질 수 있지만
나 여전히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까닭은 주께서 내가 가야 할 길을 잘 아심일세
어두운 밤 어둠이 깊어 날이 다시는 밝지 않을 것 같아 보여도
내 신앙 부여잡고 주님께 모든 것 맡기리니 하나님을 내가 믿음일세
지금은 내가 볼 수 없는 것 너무 많아서 너무 멀리 가물가물 어른거려도
운명이여 오라 나 두려워 아니하리 만사를 주님께 내어 맡기리
차츰차츰 안개는 걷히고 하나님 지으신 빛이 뚜렷이 보이리라
가는 길이 온통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차츰차츰 안개는 걷히고 하나님 지으신 빛이 뚜렷이 보이리라
가는 길이 온통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예화)미국 체로키 인디언들에게는 ‘두 마리의 늑대 이야기’라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고 합니다.
어느 저녁, 할아버지가 모닥불 앞에 어린 손주들을 앉혀놓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얘야. 우리 마음 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살고 있어.”
“이 두 마리 늑대는 항상 서로 뒤엉켜 싸우고 있단다.”
“검은 늑대는 악이야. 화, 질투, 슬픔, 후회, 탐욕, 오만, 자기 연미, 죄책감, 열등감, 거짓말, 헛된 자존심, 우월감, 그리고 자아란다.”
“흰 늑대는 선함이야. 기쁨, 평화, 사랑, 희망, 평온, 친절, 자비, 공감, 너그러움, 진실, 연민 그리고 믿음이야.”
“이 두 마리 늑대가 늘 너의 마음 속에서 뒤엉켜 너의 마음을 차지하려고 싸우고 있어.”
“얘야. 이 검은 늑대와 흰 늑대 중에 어떤 늑대가 이길 것 같니?”
그 질문 앞에 어린 손주들은 고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되묻는다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도대체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이제부터 너희들이 먹이를 많이 주는 놈이 이길 거야.”
(깨달음)부르는 이름만 다를뿐 그 두 마리 늑대와 같은 두 마음이 내 안에도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심령에도 복있는 자의 삶을 좇아가려는 마음과 악인의 삶을 좇아가려는 두 마음 말입니다.
(적용)이것은 사도 바울도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영적으로 씨름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19-24)
우리 안에 늘 선을 좇고 복있는 자의 삶을 좇고 싶은 마음과 악을 좇아 살고 싶은 마음이 늘 갈등하며 다툽니다.
실은 그것은 평생에 걸쳐 내 안에서 다투는 영적인 싸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내게 감동하실 때 내가 순종하고 싶어도 내 자아가 불쑥불쑥 솟아올라 갈등하는 부분이 왜 없겠습니까?
내 목숨도 주님의 것이요 내 재물도 내 모든 것들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면서도 정작 십일조만이라도 드리고 싶은데 그것이 너무 커보여 갈등하는 부분이 왜 없겠습니까?
나에게도 물질의 여유가 없는데 혹여라도 누군가 내게 작은 것이라도 원하면 자비를 베풀고 싶지만 그것마저도 아까워하는 마음이 왜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때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복되고 형통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것이 종말의 날에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이 아니라 상급을 받는 인생이 되는 비결이죠.
(예화2)배우 최민수가 신혼살림 때 형편이 어려운 친구와 같이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어느날 통장까지 다 들고 도망을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친구라서 신고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날 한 번 연락이 왔다고 하죠.
최민수는 그가 친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잘 전화했다. 마지막이길 바란다. 안타깝다. 평생 더 가져갈 게 많았을텐데 그거밖에 안돼서.”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최민수와 평생 친구로 동고동락했다면 그 은덕을 입고 평생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살텐데 그렇지 못해서 안타깝다는 뜻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감사 안에 거하면 오늘 누리는 것들이 겨우 그것뿐이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과 감동 앞에 모른 척 입을 닫아버린 채 산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도둑질하는 것이요 악인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고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자에게 결코 입을 닦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하나님께서도 존중히 여겨주시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복되게 하는 분(삼상2:30)이십니다.
그런 자의 삶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이 아니라 복있는 자의 삶으로 형통케 하는 은혜를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최민수의 친구처럼 작은 것에 눈이 멀이 평생 큰 것을 놓치고 사는 어리석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게 해 주세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감동과 감화를 주실 때 내 안에 검은 늑대와 흰늑대, 불순종의 영과 순종의 영이 다툴 때 순종의 영에 순종하여 복되고 형통케 되는 자녀로 살게 해 주세요.”
“그 위대한 바울도 선을 행하고 싶지만 원하지 않는 악이 도사리고 영적으로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내 안에도 순간순간 순종의 영과 불순종의 영이 다툴 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에 순종하여 복된 인생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찬양)주님것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며 살아왔네 금은보화 자녀들까지 주님것을 내 것 이라고
아버지여 철 없는 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맡긴 사명 맡긴 재물을 주를 위해 쓰렵니다
천한 이 몸 내것이라고 주의 일을 멀리 했네 주신 이도 주님이시요 쓰신이도 주님이라
아버지여 불충한 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세상 유혹 다 멀리하고 주의 일만 하렵니다
주님 사랑 받기만 하고 감사할줄 몰랐었네 주님 말씀 듣기만하고 실행하지 못했었네
아버지여 연약한 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 명령 순종하면서 주를 위해 살렵니다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그 마음에 모시지 않는 자들은 다 악한 자들입니다.
그런 자가 아무리 떵떵거리고 세상을 주름잡는 것 같아도 종국에는 바람에 나는 겨처럼 심판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그 자녀들 중에도 악인들이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감동을 주셔도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잘 살게 하셨는데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며 사는 자녀들이죠.
하나님의 자녀들 곁에 가난한 자를 붙여 베풀도록 하셨는데 소돔성 사람들처럼 혼자만 먹고사는 자들이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누구보다도 복된 인생 형통한 인생을 사는 걸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작은 것을 움켜쥐려하다 큰 것을 놓쳐버리는 최민수의 친구처럼 어리석은 악인이 없기를 바라시는 분이시죠.
오직 말씀을 소리내서 묵상하고 불순종의 마음과 순종의 마음이 다툴 때 순종하는 자녀들에게 복되고 형통케 되는 은혜를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심판의 날에 영벌의 심판이 아니라 영생의 상급을 받는 복된 인생이 될 줄 믿습니다.
그런 은총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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