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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키우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중학생 무렵에 알게 됐습니다. 중3에서 초6학년까지 세 자녀를 보면서 사춘기가 빨리 오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도 가끔씩 질문을 하는데, 난처한 질문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어려운 것은 관념적인 단어를 물어보는 경우입니다. 제가 이해하고 있는 수준에서 아무리 쉽게 설명해줘도 아이의 입장에서는 어려울 때가 많겠죠. 왜냐하면 아이들이 경험할 수 있는 차원에서 이해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도 자신의 경험 속에서 뭔가를 이해한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인식차원을 벗어나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죠.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하심도 마찬가지라는 점입니다. 여태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부활의 세계, 주님께서 죽으신지 사흘 만에 동굴 무덤을 열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 그들의 경험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인식의 차원을 더 크게 열어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본문 1-3절입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안식 후 첫날 새벽, 곧 주일날 그 새벽에 ‘이 여자들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을 찾았습니다. 여기에서 ‘이 여자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요한복음 20장 1절에서는 유독 “막달라 마리아” 한 여인만 주님의 동굴 무덤을 찾은 것으로 기록이 돼 있고, 마가나 마태나 본문의 누가는 적어도 2-3명의 여인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28장 1절에서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주님의 무덤을 찾은 것으로, 또 마가복음 16장 1절에서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것으로 기록이 돼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이 여자들”이란 적어도 그 세 명의 여자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욱이 오늘 본문 10절에는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라고 증언해 줍니다. 그래서 이 여자들이란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요안나,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여자들, 적어도 세 명 이상임을 알 수 있가 있습니다.
그 여자들이 이른 새벽 주일 아침에 주님의 무덤을 찾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안식일이 가까워지니까 혹시라도 주님의 시신을 염하고 향료를 뿌리며 예를 갖추는데 혹시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다시금 더 향료를 뿌려드리기 위함이었죠.
그런데 어떤 광경이 그들 앞에 펼쳐져 있었습니까? 동굴 무덤의 문은 열려 있었고, 그 안의 시신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야말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들의 모습 아니었겠습니까? 그때 빈 무덤 안에 있던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죠. 본문 5-7절입니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 대”
천사 둘이 말하는 내용입니다. 어째서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으려고 하느냐는 말입니다. 그 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하고 말하죠.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그 분이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고 말입니다. 당신이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금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 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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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상황이 무엇을 생각하게 하는 말씀 같습니까? 기독교가 모름지기 ‘계시(啓示)의 종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는 점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여태까지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여태까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경우는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물론 죽은 과부의 아들을 예수님께서 살려내신 일도 있었고,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주님께서 살려내신 일도 있었고,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려내신 일도 있었죠. 그런 주님께서 살아나셨다고 하니, 그야말로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죠. 여태까지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계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경험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자신들의 이성과 논리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오직 성령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주실 때에 온전히 믿을 수 있다는 것 말이죠. 그것이 바로 계시입니다. 계시는 드러나 있으나 감추어져 있고, 감추어져 있으나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죠. 그래서 독해력을 지닌 이들은 누구든지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만 읽는다고 다 이해하고, 다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불어넣어 주셔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을 수 있도록 그 믿음을 열어주신 것, 그것이 바로 계시입니다.
오늘 본문의 여인들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던 여인들은 당시 결코 이해할 수 없었죠. 적어도 천사들이 주님의 그 말씀을 기억해 보라고 하시면서, 깨닫게 해 주실 때에 비로소 그들이 깨닫게 되어, 계시가 열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본문 8-9절, 11절입니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그 여자들이 천사들이 한 이야기 곧 하나님께서 계시를 열어 주신 것을 깨닫고서, 이제 사도들에게 말하러 간 것 아닙니까? 그랬더니 어떻게 합니까? 사도들은 그녀들이 하는 이야기를 허탄한 듯 들었다고, 그래서 믿지 않았다고 밝혀주죠.
왜죠? 당시 문화적으로 여자들과 아이들의 증언은 법정에서조차 효력이 발생하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그만큼 사도들의 입장에서는 유약한 여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다 믿을 수 없었을 것이죠. 더욱이 그녀들이 하는 이야기란 주님의 부활 이야기 아닙니까? 그 부활에 대해서 그녀들이 들었을 때 놀랐던 것처럼 지금 사도들도 그녀들이 하는 이야기에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들 역시 그런 일들을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설령 주님과 함께 경험해봤다 하더라도 특별한 경우였기 때문에, 다시 말해 일상화된 경험이 아니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제자들에게도 하나님께서 계시를 열어주셔야만 믿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어떻게 합니까? 본문 12절입니다.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베드로는 그녀들이 한 이야기를 믿지 않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 동굴 무덤을 찾아간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세마포만 놓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고,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갔다고 증언해 줍니다. 아직 베드로에게는 그런 계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입니다. 바꿔 말하면 아무에게나 계시가 열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그 믿음의 마음을 불어넣어주시는 게 아니듯이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섭리와 뜻 가운데서 계시와 믿음을 불어넣어주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우리에게 계시의 차원에서 열어 주신 부분이나, 믿음의 차원에서 믿음을 불어넣어주신 것은, 나의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요, 그렇기에 나의 계시나 나의 믿음의 부분을 결코 내 자랑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죠. 언제나 겸손하게 주님의 더 깊은 계시, 주님의 더 큰 믿음의 은혜를 부어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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