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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누가복음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23)

by 권또또 2024.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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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종말의 때, 주님의 재림의 때는 정확히 알 길이 업습니다. 그 날은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 곧 성부 하나님만 아신다(마24:36)고 기록돼 있죠. 하지만 어제 주님께서 하신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그 날이 점점 가까워지면 질수록 그 징조를 통해 분별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죠. 다만 그 날에 매몰된 채 시한부종말론자들처럼 이 땅의 현실을 내팽개치며 살 게 아니라, 주어진 일에 하루하루 성실을 다하면서, 그 초점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해야 한다고 했죠.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와 관련된 사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들’이 기록돼 있습니다. 본문 1-2절에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던 사람들이 누굽니까? 다름 아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었죠. 그들이 주님을 죽이려는 이유를 밝혀줍니다. 그것은 백성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죠.

과연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한다는 말씀을 요한복음 11장 47절-48절에서는 부연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무슨 말씀입니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백성들을 두려워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그 백성들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 백성들이 예수님을 너무나도 신뢰하고 의지하기 때문에 그를 메시아로 여기면 그 백성들이 민란을 꾸밀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그 틈을 타서 로마인들이 땅과 사람들을 약탈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게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현 시점의 소유와 기득권이었습니다. 민란으로 인해 그것들을 모두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걱정 말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물질과 세상의 것들에 위해 그들의 눈과 마음이 완전히 빼앗겨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집착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집착하면 눈과 귀를 잃게 됩니다. 집착은 어느 것 하나에 마음이 쏠려 계속 거기에만 매달리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죠. 그러니 집착하면 봐야 할 것을 정작 보지 못하게 되고, 들어야 할 것을 정작 듣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무엇에 집착하고 있었습니까? 물질과 세상 것들에 대해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바르게 보지 못했던 것이죠. 예수님께서 하신 진리의 말씀도, 구원의 말씀도, 영생의 말씀도 귀에 들려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눈과 귀가 완전히 막혀 버렸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악으로 연결된 것 아닙니까? 집착하면 그렇게 자신들의 인생과 영혼을 송두리째 잃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집착해야 할 대상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만 바라보며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좇는 사람들이여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 분이 이끄시는 인생좌표를 바라보며 말씀을 좇아 살아가는 인생이 복된 인생이죠. 그런 인생이 주님의 재림 앞에 깨어 있는 인생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 권성권 | 북팟- 교보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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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3절에는 물질과 세상의 것에 집착한 또 한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가 그 한 사람이죠. 그는 예수님의 12 제자중의 하나였습니다. 돈 궤를 맡을 정도로 주님과 제자들에게 신임이 두터웠습니다. 그랬던 그가 오늘 예수님을 팔아 넘기게 됩니다. 이유가 뭘까요? 처음 돈 궤를 맡았을 때만 해도 주님의 선교사역을 위해 청지기로서 바르게 사용했겠죠. 하지만 차츰 그 돈 궤를 자신의 사적인 목적을 위해 이용하면서부터,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고 하듯이, 결국에는 주님마저 팔아넘기는 파렴치한 인간이 되고 만 것입니다.

유다의 그런 모습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집착은 더 큰 집착을 낳는다’는 것이죠. 요한복음 12장 6절 하반절의 기록이 이렇습니다.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님을 팔아넘겼던 유다는 이미 돈 궤에서 돈을 훔쳐 개인적으로 유용하던, 돈에 집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집착은 더 큰 돈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고, 급기야는 죄 없으신 예수님을 범죄자로 내모는 음모에까지 가담케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작은 집착’은 이후 더 큰 ‘큰 집착’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탄은 그런 인간의 집착을 틈타 더 큰 죄를 심화시켜나간다는 사실입니다. 가롯 유다는 돈 궤로부터 돈을 훔쳐내 사용할 만큼 돈에 집착했는데, 사탄은 그런 그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집착을 통로로 삼아 그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불어넣었고(요13:2), 결국 실행토록 한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사탄은 그의 집착을 이용해서 더욱더 죄를 심화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이것은 2천년 전만 그런 게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 사탄은 끊임없이 배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 그 대상을 유심히 살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로 삼아 우리의 죄 성을 부추기고, 우리를 더 큰 죄악의 코너로 유도하고 몰아세운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와 같은 집착으로부터 정말로 자유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은혜를 매일매일 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나의 연약함을 주님앞에 고백하면서 말입니다. 나도 언제든지 가롯 유다로 빠져들 수 있고, 나도 언제든지 사탄의 그 유혹앞에 유도당할 수 있다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죠.

 

그렇듯 오늘 본문의 상반절은 물질과 세상에 집착하는 사람들과 그 집착을 악용하는 사탄의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후반부에는 어떤 내용이 기록돼 있을까요? 그런 집착의 상황 속에서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기록돼 있죠. 본문 7-8절입니다.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날이 이른지라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죽이려는 음모에도 불구하고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고 계시는 모습이죠. 그 일은 만찬의 식탁을 넘어 현실적인 고난, 곧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으로 이어지는 사건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본문 15절 말씀처럼,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이미 그 사실을 알고서 대처하시는 상황입니다.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권성권 - 교보문고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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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일은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계획과 관련이 있는 일이었습니다. 본문 16절에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 친히 유월절 어린 양이 돼셔서 대신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려주셔야만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바르게 집행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향한 죄 용서의 새 언약도 발효될 수 있다는 사실이죠.

결국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형틀로 그 발걸음을 내어 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초점을 맞추심으로 이 땅에 것들에 대한 집착, 생명에 대한 집착까지도 초월하실 수 있으셨기 때문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19절에 나를 기념하라, 다시 말해 “나를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떡을 나누는 성찬예식을 통해 우리 죄를 대신해 몸이 찢기신 주님을 기억하고, 잔을 나누는 성만찬 예전을 통해 우리 대신 피흘려주신 주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고난 받기를 자처한 채 세상 집착은 내려놓으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사탄의 궤계에도 능히 미혹당하지 않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야긴과 보아스 | 권성권 - 교보문고

야긴과 보아스 |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 이 책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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