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새벽묵상DewSermon/누가복음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10)

by 똑똑이채널 2024. 4. 14.
728x90
반응형
SMALL

누가복음 9장을 기점으로 예수님께서 이제 갈릴리의 가버나움을 거처로 삼으면서 펼치셨던 갈릴리의 사역을 접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0장에서 예루살렘에서 2km 떨어진 베다니의 마르다 집을 예수님께서 거처 삼아, 그곳에서 종종 예루살렘으로 선교여행을 다니셨고, 그러면서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또 많은 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이 오늘 읽은 누가복음 19장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여기에서 ‘여리고’란 구약성경에서는 달 모양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달’(moon)이란 이름 뜻이 있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향기로운 지역’을 의미하는 곳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각종 꿀과 장미와 향료품을 비롯해 종려나무가 많은 곳이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36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으로부터는 서쪽으로 8km 떨어진 곳입니다. 그 여리고에서 남쪽 아래로 11km 정도 내려오면 사해바다가 위치해 있죠. 이것을 지형상으로 보면 예루살렘은 산간 고원지대에 속하는 곳이고, 여리고는 그에 비해 1,000m 아래에 자리잡은 곳이고, 그 여리고보다 더 낮은 곳이 요단강인 셈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베다니의 마르다 집을 거처삼아 지내고 계시는데, 종종 예루살렘을 향해 선교여행을 다니셨죠. 그것이 누가복음 10장부터 18장까지, 그리고 오늘 19장까지 계속 그 여행을 다니고 계시는 중인데, 오늘은 베다니에서 서쪽으로 2km 떨어진 예루살렘이 아닌 그 베다니에서 34km 떨어진 여리고로 ‘내려가신’ 것이죠. 그것이 아니라면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사마리아 땅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오려고 했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 길목을 막고 있기 때문에 요단강을 따라 쭉 내려오시다가 여리고에 들러서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길인지도 모릅니다.

정확하게 그 순서는 알 길이 없지만, 중요한 것은 왜 그곳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바로 그곳의 삭개오를 만나기 위함 아닙니까? 더 정확하게 말해 삭개오 그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 여리고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누가복음 8장의 모습과 흡사해 보이는 일입니다.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실 때 그곳 가버나움에서 수많은 귀신들린 자들과 병자들을 고치신 이후에 주님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 데가볼리 지역으로 가신 것과 같죠. 그곳에 왜 가셨는가? 그곳에 군대귀신 들린 자, 곧 2천 마리나 되는 군대 귀신들린 자를 만나 그의 귀신을 좇아내고 고쳐주고 구원시켜 주기 위함이셨습니다. 오직 그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신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죠. 그곳의 삭개오를 만나 그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그런 자격이나 요건이 갖추어 있었습니까? 본문 2절에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삭개오 헬라식 이름으로 ‘자카리오스’(Ζακχαῖος)란 이름은 ‘순수함’(pure) ‘순진한’(innocent)이란 뜻입니다.

본래 그의 부모가 그렇게 순수함을 갖고 살기 원했고, 그도 방향으로 살기를 원했겠죠. 하지만 죄의 오염된 환경은 그를 그렇게 순수하게 놔두지 않았던 것이죠. 더욱이 그의 직업이 세리(tex collection) 곧 유대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둬 로마에 납부하고 나머지는 자기 주머니의 배를 채웠던 사람이죠. 그래서 그를 향해 ‘부자’라고 칭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 직업을 갖고 있었으니, 어떻게 그가 순수함을 간직하며 살 수 있었겠습니까? 자연스레 죄의 오염과 환경 속에 스며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60620580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권성권 - 교보문고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

product.kyobobook.co.kr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런 삭개오라 할지라도 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본문 3절에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이 상황을 놓고 보면 적어도 삭개오도 누가복음 18장 13절에 나오는 그 세리의 기도와 같은 심령의 소유자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고 있다고 남의 것을 토색 곧 속여서 빼앗은 것도 없고, 남에게 불의한 일도 하지 않았고, 간음도 하지 않았다면서 자기 행위의 의로움을 내세우면서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린 자였죠. 하지만 세리는 감히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삶이 얼마나 죄인된 삶인지 고백하면서 가슴을 치면서 기도하는 자였죠. 삭개오가 그 정도로 주님 앞에 기도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주님이 어떤 분인가 보고 싶어 했고, 키가 작은 탓에 사람들의 키에 가려서 주님을 볼 수 없다고 판단하여 돌무화과나무에가지 올라가서 보고자 했다면, 그 심령 속에 주님을 보고 싶어하는 간절한 열망 정도는 있지 않았겠나,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런 삭개오를 보신 주님, 그런 삭개오의 마음을 아신 주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본문 5절에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주님께서 그의 집에 들어가 머무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랬더니 그가 급히 내려와서 즐겁게 영접했다고 증언해 줍니다.

삭개오의 이런 마음과 모습을 보면, 그가 어떤 마음과 자세로 주님을 만나고 싶어했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저 단순한 호기심이 발동해서 주님을 보고 싶어한 게 아니라는 것이죠. ‘급히’, 그리고 ‘즐겁게 영접했다’는 것은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그 세리의 기도처럼, 삭개오도 그와 같은 세리와 같은 심정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물론 그런 모습을 바라 본 사람들은 수군거리지 않습니까? 다들 삭개오가 어떤 자인지, 어떻게 그가 부자가 됐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비난하죠. 어떻게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갈 수 있냐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집에 들어온 주님을 모실 때, 삭개오가 보인 반응을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8절에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자신이 여태 불의하게 모은 재물들, 그 소유들을 내 놓겠다는 것이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회개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삭개오를 향해, 그리고 그 집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아니 그 여리고의 온 동네 사람들에게, 오늘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죠.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잃어버린 자, 그 한 사람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그곳 여리고로 가셨다는 것이죠.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60619797

 

야긴과 보아스 | 권성권 - 교보문고

야긴과 보아스 |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 이 책에는

product.kyobobook.co.kr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두 가지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순수하게 살고 싶어도 죄의 오염된 환경속에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말이죠. 또 하나는 아무리 불의한 자요 토색한 자요 부자라 할지라도, 그래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는자라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그를 위해서 구원이 필요하다고 보신다는 점입니다.

언젠가 주일날 오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18세기의 청교도들을 알프스 산에 비유했고, 루터나 칼빈을 히말라야 산에 비유했는데,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에 대해서는 ‘히말라야의 14고봉 가운데 최고로 높은 에베레스트 산’으로 비유했다고 했죠. 그 정도로 에드워즈 목사님은 미국이 배출한 최고의 영적 거인인데, 그러나 그 분도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주님의 보혈로 의롭게 되었다 할지라도 주님의 은혜 속에 거하지 아니하면, “신분상으로 죄의 세력에서 벗어난 의로운 자녀가 되었을지라도, 여전이 죄의 오염된 상태에 놓여 있고, 죄의 공격에 넘어질 수 있다”고 말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신 주님을 보고 수군거리는 자들의 관점이 아니라, 내가 삭개오요, 내가 그토록 연약한 죄인입니다, 하는 관점 속에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살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그런 나를 구원코자 나를 찾아오셨다는 사실입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60619796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권성권 - 교보문고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product.kyobobook.co.kr

 

728x90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