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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먼저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과부가 등장하는데, 그녀는 재판장에게 가서 자기 원한을 풀어 달라고 간청을 하죠. 과부가 재판소를 찾아간 게 아니라, 개인 재판관을 찾아간 모습입니다. 이로 보아 재산상의 소송 문제 곧 금전 문제로 인해 과부가 그 재판관을 찾아갔지 않나 추측해 볼 수 있죠.
당시 과부는 불쌍하고 무력한 인간을 대표하는 계층으로 볼 수 있죠. 과부에게는 어떤 사회적 보장도 주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사회적인 냉대의 시선만 받을 뿐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아주 연약한 상태에 있던 과부가 재판장을 찾아갈 때는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좋은 판결을 받으면 좋고, 그렇지 못해도 그만인 심정이겠습니까? 아니죠. 반드시 해결받아야만 살 수 있는 문제였죠.
하지만 사람을 무시하고 거만하기 짝이 없는 재판장이 힘없는 과부의 호소를 들어 줄 리 만무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과부가 어떻게 합니까? 재판장을 찾아가 끊임없이 귀찮게 했던 것이죠. 그래서 그 재판장은 더는 그 과부로부터 괴로움을 당하기 싫어 그 과부의 청을 들어줬던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고, 7-8절을 통해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그리고 이어지는 비유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서 드리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였다’고 11절에 밝혀줍니다. 헬라어 원문의 의미는 그런 뜻입니다.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도록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자기 자신을 향하여 기도했다’ 하는 것 말이죠. 바리새인은 그만큼 의식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자, 자신의 자랑거리를 늘어놓고자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기도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 그의 입술에 ‘감사하나이다.’하고 11절 마지막 부분에 고백하는데, 그것이 진정한 감사의 고백이겠습니까?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는 자는 ‘나의 나된 것이 나의 힘이 아닌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인정하는 자죠. 그러나 바리새인의 ‘감사’에는 그런 믿음과 감사의 고백이 깃들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바리새인의 기도와는 완전 대조적이죠. 세리는 로마를 위해 세금을 착복하는 불의한 자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지탄을 받는 자들이고, 그래서 감히 성전에서 고개를 들 수조차 없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이죠. 그래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기도란 어떤 기도이겠습니까? 내가 왜 이렇게 밖에 살지 못하는가? 자기 가슴을 치며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결론을 14절에서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이 증언하는 세 번째 비유의 내용은 15-17절 말씀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어린 아기를 만져 주심을 바라며 그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비정하게도 그런 사람들을 막고 꾸짖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16-17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라고,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국은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자들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상이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들이 세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실은 한 주제를 향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죠. 이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세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죠.
첫 번째 살펴본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 이야기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깨워주고자 하시는 핵심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분명코 불의한 재판관과 대조되시는 분이라는 것, 그 분은 불의한 재판관이 귀찮아서 과부의 청을 들어줄지 모르지만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겪고 있는 작은 신음에도 친히 응답하시고 격려해주시는 자비의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들의 자녀들이 간구하고 매달릴 때, 귀찮아서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죠. 그분은 우리의 작은 신음조차 친히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십니다. 그 고통을 함께 짊어지기를 원하시는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재의 필요를 채워주시되, 궁극적으로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그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붙들며 항상 기도하되 낙심하지 말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런 자의 모습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진정한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두 번째 이야기인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바리새인과 세리를 대조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의 모습이 어떤 자인지를 일깨워 주십니다. 스스로 의인인 체 하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세리처럼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한시도 살수 없는 무기력한 자임을 고백하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다는 말씀이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그래서 더더욱 주님 앞에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세 번째 이야기는 무슨 깨우침을 주십니까? 어린 아이들이 주님께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어른들처럼 계산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버리고, 순수하고 전적으로 의탁하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온전히 받들어 사는 자를 하나님께서 기뻐신다고 말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그 분의 초림을 통해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의 통치가 성취될 때 진정을 하늘나라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궁극적이지 않은 세상의 가치관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주님의 뜻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나라가 임하는 그때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완벽한 나라가 임할 것이기 대문이죠. 그래서 세상의 사고와 관점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그 놀라운 반전의 역사들을 너무나도 미약한 우리 자신을 통해서 써 내려가길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그런 은혜의 하루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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