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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13장과 14장에는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나병환자들에 대해 다룹니다. 나병 환자들은 일반 사람들과 함께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과 마주칠 때는 돌을 던질만큼의 거리 곧 20m 정도 떨어져서 손으로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하고 외쳐야만 했죠. 지금은 병의 원인과 치료방법들이 발견되었지만, 그 옛날 유대 사회에서는 저주의 징표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은 베다니 마르다의 집을 거처삼아 예루살렘의 선교여행 중에 계신 상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갈릴리 사이의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는 상황에 한 무리를 만나셨습니다. 바로 나병 환자들이었죠. 그 남루한 10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봤겠죠. 그러면서 20미터쯤 떨어진 거리에서 ‘부정하다 부정하다’하고 외쳤겠죠. 그러다가 주님을 알게 되어, 소리 높여 간청을 합니다. 본문 13절에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그들 모두가 소리를 친 것이죠. 우리 좀 불쌍히 여겨주시라 말입니다. 우리가 구걸하며 연명하고,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다고,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살아간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제발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말이죠.
그때 주님께서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절입니다.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누가복음의 다른 상황에서는 안수도 해 주시고, 만져주시면서 그 즉석에서 그들의 병을 고쳐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의 상황은 약간 다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명령만 하시는 상황입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들의 몸의 환부를 보이라고 말입니다.
레위기 14장에 의하면, 제사장은 나병 환자의 환부를 검사하고 정결 예식을 통해 그가 나았음을 선언하게 됩니다. 이 선언을 통해, 이전의 나병환자들이 정상적인 사회구성원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죠. 그런데 어떻습니까? 지금 예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그들은 완전히 나은 상태가 아닙니다. 그러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마치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 석상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그 집 하인들에게 물 항아리에 물을 가득 붓게 하셨다가, 그것을 떠다 주라고 하는 격과 같은 모습입니다. 아직 그 물이 포도주로 변하지 않았지만, 두 세 통 드는 그 항아리에 물을 가득 붓게 하신 뒤에, 이제 떠다 주라고 할 때, 그때 바로 그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10명의 문둥병 환자들도 마치 그런 상황입니다. 자신들을 향해서 명령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제사장에게 발걸음을 향해 옮기는데, 그렇게 가는 도중에 그들의 피부가 완전히 깨끗하게 된 것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제사장에게 가는 길목에 자신들의 피부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들 10명의 사람들은 서로서로 건강해진 몸을 확인했겠죠. 그리고 이제 대제사장에게 직접 자신들의 몸을 보여주면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희망을 얻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죠. 본문 15-16절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나음을 입은 10명의 사람 중에 한 명이 그 대열을 이탈해 예수께 돌아온 것입니다. 누가는 그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다’고 밝혀 줍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 백성들에게 개나 돼지처럼 짐승취급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남북왕조시대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혼혈정책을 맞이하게 되었죠. 앗수르 제국은 이방 남자들을 그곳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땅에 이스라엘 여자들과 더불어서 살게 만들었고, 또 이스라엘의 여자들은 이방 땅으로 시집 가서 살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강제적인 정책으로 행하게 한 것이었죠. 그러니 남유다 백성들은 북이스라엘을 향해 인종적으로 함께 할 수 없는 이방인이라고 단정을 해 버렸던 것이죠. 도저히 그들과 함께 예배도 드릴 수 없고, 함께 삶을 살아갈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어떻겠습니까? 사마리아에 살고 있는 순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만의 율법과 그들의 만의 예배처소를 만들었고, 그들만의 메시아를 또 기다리기 시작했죠.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12살 되던 해였습니다. 어느 야심한 밤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침입해서 성소 위 사람 뼈를 놓아두고 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죠. 그 모습을 바라본 유대 백성들은 분노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겠죠.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교도들보다도 더 악한 자들이라고 단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10명의 문둥병자 중에 누가 주님께 돌아와 감사의 예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죠. 예수님께 돌아온 사람은 오직 그 사마리아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왜일까요?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낫게 해 준 예수님이 고마운 분이셨고, 다른 9명의 사람들은 예수님보다 완치의 선언을 받게 해 줄 종교적인 제의의식이 한 시라도 급하다고 여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9명의 사람들은 종교적인 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요, 사마리아 사람은 오직 예수님의 은혜를 더욱더 바라봤던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 한 사람이 예수님께 먼저 나아왔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17-18절을 통해 말씀하시죠.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이 말씀만 뚝 떼어 놓고 보면 예수님이 화가 나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분명히 앞서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0명의 나병환자들에게 분명히 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들의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지금 왜 내게 돌아온 사람이 너 밖에 없느냐고, 질문하고 계십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그들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지 못하셨기 때문에 마음이 상하신 것일까요? 그토록 옹졸한 성품의 주님이라면, 어떻게 수치와 고통의 십자가를 짊어지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그렇게 질문하신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의 질문의 핵심은 제자들의 믿음에 대한 가르침에 대한 요청과 맞물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믿음도 바로 잡아 주시기 위함이셨던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지금 주님 앞에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을 통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을 바르게 가르쳐주기 위함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19절이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나병환자의 돌아옴과 감사의 고백은 믿음과 구원의 문제로 연결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두 가지 영적 교훈을 얻게 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영적 감각이 깨어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나병과 같은 영적인 질병을 앓고 있어도 전혀 무감각한 자가 아니라, 그런 영적인 질병 앞에 주님의 은혜를 통해 고침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말입니다. 그를 위해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가 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는 그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른 예배자가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배자입니다. 바른 예배자가 곧 바른 믿음의 사람이죠. 본문에 등장한 사마리아인은 바른 믿음의 소유자였다는 점입니다. 그런 마음과 자세로 주님을 온전히 경배하는 참된 예배자였다는 것이죠. 이 땅에 수많은 예배가 드려지고, 그런 예배자들의 모습을 보는데, 과연 오늘 나는 본문의 사마리아 사람처럼 온전히 주님만을 경배하고 주님만을 의지하며, 경배하는 자인가, 깊이 돌아보게 하는 사건입니다. 오늘도 바른 믿음과 바른 예배자로 주님 앞에 엎드리는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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