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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했다는 사실로 인해 유럽 사회에는 유대인 혐오심이 생겨났습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마저도 자신의 저술에서 유대인을 향해 매우 경멸하는 태도를 밝혔죠. 종교에서 비롯된 반유대주의 정서는 음악과 문학과 경제 영역에까지 다방면에 걸쳐 번져나갔습니다. 바그너나 멘델스존과 같이 유명한 음악가들도 유대인들을 혐오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희극인 「베니스의 상인」에도 유대인이 등장하는데, 주인공 샤일록은 악덕 고리대금업자입니다. 그 악덕 고리대금업자를 유대인으로 설정한 것입니다. 그만큼 그 당시의 유럽인들이 유대인들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존재로 여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유대사회에서 고리대금업은 부도덕한 일로 여겨졌을까요? 모세오경의 율법 때문입니다. “네가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 식물의 이자, 이자를 낼 만한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 것이라 타국인에게 네가 꾸어주면 이자를 받아도 되거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신23:19-20)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같은 동포 같은 민족을 대상으로 이자놀음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이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조항들은 유명무실해졌고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편법으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습니다. 율법에 명시된 대로 동족에게 이자를 받지 못하는 대신 문서에는 실제 액수가 아닌 이자를 포함한 액수를 명시한 것이죠. 곡물류는 20%, 기름은 50%, 금전은 25%의 이자를 더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이런 관례를 이해한다면 본문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5-7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에게 해고될 위기에 봉착한 청지기가 빚진 사람들을 일일이 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차용증서를 고쳐쓰게 한 모습입니다. 기름 100말은 50말로, 밀 100석은 80석으로 수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청지기는 빚진 사람들에게 이만큼 부풀려진 액수가 아니라 실제 빌린 액수를 차용증서에 쓰도록 한 것입니다. 이때 주인은 어떤 마음이 들었다고 증언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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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에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있게 하였음으로” 주인은 청지기가 행한 처신을 보고 지혜롭게 처리했다고 칭찬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청지기가 변제해준 액수는 주인이 편법적으로 모으려고 했던 액수였고, 청지기는 그런 주인의 불의한 부분을 되돌려 놓은 셈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9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주님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죠. 주님은 ‘재물’을 의미하는 헬라어 ‘맘모나스’(μαμωνᾶς) 앞에 ‘불의하다’고 하는 전제를 다셨습니다. 왜 그런 전제를 다신 것입니까?
여기에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있다고 해 보십시오. 이 만 원짜리 지폐는 만 원어치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 따름입니다. 여기에 ‘불의하다’는 의미를 붙이는 건 어떻게 보면 어불성설 아닙니까? 하지만 주님께서 ‘맘모나스’를 가리켜 ‘불의하다’는 전제를 붙이신 건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앞서 언급한 주인이 부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돈을 빌려줄 때 이자를 받는 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지만, 하나님은 동족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말입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재물을 가진 사람은 재물을 절실히 원하는 사람들에게 ‘슈퍼 갑’의 위치에 서게 되죠. 당장의 생존마저 위태로운 사람들은 높은 이자를 물고서라도 생계를 연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고리대금업을 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슈퍼 갑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비싼 이자로 돈을 빌려주더라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동족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고 율법에 명시하신 이유가 뭡니까? 돈을 빌리는 사람이나 빌려주는 사람이 돈으로 인해 고통과 불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주님께서 ‘맘모나스’를 ‘불의하다’고 하신 두 번째 이유는 뭐겠습니까? 돈이 지니고 있는 자체적인 속성 때문이죠. 만 원짜리 지폐는 만 원어치의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이것이 쌓이게 되면 돈은 ‘세력’을 지닌 존재로 변하게 되죠. 재물이 인간의 인격과 생명까지도 좌지우지하는 힘을 지니는 경우가 그렇죠. 가난하건 부요하건 돈 때문에 서로 척을 지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돈 때문에 존속살해가 횡행하고 돈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맘모나스’를 가리켜 ‘불의하다’는 전제를 다신 것입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인 우리 자신을 향한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본문 13절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경고하신 것이죠. 재물은 인격이 아닙니다. 재물은 선하거나 악하거나 하는 게 아니라 가치중립적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죠? 재물로 인해 누군가를 미워하고, 상처를 주고, 심지어 생명을 해치게 되는 게 바로 돈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불의한 재물이 되는 것이죠.
하지만 그 재물로 하나님 나라의 선한 사업을 위해 쓰고, 하나님께서 더욱더 채워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다면, 그보다 더 선한 재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재물이 어둠의 경로를 통해, 사람들의 인격과 생명까지도 위협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불의한 재물이라고 경계하게 하신 것이죠. 우리 주님은 그리스도인이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건 ‘돈’이 아니라 ‘사람’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9절 말씀을 다시금 새겨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불의한 청지기가 불의한 주인의 재물로 사람을 얻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돈을 사용하는 목적은 ‘사람’ 곧 ‘사람의 영혼’을 얻는 데 있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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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와 같은 본문 말씀을 통해 어떤 은혜를 깨닫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많든 적든 재물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있다는 사실이죠. 그 재물로 가장 지혜롭고 가장 가치 있게 사용하도록 말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생명을 얻는데, 생명을 건져내는데, 하늘 나라의 생명을 위해서 그 재물을 선용하도록 말입니다.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청지기임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청부, 선한 부자가 되셔서, 주님께 영혼을 인도할 수 있도록 재물을 사용할 수 있는, 재물의 은혜를 부어달라고 기도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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