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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누가복음

한 부자가 있어(눅16:16-31)

by 똑똑이채널 2024.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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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어제 불의한 청지기를 통해, 우리가 재물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지를 일깨워 주셨습니다. 본래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고리대금을 할 수 없도록 모세오경에 명시해 놓고 있는데, 그들은 그 법을 유명무실하게 해 왔습니다. 그들조차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하는 현실의 연약한 자들이었죠. 문제는 그 재물로 사람을 옥죄고 인격까지 짓밟고 생명을 앗아가는 불의한 제물로 변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래 물질이란 가치중립적인데, ‘불의한 재물’이라고 전제를 다셨던 것이죠. 그것으로 슈퍼 갑질을 하면서, 사람의 생명과 인격을 짓밟는 도구로 삼기 때문에 말입니다. 궁극적으로 주님께서 물질을 통해 우리에게 요구하신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많든 적든, 모든 사람에게 각자에게 맡은 재물을 맡겨 주셨는데, 그 재물로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사람의 영혼을 건져 올리는 도구로 사용하라는 것이었죠. 그를 위해 작은 재물을 선하게 쓰면 더 큰 물질도 맡기시는 것이고요.

 

오늘 읽은 본문 16-18절은 율법의 부가적인 가르침입니다. 16절에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여기에서 율법과 예언자는 요한의 때까지다, 하고 말씀하는데 그렇다면 율법과 예언자 곧 예언서는 세례요한의 때까지 해서 끝이란 말일까요? 사실 율법에는 제사법, 음식법, 도덕법, 시민법 등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사법, 곧 번제 소제 속건제 속죄제 화목제 등의 제사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통해 더 이상 그 형식을 지킬 필요는 없죠. 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뜻을 이어받아야 하죠. 그리고 음식법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해결이 되었습니다. 시민법은 유대인들 곧 이스라엘 백성들에 한해서 제한적으로 적용이 되고 있죠. 나머지 하나, 도덕법은 어떻겠습니까? 그 도덕법이 십계명이죠. 그것은 세례 요한 이후 지금까지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생명의 법이죠. 물론 그것을 문자적으로 혹은 의미적으로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죠.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 법을 두셔서 그 법 아래에 있는 연약한 인간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살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 19절부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실 누가복음 16장에는 두 개의 불의한 자에 대한 비유가 나오지 않습니까? 하나는 어제 살펴 본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요, 또 다른 하나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죠. 14-18절은 '부자와 나사로' 비유의 도입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바리새인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16장 14절에서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눅16:14)하셔서, 그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비웃었다고 증언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재물이 많은 부자와 가난한 거지’에 대한 비유를 통해, 우리가 소유한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다시금 일깨워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두 사람이 다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를 세 절로 짧게 다루고 있습니다. 19절-21절입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부자는 높은 신분과 부를 상징하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습니다. 그에 비해 나사로는 몸이 불편해서 스스로 걷지도 못한 채 남의 손에 의해 부자의 집 대문에 버려진 자죠. 그래서 부자의 잔치 상에서 떨어지는 빵부스러기로 배를 채운 거지였죠.

여기에서 부자가 자신의 재산을 불의하게 모았다거나, 날마다 연회를 열 때에 퇴폐적인 향연을 벌였다거나, 문간의 나사로를 학대했다는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그는 자기 소유로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을 초청해서 하객들과 함께 즐겼을 뿐입니다. 그리고 둘 다 죽었고 부자는 화려하게 장례식을 치렀지만 음부, 곧 지옥으로 갔고, 나사로는 장례식도 치르지 못했지만 천국에 갔습니다. 이 땅에서의 두 사람의 삶이 극명하게 달랐던 것처럼, 죽음 이후에도 두 사람의 상황이 완전 정반대의 모습으로 갈린 상황이죠. 죽은 후 나사로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조상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음부로 떨어져 처절한 고통 가운데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나사로를 바라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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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권성권 | 북팟- 교보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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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이 두 사람의 생전 모습과 사후의 모습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까? 첫째는, 부자는 생전에 자신이 소유한 재산을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사용한 것이죠. 자신의 쾌락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 말입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것이 악한 게 아니었습니다. 오직 자신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사용한 게 악한 것이었죠. 자신을 위해서는 애굽과 인도에서 수입한 최상의 베옷으로 감쌌지만, 문 앞에 참혹하게 누운 거지에게는 조금도 긍휼의 마음으로 대하지 않았던 것, 그것이 죄악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주님은 자신의 소유로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위해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잠언 14장 31절에서도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만약 가난한 자를 도울 수 있는 형편인데도 돕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본문 속에 나온 부자와 똑같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선한 청지기일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결국 두 사람의 생전과 사후의 모습을 가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교만한 부자는 자신은 율법적으로 거룩하다고 생각한 반면 거지는 죄악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렇게 살아왔다고 정죄한 것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율법의 심판권자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속에 부자가 비유적으로 보면 바리새인들 아닙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을 받은 자로서, 죽어서 천사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다고 믿는 자들이었죠. 반면에 거지와 같은 사람들은 죄인으로서 죽어서 음부로 떨어져 멸망한다고 믿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부자 곧 바리새인들의 생각과 정반대가 되는 형국을 말씀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은 우리 주위에 언제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11절에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땅에 살다 보면 가난한 자들은 항상 우리 곁에 있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정죄하지 말고, 오히려 우리에게 맡긴 물질의 재물의 여유 분 속에서 도우며 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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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자는 사람들 앞에 서는 것과 하나님 앞에 서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으려는데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을 생각지 못했고,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몰랐습니다. 15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고 높임을 받는 것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 앞에서 인정받고 존경받는 것이 하나님에게도 동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전해준 말씀을 알고 있었고 지키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음부에 와서야 자신이 지켰다고 믿었던 것이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한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거지 나사로와 같은 사람들은 어떻다는 것입니까? 이 땅에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 곧 세리와 죄인들은 “자신에게는 아무 소망이 없는 인생임을 알고 주님께 나아와 죄를 회개하였기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거라는 사실이죠. 그만큼 나는 목마른 자입니다, 하는 청지기의 마음과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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